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선 치료

  • 글쓴이: 박준성
  • 2004-05-23

* 간에 있던 종양 세개는 CT촬영과 약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한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간암에서 임파선으로 전이된 종양이 또 있어
4월 말부터 토일빼고 날마다 병원에 다니면서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1차로 20회 예정인데 이제 17회를 마치고 다음주 3회가 남았습니다.
아직은 걱정했던 것 만큼 방사선 치료 후유증이 크지 않습니다.
힘이 좀 떨어지고 기분이 축 처질 때가 더러 있지만
먹고 노는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

28일 CT촬영과 혈액종합검사를 한 뒤
6월 2일 의사 면담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때 다시 간암 상태와 임파선 방사선 치료 결과를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병원에 갔다오면 오전 시간은 다 가버리므로
하루하루가 더 빠듯합니다.
어떤 때는 '치료'를 잊기에 급급한데도
하고 싶은 것들, 먹고 싶은 것들
보고 싶은 사람들은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닦아
흔들림 없는 상태를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매일노동뉴스에서 노동운동사 강의를 해달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건강이 안좋아 교육을 할 수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인터뷰를 하자고 합니다.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있는데 무슨 인터뷰냐고 사양을 하다가,
내 사정도 알릴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요즘도 이따금 강의를 해달라는 전화가 오곤합니다.
강의를 할 수 없다고 하면
"아, 미안합니다. 빨리 건강회복하세요"
하고 당황해 하면서 전화를 끊습니다.
오히려 제가 더 미안합니다.

매일노동뉴스에 실린 인터뷰 기사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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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투병 중인 박준성씨 -

노동자교육 20년 간암판정 불구 “투병과정은 또 다른 희망”

“아, 모르셨군요? 선생님 지금 많이 아프세요. 일체 교육을 못 하신다고 들었어요.”

우연찮게 접하게 된 소식…, 뜻밖이었다. 최근 신입기자 몇몇을 공채한 는 큰맘 먹고 외부강사를 초빙해 ‘교육다운 교육’을 해보려고 했다. 노동언론 기자라면, 취재에 앞서 우리 사회의 ‘노동’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가 필요하며, 그 중에서도 이것만큼은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고 여겼다. 노동운동사. 단박에 떠오르는 이가 그였다.

박준성(49). 슬라이드와 환등기를 배낭에 짊어 지고 노동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않고 전국을 누볐던 그. 노동자 교육을 마치고는 밤새 그들과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고민을 털어놓고 또 들으며, 희망과 미래를 이야기하던 그. 그 세월이 20년이었다. 그런데, 그 세월이 화근이었을까. 지난해 11월, 그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통보받았다.

간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프면 어때?”

지난 17일 만난 그는 꽤 말라 보였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무거운 배낭을 짊어 매고 전국을 누빈 사람이 맞는지 솔직히 의심스러웠다. 실제 그는 투병 전보다 무려 12kg이나 살이 빠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가 간암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 사실을 눈치 채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살짝 생기를 띠며 소탈하게 웃는 그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요새는 아침 5시께 일어나요. 1시간 쯤 체조도 하고 명상도 하고. 투병생활 하기 전부터 하던 거예요. 그리고는, 아침 7시쯤 둘째아이를 하남의 ‘푸른숲 대안학교’에 데려다줘요. 산길로 가야 하거든요. 아이들 걸음으로 1시간쯤 걸리는데, 가면서 만나는 아이들 모아놓고 기체조도 가르치고 그래요. 도착해서는 학교에서 풀도 뽑고 꽃씨 뿌린 것 봐주기도 하고.”

간암판정 후 반년 가량 지난 지금, 그는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반년이었다. 그동안 그는 모두 3번 입원을 하면서 간 혈관을 틀어막아 항암제를 직접 투여하는 색전술 시술을 받는 등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다. 시술 후 밥맛이 없는 것은 물론 밤새 끊어질 듯한 배를 움켜쥐고 쓴물을 토해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솔직히 원망스러웠다. “내가 세상을 크게 잘못 산 것도 아닌데, 아직 나이도 창창한데, 할 일도 많은데, 내가 왜 암이야!” 반발감이 물밀듯 밀려오고, 준비했던 마음의 평정이 파도에 휩쓸리듯 휘청거리곤 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지면 어때?”

마음을 추스르며 읽던 책들 중 에서 나오는 대사, 그것이 그의 머리를 쳤다.

“아프면 좀 어때?”

살짝 그 대사를 바꿔보았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노동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몸도 몸이지만 교육을 못하는 것이 큰 고통이었어요.”

박준성씨는 지금은 처음보다 많이 안정됐지만, 노동자교육에 대한 애정만은 끊기 어려웠다고 솔직히 말한다.

“처음엔 활동을 끊는 것도 힘들더라구요. 빨리 나아서 다시 활동해야지, 퇴원 후에는 그래도 민주노총 노동자학교나 간부교육 등 일주일에 1~2번은 해야지, 그랬죠. 하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주변에서 말리더군요. 쉴 때 좀 쉬라고. 경과가 어떻든 무조건 1년은 중단하기로 했죠.”

역사학연구소(구 구로역사연구소), 산행·역사기행 ‘역사와 산’, 슬라이드로 보는 근현대 200선,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노동자교육센터….

