[참세상]
자본의 주문인가, 자신들의 소신인가, 자발적인 비굴인가 [칼럼] 남편의 직장동료를 고소할 수밖에 없는 이유 1997년에 남편 김석진(당시 노조 대의원, 현장조직 민주노동자동지회 의장)이 해고되어 8년 3개월 동안 복직투쟁을 하는 동안, 나를 가장 힘들게 한 이들은 남편의 직장 동료와 그리고 남편과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일부 노조간부들이었다. 남편이 해고되자 노동조합은 개인적 사유라며 철저히 외면했고, 상급단체 또한 노동조합의 눈치를 보며 철저히 외면하기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원직복직을 외치며, 회사정문 앞 도로 바닥에서 혹한의 날씨, 무더위와 싸우며 200여일간 노숙과 40여일간 단식을 할 때였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몸뚱어리는 서 있기조차 힘들어 했다. 남편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자 어린이집과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두 딸을 데리고서 남편의 노숙농성장을 자주 찾았고, 서 있기조차 불편한 남편을 대신해 복직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서 있기도 했다. 그때면 어김없이 남편의 일부 직장 동료들과 남편과 함께 활동했던 노조간부들도 남편 때문에 회사 이미지가 실추되고 회사 영업에 지장을 준다는 내용의 비방 현수막을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은 한술 더 떠 나의 뒤에서 온갖 야유와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쌍소리까지 해댔다. 어린 딸들이 듣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 3년째 남편, 두딸과 함께 서울과 울산을 오가며 일인시위 등을 벌여오면서 남편을 비방하는 현수막을 설치한것에 대한 해고무효화소송이 한창일 무렵,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에서 연이어 승소해 대법원 판결을 앞 둔 시점에 어린 딸은 대법원장에게 조속한 판결을 요구하는 공개 편지를 보냈다. 반면에 남편과 함께 노조 대의원 활동을 했던 92%의 노조 대의원은 남편이 복직되면 무쟁의 8년의 전통이 깨진다는 내용의 복직 반대 서명을 해서 회사를 통해 대법원에 제출하는 일도 있었다. 소송을 위해 변호사 비용도 어렵게 마련했고 가족의 생계는 거의 파탄지경까지 온 상태였다. 한 가정을 지키고자 힘겨운 몸부림을 치는 동료 가족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남편이 해고되기 전에 이들은 노동현장에서 함께 땀 흘리며 노동하고 노동운동을 해온 형, 아우 하는 사이가 아니었는가? 이들의 비정한 행위에 때로는 분노를 삼켜야 했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이들이 한 행위는 지금까지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우리 가족에게 뽑을 수 없는 대못질을 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부터 7년 전까지 있었던 일이다. 남편이 복직된 후에 30여명의 사내하청 노동자가 해고기간 5년 3개월 만에 대법원에서 정규직 인정 판결을 받았다. 이들이 처음 해고 당했을 때 남편도 해고 상태였고 울산지역해고자협의회 의장을 맡고 있었다. 해고된 이들은 남편을 찾아왔고 남편은 이들의 해고무효화소송을 위한 변호사 선임에 직접 나서고 해고자 부부들에게 해고자의 삶에 관한 교육을 하는 등 이들의 복직투쟁에 함께해왔다. 그런 이들에 대한 대법원의 정규직 판결은 남편에게 정말 큰 기쁨이었다. 대법원 판결이 난 후에 이들은 회사를 상대로 조속한 복직을 요구하는 복직투쟁을 벌였고 정규직 노동자인 남편을 비롯한 14명의 노동자는 이들의 복직투쟁에 연대했다. 그리고 이 같은 연대 과정에서 과거에 남편이 해고와 복직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일과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이는 마치 15년 전의 악령이 되살아나듯 남편을 덮쳤다. 사내하청 복직투쟁에 남편이 연대하자 남편의 일부 직장 동료들이 남편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들이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는 “우리 반원들을 위하여 한 사람을 과감히 퇴출시켜야 한다.”, “김석진과의 근무를 거절한다.”,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중간 관리부서의 과감한 조치를 바란다.”, “노동운동을 그만 두든지 아니면 같이 근무하든지 너의 판단에 맡긴다.” 등의 내용이 있었다. 투쟁이 끝나자 이들은 남편을 비방하는 현수막을 남편이 출근하는 현장사무실 출입문 입구와 주변에 내걸었다. “기만과 거짓 너의 욕심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일터 말아 먹으려는 자 당신을 규탄한다.” 등의 현수막 3장을 내걸었다. 또한 점심시간에 감시를 하는가 하면 미행을 일삼았다. 점심시간 감시, 미행 이유는 안전사고 예방 차원이라고 감시자는 말했다고 했다. 최근 남편이 병가 휴직을 내기 얼마 전까지도 이 같은 감시와 미행은 끊이질 않았다. 남편에게는 자유는 없었다. “미포굴뚝투쟁” 이후 지금까지 3년 동안 벌어진 일이다. 비정규직 제도에 어느 놈이라도 관여하면 그만두지 않겠다는 힘이 작용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며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연대는 모든 노동자의 미래가 달려 있는 일이다. 비정규직이 받는 차별과 소외는 말할 것도 없이 심각한 문제이다. 비정규직 제도는 하루빨리 폐기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일부 정규직들은 자본의 입장에서 비정규직 제도를 옹호하고, 비정규직이 있어 정규직이 혜택을 받는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비정규직이라는 독이 든 사과를 받아먹고 과연 현장은 더 좋아졌나?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데 공모하면서 동시에 정규직도 시키면 시키는 대로 숨죽인 채 일만 하고 있지 않나? 어떻게든 정년만 채우고 나가면 되겠지 하는 사이 남편의 직장 동료들처럼 염치도, 자존감도, 뭐도 없는 빈 껍데기처럼 살아간다. 빈 껍데기 마냥 사는 사이 인간의 인간에 대한 도리까지 잊어간다. 동료 노동자가 불이익과 고초를 당해도 함께할 줄도 모르고, 공감할 줄도 모른다. 오히려 자본의 앞잡이, 주구가 돼 범죄에 가담한다. 내가 지켜보아온 3년간 지속된 남편에 대한 악행은 도를 넘어 반인륜적이고 패륜적이었다. 죄 없는 한 가정을 아픔으로 몰아넣는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때문에 남편은 병가휴직을 냈고 산재요양신청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게 자본의 주문인지, 자신들의 소신인지, 자발적인 비굴인지 알 수 없다. 최근에 나는 남편에 대한 비방 현수막 설치를 근거로 남편의 직장 동료이자 전직 노조간부였던 이를 형사고발했다. 직장 동료라는 이유로 노동자라는 이유로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마냥 반노동자적 행위를 덮을 수 없었다. 여기서 눈을 감으면 이 같은 반인륜적이고 새로운 형태의 노동탄압이 더욱더 확산되고 악용될 소지가 있으며,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자본에 인격까지 함께 팔면 노예와 다를 바 없다. 어떤 이유라도 팔아서는 안 되는 것,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게 무엇인지 되물어봤으면 한다. 양심과 영혼까지 팔아가며 집을 산 들 그 집에 머무는 게 그저 흙이 될 몸뚱아리뿐이라면 삶의 의미가 너무 가볍지 않나. 노동자가 노동자를 고발해야 하는 현실에 슬픔과 비애를 느끼며 경찰서를 나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