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산 100회와 노동자교육센터(준)

  • 글쓴이: 박준성
  • 2002-12-01

2002년 11월 17일 역사와 산 100회 산행을 앞두고 쓴 글입니다.
한달에 한번씩 가는 역사와 산 산행과 노동자교육센터에 관심을
부탁드리며 이곳저곳에 올립니다.

1994년 7월부터 시작한 역사와 산이 100회를 맞는다. 100번째 산행은 99번째 다음이고, 그 다음 101회로 계속 이어나갈 산행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기는 해도 '어떻게 해서든 100회는 채워야지...' 수없이 다짐했던 100회이기도 하다.

역사와 산 홈페이지(historymt.org)에 있는 산행 발자취를 복사하여 붙였더니 회수, 날짜, 갔던 곳, 사람수가 세로로 펼쳐진다. 하나하나 가로로 다시 바꾸면서 100회 산행을 되돌아 보았다. 때로는 힘들어서 '역사와 산' 이름을 버리고 싶은 때도 있었다. '맘 편하게 그냥 산에 가고 싶을 때 가고 싶은 사람들끼리 산이나 가면 되지...'하며 이름의 무게 때문에 허우적 거리기도 했다.

역사와 산을 만든 가장 밑바탕 속내는 뭐니뭐니 해도 산이 좋아 산에 놀러가는 모임을 만들어 보자는 데 있었다. 그렇지만 이름을 역사와 산이라 하고 이것저것 의미를 붙였던 것이 단순히 산가는 구실을 찾기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노동자 민중교육과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한 때가 1984년 8월이었으니까 역사와 산을 시작한지 꼭 10년 전이다. 이곳저곳 다녔던 노동자 민중운동 단체들이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에 정권의 탄압과 운영난으로 빠르게 간판을 내리고 문을 닫았다. 동구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사회주의 소련연방이 해체되는 상황이 펼쳐졌다. 운동이 끝났다고 고백하며 보따리를 싸들고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억압 착취구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 민중의 고통스런 현실이 바뀐 것도 아니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역사의 산물이며 결과이다. 이런 현실을 비춰보고 앞으로 나갈 길을 모색할 역사의 거울과 등대는 여전히 필요했다. 문제는 어떻게 역사에 관심과 흥미를 갖게 할 것인가였다. 고심 끝에 찾은 방법이 하나는 강의에 슬라이드 사진자료를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역사기행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슬라이드 강의가 지금은 '슬라이드로 보는 노동운동사'로 정리되었고 역사기행은 역사와 산으로 이어져 100회를 맞게 되었다.

역사와 산의 전사라고 할 수 있는 구로역사연구소의 역사기행이 역사와 산 이전에 4차례 있었다. 제1회 역사기행은 1993년 2월 27일-3월 1일 ‘한국 현대사와 지리산 남부군의 투쟁과 삶’을 주제로 의신마을-삼정마을-빗점골-토끼봉-뱀사골-반선을 갔고, 제2회 역사기행은 1993년 5월 27일-30일 같은 주제로 의신-삼정-빗점-절터골-연하천산장-선비샘-세석-천왕봉-세석-거림을 갔다. 역사학연구소로 이름을 바꾼 뒤 제3회 역사기행은 1993년 10월 15일-17일 ‘1894년 농민전쟁-구례.남원 농민군의 활동과 김개남’을 주제로 산동 월계마을-다름재-만복대-묘봉재-심원골-달궁-운봉-남원을 갔다. 1994년 6월 제4회 ‘1894년 농민전쟁 역사기행’은 모악산을 끼고 진행하였다. 4회 역사기행을 마치고 뒤풀이 자리에서 산을 가면서 역사도 공부하는 산행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1994년 7월, 15명이 참석한 제1회 역사기행을 북한산에서 시작하였다. 그즈음 구로역사연구소는 이름을 역사학연구소로 바꾸고 '역사학교'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그 책임을 내가 맡았다. 역사와 산은 역사학교가 대중을 정기적으로 만나는 중요한 통로로 설정한 사업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역사와 산 초기에는 역사학연구소의 역사기행과 합하여 산행을 한적도 몇 번 있었다. 제4회 대둔산행, 제12회 월악산, 제16회 덕숭산행, 제19회 속리산행, 제29회 조계산행, 제31회 한라산행이 그것이다.

역사와 산을 처음 할 때는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이라 힘든 줄 몰랐다. 산행 안내를 할 때 조금이라도 보기 좋으라고 우편번호 네모칸까지 맞춰가며 도트 프린터로 밤새도록 찌르륵 찌르륵 앞뒤 인쇄를 해서 300여장씩 엽서를 보냈다. 강의하랴 다른 일 하랴 짬을 내서 자료를 준비해야 하니까 금요일 꼬박 밤을 새서 자료집을 만들어 토요일 오전 관악사에 인쇄를 맡겼다. 출발하기 전에 허겁지겁 자료집을 찾아 시청앞으로 갔다. 초기에는 차 뒤쪽에서 산행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술판이 벌어지기가 예사였다. 그렇지 않을 때도 기사옆에 앉아 말을 걸다 새벽을 맡곤했다. 옆에서 교대를 해줘도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역사와 산 때문에 부부싸움도 많았다. 지금은 뒤풀이를 호프 한잔으로 가볍게 마치지만 한참때까지 2차 3차가 예사였다. 아내는 시골에 맡긴 인해보러 갔다가 바리바리 짐을 싸짊어지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곤 하는데 새벽이나 되어 2박 3일을 지샌채 흐느적 거리며 들어가니 쫓겨나지 않은 것도 다행이다. 한번은 우리 역사와 산 산행이 있을 때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 형제분들 자식 가운데 내가 젤 위라 맏상주 노릇을 해야했는데 산행과 겹친 것이다. 나는 산으로 갔고 아내만 큰집가서 장례를 치르고 왔다. 사촌동생이 교통사고로 창창한 나이에 목숨을 잃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집안에서 뭐라고 했을까.

어찌보면 남 싸우고 남 힘들게 일할 때 놀러다닌 일인데도 100회까지 그냥 온 것은 아니었다. 권정생 선생의 '강아지똥'을 보면 강아지 똥도 3일 낮밤 빗물에 풀어져야 민들레 거름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역사와 산은 내 살아오면서 정말 죽자사자 열심히 '놀았던' 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노는데도 힘들었다고 생색내려고 옛 기억을 끄집어 내는 것이 아니다. 11월 14일 한국노동자교육센터 설립 제안자 회의를 하고 노동자교육센터 준비위원회가 공식 출범하였다. 봄에도 대표를 맡으라는 것을 건강을 이유로 못하겠다 도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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