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요....
요즘 제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거...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고 한거...
춥다고 바바리 사고싶다고 다닐때...
그 한진동지는 고공에서 그 추위에...
자신의 몸을 스스로...
그 얼마나 힘든 결정을 했을까...
신랑이 너무 그런 생각하지말라고했는데
요즘 앞뒤로 엉키는 출근지하철에서 알지도 못하는 그런 한진동지가
계속생각나는데....요 그럴 수록 더욱 제 마음을 단단하게 다짐하는거
공부해서 나두 조그마한 나두.... 실천해보자........라는거
근데 계속 이해가 안되고 열받는건
그 밥 먹여주지도 않는 축구열풍이 불었을때 다같이 응원가자고 너나할꺼없이
모였으면서
장갑차에 여중생이 죽고 wto송동지를 비롯해서 사람이 죽었는데도 왜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것 처럼 지내는지 모르겠어요 이것만 생각하면 화가나서 참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럴까요 선생님...
/아침부터 주절리주저리
>>> Writer : 박준성
> "더 이상 죽이지 마라"
> 정태춘 노래를 속으로 외치다 외치다
> 잠이 들었습니다.
>
> 어제 점심을 먹다가 한진중공업 김주익 동지
>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옆에서 후배가 독기 섞인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합니다.
> "선배! 또 울려고 하지, 운다고 살아!"
> "누가 울려고 작정해서 우냐..."
>
> 8월 11일 한진중공업에 갔었습니다.
>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 목청 높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낭송하고
> 조합원들과 함께 크레인을 처다보며 외쳤습니다.
> "김주익 지회장님 힘내세요"
> "김주익 지회장님 힘내세요"
> 그리곤 두달이 훌쩍 넘었습니다.
> 아,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를 외치지 말고
> "외로워마! 서러워마! 우리가 있다
> 힘찬 깃발 휘날리며 나 여기 서 있다"
> 이 노래를 불렀어야 했는데...
> 하나마나한 엄한 생각을 해봅니다.
>
> 한번 더 갔더라면
> 조합원들이 좀더 꿋꿋이 버틸 수도 있지 않았을까...
> 내가 할 수 있는 몫이 한없이 작다는 걸
> 커서도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 미안하고
> 죄송하고
> 부끄럽고
> 숨고 싶습니다.
> .............
> 비틀거리면서라도 가야지요
> 역사를 돌이켜보며
> 아무리 힘들었어도 버리지 말아야 했던 것은
> '희망'이었고
>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해방의 꿈'이라고 말해야지요.
> 배달호 동지가 죽었을 때도 그 전에도 그전에도 그랬던
> "아, 이젠 제발 열사가 되지도 말고
> 열사를 만들지도 말자"고 말해야지요.
>
> 눈물 흘리지 말자 다짐하면서
> 입술을 깨물며 신발끈 조여매고
> 가야할 곳 오라는 곳 있으니
> 가야합니다.
> (2003.10.17)
>
>
>
> 한진중공업 지회 김주익 열사 유서 1
>
> 오랜만에 맑고 구름없는 밤이구나
> 내일 모레가 추석이라고 달은 벌써 만월이 다 되어가는데, 내가 85호기 크레인 위로 올라온 지 벌써 90여일 조합원 동지들의 전면파업이 50일이 되었건만 회사는 교섭 한번 하지 않고 있다. 아예 이번 기회에 노동조합을 말살하고 노동조합에 협조적인 조합원의 씨를 말리려고 작심을 한 모양이다.
> 노동자가 한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다.
>
> 1년 당기 순이익의 1.5배, 2.5배를 주주들에게 배상하는 경영진들, 그러면서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어렵다고 임금동결을 강요하는 경영진들.
> 그토록 어렵다는 회사의 회장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 거액의 연봉에다 50억원 정도의 배상금까지 챙겨가고 또 1년에 3천5백억원의 부채까지 갚는다고 한다.
> 이러한 회사에서 강요하는 임금동결을 어느 노동조합, 어느 조합원이 받아들이겠는가?
