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셨구요, 축하드리고요...그리고....준성형+ 교육 센터 관련 글.....

  • 글쓴이: 유경순
  • 2002-12-23



제목 없음

박준성, 김진순, 신재걸 선배님

 고생 많으셨네요.

온 길 만큼, 갈 길 역시 평탄치  않을 무게들

세 선배님들이 무게 중심을 잡고 헤쳐가시면

조금은 덜어 지겠죠.

늦었지만

홈페이지 만드신 것, 준비위 띄우신 것,

 모두 축하드려요.

그리고 연세(?)들 생각하셔서 바쁘시더라도 건강 꼭! 챙기시고요.

(* 진순언니, 다리는 요즈음 어때요 ? )

 

' 몸이던, 돈이든, 머리가 되던'

될 수 있는 부분들 모아야 겠네요.

 

더디가도,

어느 길로 가나  한 길로 모아지겠죠.

 

* 아래 에  준성 형이 인터뷰를 통해 센터 소개를 하셨기에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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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ze=3>하종강의 휴먼 포엠 ] 2002년12월04일 제437호 
src="http://www.hani.co.kr/h21-image/blank.gif"
border=0>

size=4>“노동자여, 역사를
써라”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 color=#a00000 size=3>박준성 노동자교육센터 소장, 이보다 더 화끈한 강사는 없다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지난해 여름, 박준성(47)씨와 함께 전남대병원 파업현장을 방문했다. 전남대병원노조 간부가 우리 두 사람을 파업하는 노동자들 앞에
굳이 불러세우더니 “한 말씀 하시라”고 했다. 나는 평소 하던 대로 “우리가 이렇게 파업할 수 있는 권리는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신성한
노동기본권으로서…” 어쩌고 하며 짧은 일장연설을 했는데, 마이크를 넘겨받은 박준성씨는 “파업하느라고 수고 많으신 동지들께, 저는 위로삼아 노래나
한곡 불러드리겠습니다”라고 입을 열더니 대번에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젖히기 시작했다.


size=2>파업현장을 ‘소름 돋게’ 하다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 src="http://img.hani.co.kr/section-kisa/2002/12/04/021080000120021204110-1.jpg"
align=left>
사진/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에게 자신의 역사를 들려주고 싶다는
박준성씨. 그는 노동자들이 역사를 재구성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주체로 설 수 있다고 말한다.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
“믿는다 믿어어라아 벼언치말자 누가 머언저 마알했더언가. 에라. 이 씨팔놈들아! 잘먹고 잘살아라! 믿으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노동자의 피땀을 빨아먹느냐 이 개새끼들아!”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박준성씨가 노래를 하다 말고 갑자기 병원 로비가 떠나가라 욕을 해대기 시작하자 옆에 서 있는 나는 물론 병원 로비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모두 움찔했다. 실제로 사람들이 어깨를 일시에 움츠리는 것이 보였다. 파업현장은 일시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그렇다. 박준성씨가 그렇다. 노동교육을 하러 갈 때 나는 예의를 갖춘다고 말끔한 신사복 차림일 때가 많은데 박준성씨는 언제나 허름한
등산복 차림이다. 등에는 항상 배낭을 메고 다닌다. 동산복에 배낭을 짊어지고 수련회에 참석한 노동자들과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넘기도
한다. 배낭에서 큼지막한 환등기를 꺼내는 것으로 그는 강연을 시작한다. 대부분 2시간 정도 걸리는 역사 강연에 200장 넘는 슬라이드 사진을
사용한다. 강의 도입부분, 사진 한장과 함께 그의 목소리가 강의장을 가득 메우며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세계 대공황 시기, 일본은 자국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군국주의 체제를 강화하고 대륙 침략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조선을 견고한
후방기지·병참기지화하면서 조선 민중과 민족해방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했습니다. 1928년, 100만명에 이르는 조선인 노동자들은 오랜 시간의 과도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성인 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반, 여성 노동자는 4분의 1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전시 인플레이션으로 물가는
폭등했으며, 임금은 기아 수준으로 폭락했습니다.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 src="http://img.hani.co.kr/section-kisa/2002/12/04/021080000120021204111-1.jpg"
align=right>
사진/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농성 노동자, 강주룡을 아십니까?"
박준성씨가 교육 때마다 슬라이드로 보여주는 1931년 평원고무공장 노동자의 농성 장면.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
1931년 5월16일,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에서 회사쪽이 일방적으로 임금을 내리겠다고 통고하자 노동자들이 격분해
파업을 시작했습니다. 28일 밤, 파업이 시작된 뒤 공장을 점거하고 시위를 계속하던 노동자들이 아사(餓死)동맹을 결의하자 기업주가 경찰을
불러들여 노동자들을 회사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일본 경찰과 손을 잡은 자본가들에 의해 노동자들의 파업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에서 쫓겨난
여성 노동자 강주룡은 노동자들의 희망과 꿈이 폭력에 의해 사그라지는 현실에 분노하며 밤새 광목을 찢어 줄을 만들었습니다. 다음날 평양에서 가장
높은, 대동강가 높이 12m 되는 을밀대 지붕 위에 줄을 던지고 타고 올라가 ‘고공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일제가 얼마나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탄압하는지 고발하면서 9시간 반 동안이나 그곳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우리 49명은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종국에는 평양의 2300명 고무직공의 임금감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가운데 대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은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해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경찰에 잡혀 평양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76시간 동안 단식하며 대항하다 검속기간이 끝나 풀려났습니다. 풀려난 뒤에도 계속 파업단
대표로 활약하다 다시 공장습격사건으로 잡혀 들어갔습니다. 강주룡은 다시 57시간 옥중단식을 벌이다가 극심한 건강쇠약 증세로 31년 6월4일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검거와 단식, 석방을 거듭하며 노동운동의 중심에서 활약하다 건강을 해친 그는 32년 8월14일,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숨졌습니다. 그때 나이 31살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농성 노동자, 강주룡을 아십니까”


