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성의 투병일기 1 -"아프면 좀 어때?"

  • 글쓴이: 박준성
  • 2003-12-28

참 묘한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리움이 없는 기다림이었습니다
기다리고 싶지 않으나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시간이
한 달 열흘이 지나고, 그보다 더 긴 3일이 지났습니다

오늘 오전 담당 의사가 회진을 했습니다
예상은 했으나 바라던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지난 번 CT 촬영 사진에서 보았던 3-4cm되는 것이...
확실하니까 29일 오전에 색전술 시술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색전술 시술은
'간종양 동맥 경화 화학 색전술'이라고도 하고
'간종양 화학 색전술'이라고도 하는 간암에만 쓰이는 치료법이랍니다
종양 앞쪽 동맥을 화학약품으로 막아 피와 산소를 통하지 못하게 하여
종양을 괴사시킨다는군요.

11월 14일부터 여기까지 한 단계씩 걸어왔던 검진 결과를 돌아보면서
병원에 들어와 먼저 입원해 있던 선배들의 경험담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냥 나갈 수는 없겠구나'하고 마음 준비는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조직검사 결과를 듣고 나니까
'아, 내가, 세상 크게 잘못 산 것도, 아닌데,
아직 나이도 창창한데, 할 일도 많은데, 내가, 왜, 암이야!'하는
반발감이 물밀 듯 밀려왔습니다.
준비했던 마음의 평정이 파도에 휩쓸리듯 휘청거렸습니다

마음이야 마음으로 수없이 다스리려 했지만
몸은 몸대로 무척 긴장을 했나 봅니다
2-3일 사이에 사방 어금니들이 찬물 한 모금도 닿지도 못하도록 예민해졌습니다
'몸' '몸' 하던 사람이 갑자기 '마음' '마음'하니까
몸이 헷갈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몸이 좀 안좋다고
"몸가는데 마음간다"를 바꿀 수는 없겠지요
몸이 그것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평생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전해주고 다른 병실로 떠난
담당 의사의 표정과 말투가 떠올랐습니다
의사에게 나는 환자이듯
내게 간종양은 종양인걸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간암은 치료를 받으면 되는 거잖아
'내'가 왜 이렇게 흔들리지...
나도 의사처럼 간에게 담담해져야지...
다시 기분을 추슬러 보았습니다

입원 날자 예약하고 열흘 남짓 약속했던 강의
처리해야 할 일들 마무리하는 사이에
그전 같으면 볼 일이 없었을



을 훑어 보았습니다.

마지막 팬클럽을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한 마디가 "지면 어때?"였습니다
소설 속의 '나'는 푸른 하늘 처다볼 시간조차 없이 몇 년을 일했지만
구조조정에서 밀려 '가정을 버리고도, 회사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퇴출당했습니다
상처가 쉬 아물지 않고 때때로 분노가 터져나옵니다
어느 날 친구와 나 사이에 이런 식의 얘기가 오고 갔습니다
"부끄러운 게 아니잖아"
"부끄러운 거야"
"왜?"
"진거니까"
그때 친구가 말합니다.
"지면 어때?"
이 말을 듣는 순간 주인공에게 졸음이 몰려오고
'자면 어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길고 아득한 잠에 빠져듭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지면 어때'를 '아프면 어때'로 바꿔보았습니다
기분이 개운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프면 어때' 같은 말 안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더 간절했습니다
이제는 '좀'을 보태 확실하게 이 말을 해야할까 봅니다
"아프면 좀 어때?"
여기에 한 마디 더 보태야 하겠습니다
"다시 시작해야죠 뭐"

속으로 '또 다시 앞으로'를 불러봅니다
가버린 세월을 탓하지 마라
지나간 청춘일랑 욕하지 마라...
자 또다시 일어나 역사에 발맞추어 하나!둘!셋!...
끝내는 우리가 건설할 세상을 향해 앞으로!

다시 시작하더라도 그 길은 지금까지 왔던 길에 이어지는 것일 터이고
'역사의 제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면
투쟁의 역사
희망의 교육
해방의 꿈을
함께 이루어갈 관계와 실천이 필요하겠지요
혹시 제가 좀 천천히 가더라도 때때로 기다려 주십시오
모르지요
제가 더 빨리 갈 때도 있을 겁니다
그때는 그리움 가득 담아 기다리겠습니다

걱정해주시는 분들께 이원수 선생님이 돌아가시기전
마지막으로 썼다는 동시
'겨울 물오리'를 전해드립니다.

얼음어는 강물이 춥지도 않니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아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 귀여운 새야
나도 이젠 찬바람 무섭지 않다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백창우가 곡을 붙인 노래는 나중에
기타치면서 같이 불러보겠습니다

묘한 기다림 끝에 얻은 이 아픔과 시련이
앞으로 지금보다 더 고개숙이고 낮춰살라고
수련과 명상의 시간을 좀더 가져보라고
2003년이 제게 준 소중한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순간 순간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꿋꿋하게 버텨
'박준성의 투병일기' 될 수록 빨리 끝내겠습니다

2003년 잘 마무리 하시고
2004년 힘차게 맞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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