>
> 이 회사에 들어온 지 만21년, 그런데 한달 기본급 105만원, 그중 세금 등을 공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8십몇만원 근속년수가 많아질수록 생활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져야 할텐데 햇수가 더할수록 더욱더 쪼들리고 앞날이 막막한데 이놈의 보수언론들은 입만 열면 노동조합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니 노동자는 다 굶어죽어야 한단 말인가. 이번 투쟁에서 우리가 패배한다면 어차피 나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 한사람 죽어서 많은 동지들을 살릴 수가 있다면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경영진들은 지금 자신들이 빼어든 칼에 묻힐 피를 원하는 것 같다.
> 그래 당신들이 나의 목숨을 원한다면 기꺼이 제물로 바치겠다.
> 하지만 이 투쟁은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
> 잘못은 자신들이 저질러놓고 적반하장으로 우리들에게 손해배상 가압류에 고소고발에 구속에 해고까지 노동조합을 식물노조로 노동자를 식물인간으로 만들려는 노무정책을 이 투쟁을 통해서 바꿔내지 못하면 우리 모두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승리할 때까지 이번 투쟁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 그동안 부족한 나를 믿고 함께 해준 모든 동지들에게 고맙고 또 미안할 따름이다.
> 그렇지만 사람은 태어나면 죽는 것, 40년의 인생이었지만 남들보다 조금빨리 가는 것뿐. 결코 후회는 하지 않는다.
>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무엇하나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서 무어라 할말이 없다. 아이들에게 힐리스인지 뭔지를 집에 가면 사주겠다고 크레인에 올라온지 며칠 안되어서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조차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 준엽아. 혜민아. 준하야.
> 아빠가 마지막으로 불러보고 적어보는 이름이구나.
> 부디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 바란다.
> 그리고 여보.
> 결혼한지 십년이 넘어서야 불러보는 처음이자 마지막 호칭이 되었네. 그동안 시킨 고생이 모자라서 더 큰 고생을 남기고 가게 되어서 미안해.
> 하지만 당신은 강한데가 있는 사람이라서 잘 해주리라 믿어. 그래서 조금은 편안히 갈 수 있을 것 같애.
> 이제 저 높은 곳에 올라가면 먼저 가신 부모님과 막내 누나를 만날 수 있을꺼야. 그럼 모두 안녕.
>
> 2003년 9월 9일
> 김 주 익
>
> 유서2.
> 조합원 동지 여러분!
> 회사의 경영진들은 우리 노동자들을 최소한의 인간 대우를 해달라는 요구를 끝내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 대의원 이상 간부동지들. 그리고 조합원 동지 여러분.
>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투쟁은 계속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노동조합을 사수할 수 있고 우리 모두의 생존권도 지켜질 수 있습니다.
> 동지들
> 나의 죽음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나의 주검이 있을 곳은 85호기 크레인입니다.
>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입니다.
> 10. 4.
> 김 주 익
>
>
> 김주익 열사 약력
>
> 생년월일 : 1963년 2월 2일생(만 40세)
> 주소 : 부산시 사하구 하단동 520-29 13/3
> 가족관계 : 미망인(박성희 : 36세) 아들(준엽 : 12세), 딸(혜민 10세), 아들(준하 : 7살)
>
> 1975년 2월 철암초등학교 졸업
> 1975년 3월 철암중학교 입학
> 1978년 2월 철암중학교 졸업
> 1978년 3월 태백기계공고 입학
> 1981년 2월 태백기계공고 졸업
> 1982년 2월 (주)대한조선공사 직업훈련소 입소
> 1982년 8월 1일 (주)대한조선공사 (현)한진중공업 입사
> 1990년 8월 한진중공업노조 제28대 대의원, 문체부장
> 1992년 8월 한진중공업노조 제30대 수석부위원장
> 1993년 8월 한진중공업노조 제30대 부위원장 역임
> 1994년 한진중공업노조 제 31대 사무국장 역임
> 1994년 7월 한진중공업 LNG 선상 파업투쟁으로 구속, 강제휴직
> 1995년 8월 한진중공업 원직복직, 산업안전보건위원
> 1996년 8월 한진중공업노조 제34대 대의원
> 1997년 8월 한진중공업노조 제35대 대의원
> 2000년 11월5일 한진중공업 통합 노동조합 초대위원장 당선
> 2002년 11월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 재당선(임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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