박준성, 그를 따라다니는 단어들이자, 진보적 역사학자로서 노동자·민중교육에 뛰어든 그의 소중한 자산이자 역사이기도 하다.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81년 5월27일, 서울대에서 공부하던 시절. 규장각에서 아르바이를 하다가 잠시 쉬러 밖에 나온 그 찰나, 한 학생(김태훈)이 그의 눈 앞에서 “전두환 군사정권 퇴진”을 외치며 떨어져 죽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마음을 어지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공부냐…. 한 선배를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선배가 “공부로도 나중에 할 일이 많다”며 노동자·농민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근현대사 개설서를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더란다. 결과적으로 아직까지 그런 개설서를 쓰지는 못했지만, 그 일은 강의를 통해 노동자·민중 교육에 뛰어들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것이 광주와도, 김태훈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여겼다. 84년 석사논문 제출 후 8월 노동자 대상 첫 강의를 시작했다.

“노동자가 있는 곳이라면 안 가본 곳이 없어요. 울릉도만 빼고요. 하하하.”

쑥스러운 듯 웃는 그는 90년대말부터 투병 전인 지난해말까지가 한창 교육을 많이 했는데, 1년에 전국 200~300여곳을 누비고 다녔다고 한다. 기상이 나빠 비행기가 뜨지 않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펑크를 낸 적도 없다. 노동자가 얼마가 있든 개의치 않았다. 1,000여명이 넘는 사업장도 있었고, 달랑 4명인 경우도 있었다. 노동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는 달려갔다.

‘배낭과 노동자’를 선택한 역사학자

그의 교육은 슬라이드를 통해 근현대사, 노동운동사에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매력을 갖고 있다. 말로만 하는 강의에서 더 관심을 높이기 위해 91년부터 각종 자료는 물론, 직접 현장에 달려가 슬라이드를 찍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94년 ‘근현대사 200선’을 완성했고, 96년부터는 엄청난 무게의 슬라이드, 환등기, 카메라를 짊어 매고 본격적으로 전국 곳곳을 다니며 ‘슬라이드로 보는 노동운동사’를 강의했다. 슬라이드를 넘기며 음악도 깔고, 테잎이 준비되지 않았을 땐 그가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런 강의를 직접 들은 이들은 그의 강의가 “매우 힘 있고, 거침없으며, 시간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다”고 소개한다.

박준성씨는 “그때는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요새 사람들이 배낭 안 진 모습을 보니까 이상하다고들 하더라구요”라고 쑥스러운 듯 이야기 했지만, ‘배낭을 짊어진’ 모습은 그의 상징이었다.

이런 삶은 그를 평생 대학에서는 ‘비정규직’ 시간강사로 남겨두었다. 투병 전에는 외국어대 등에서 강의를 해왔는데, 20년이면 충분히 전임강사가 가능했을 세월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배낭과 노동자’를 ‘선택’했고 후회해 본 적은 없다고 한다. 이런 그의 ‘선택’은 하나를 위한 것이었다.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민중에게 자기의 역사를 들려주고 싶었고,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가 역사의 주체로 설 수 있기를 바랐어요. 그리고 이제는 노동자가 스스로 자기 역사를 제대로 쓸 수 있어야 하고요.”

지난해 설립한 ‘노동자교육센터’ 역시 이런 고민 속에서 나왔다. 그동안 역사학연구소에서 민주노총 등과 교육사업을 해왔으나 여러 사업의 일환이었을 뿐, 교육을 전문적으로 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교육만 전문적으로 하는 상설적인 교육공간이 필요하다고 보았어요. 이를 위한 역량이 결집된…. 제 강의의 맹점은 (슬라이드 상영을 해야하니까)‘어두운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죠. 그런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마음이 있어도 강의를 할 수가 없거든요. 특히 비정규노동자는 더 한계가 많았지요.”

“투병은 ‘희망’을 몸으로 확인하는 과정”

지난달 검사 결과, 그의 간에 들러 붙어있던 모두 3개의 종양이 모두 사라졌다.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다고 했다. 조심조심 힘겹게 투병생활을 한 결실이었다. 그러나 기쁜 마음도 잠시, 암이 임파선으로 전이됐다는 ‘통보’를 또다시 받았다.

그는 지난달 중순부터는 오전 10시40분까지 꼬박꼬박 병원에 다니고 있단다. 이번 달 말까지 모두 20회의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요. 처음보다 많이 안정됐거든요. 체조, 치료, 식이요법, 숙면 등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철저히 지내고 있어요. 아내도 헌신적으로 저를 돌봐주고 있고, 지인들도 많은 힘을 주고 있으니까요.”

다행히 경과가 좋은 편이란다. 지금 그의 일차적 ‘투쟁’ 과제는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다.

“오히려 다행이예요. 조기에 발견된 거니까. 이제는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또 하나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봐요. 희망은, 지금의 상태를 바꾸는 것, 진보를 실현하는 역사발전의 과정이잖아요. 그런 희망을 내 몸으로 확인해야지요.”

이 희망은 또 다른 희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하다 건강을 해친 노동자들이 안정되게 쉬면서 건강을 회복하고 공부도 할 수 있는 노동자건강교육수련원’을 설립하고, 우리의 현실에 맞는 ‘노동자교육론’을 정립하는 것 등이란다.
어쩌면,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이 되는 그 고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진보적 역사학자로서 그의 평생의 신념이자 의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윤정 기자(yon@labornews.co.kr)
ⓒ매일노동뉴스 2004.05.21 14: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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