size=2>두 시간 일사천리, 눈이 젖는다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두 시간 동안 일사천리로 울려퍼지는 그의 말을 들으며 사람들은 70년 전 노동자 선배의 절절한 결단이 가슴에 사무쳐 목이 잠기고
눈이 젖는다. 그의 슬라이드는 계속 넘어간다. ‘전평’을 넘고 ‘전태일’을 넘고 ‘동일방직’과 ‘YH투쟁’, ‘부마항쟁’을 거쳐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지평이 열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가슴이 벅차올라 숨쉬기조차 버겁다.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역사의 주인인 노동자 민중에게 자신의 역사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개인에게 자서전이 있는 것처럼 노동자들도 자신과 노동운동에 대한
역사쓰기를 하면 좋겠어요. 역사를 재구성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주체로 설 수 있습니다. ‘이길 때까지 지는 싸움’의 역사 한가운데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자는 겁니다.”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박정희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던 70년대 중반 대학에 들어가 80년대를 살아야 했을 역사학도에게 시련의 시기가 어찌
없었으랴. 을 그가 즐겨부르게 된 사연 역시 눈물겹다. 1990년대 초반은 세계사 대격변의 시기였다. 소비에트가 하루아침에
해체되고, 동구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는 몰락했으며, 국내에서는 운동권 90% 이상이 선택한 ‘비판적 지지 노선’이 대통령 선거에서 무참히
패배했다.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그즈음인데 한 운동단체 노동교실에 갔더니 사람이 4명밖에 앉아 있지 않는 거예요. 그런 교육 한번 하려면 몇달 동안이나
준비하잖아요. ‘앉아서 강의 듣는 것만 교육이냐, 술 마시며 세상 이야기하는 것도 교육이다’ 그런 생각으로 사람들과 함께 술 한잔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사람들이 속상해서 울고, 나는 달래다가 울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자본주의 모순구조를 인정하는 거고 미국놈들과 타협하는
거다’라는 생각으로 끊은 담배를 그날 7년 만에 다시 피웠어요. 혼자 집으로 돌아오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를 가르친 선배들,
노동현장에 있는 지식인 활동가들, 그러다가 썰물처럼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 생각이 나고…. 혼자 술에 취해 길을 걷는데 나도 모르게 ‘믿는다
믿어라 변치 말자 누가 먼저 말했던가…’ 그 노래가 나오더라고요….”


size=2>“혓바닥에 단맛 들면 사람 버린다”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그는 대학을 전체 수석으로 졸업했고 석사·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지금도 대학에서 한국근현대사 강의를 하고는 있지만 “혓바닥에 단맛
들면 사람 버린다”는 생각으로 기득권 세력에 등극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했다.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산행·역사기행 모임 ‘역사와 산’ 고문,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연구·교육위원 등으로 바쁘게 활동하는 그가 요즘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노동교육의 성과를 집약하고, 노동자 교육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담당하는 일에 디딤돌을 놓기 위해 ‘노동자교육센터’를 설립하면서 김진순·신재걸씨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은 것이다.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지금까지 내가 해온 어떤 일보다 부담스러운 교육센터를 만들고 활동하는 일에 얼마만큼 나를 던질 수 있을까, 내가 할 몫을 감당할
수 있을까, 밤을 지새우면서 고민합니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도와줄 거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역사’와 함께하는 내 희망의 근거니까요.”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평소에도 “슬라이드 교육은 일정한 시설을 갖춘 곳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길거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교육할 수
없는 것이 슬픕니다”라고 말해온 박준성씨가 ‘노동자교육센터’를 통해 꿈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희망의 근거가 될 것이다.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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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그림은 하종강씨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바로 그날,
전남대병원 파업현장 방문 사진
src="http://www.labordream.net/zb40pl3/data/hani/Dsc02438.jpg" width=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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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중에 나오는 전남대병원 파업현장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왼쪽이 박준성씨, 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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