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2회 역사기행이 생각이 나서 6월 20일 소쇄원에서 설명을 해주었던 "소쇄원을 사랑하는 모임"을 들어가 보았더니 그날 설명했던 내용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못가신 동지들을 위해서 글을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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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문화유산은 정신ㆍ사상적 요소, 건축적요소, 조경적 요소, 석물요소, 수(水)공간, 행위적 요소 등에 유의하면서 대해야 한다. 이전처럼 유명하다니까 그저 보고 오는 것과는 달리 깃들어 있는 의미ㆍ정신ㆍ사상 등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만 은은한 향기와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잇다. 그렇지 않다면 다수의 방문으로 인해 훼손멸실의 가속화만 있을뿐이다. 차라리 가지 않는 것이 관리보전에 일조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인들은 총체적 학문인 우주학(성리학)을 하셨기에 그 영역이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의학ㆍ역학ㆍ조경ㆍ예술 등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우주를 이루는 본체는 양ㆍ음이다.
예를 들자면, 하늘ㆍ땅, 남ㆍ여, 낮ㆍ밤, 해ㆍ달, 혹수ㆍ짝수, 원형ㆍ방형, 수키와ㆍ암키와, 장작과 아궁이 등이며, 우리의 문화유산 요소요소에 스며 있다. 하늘은 둥글고 양이요, 지동설의 입증 이전까지는 땅은 각져 있었고 음이라고 생각했다.
지동설을 얘기할 때면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콜럼버스, 마젤란을 말하면서 김석문, 이익, 홍대용, 박지원, 이민철, 손이영 등 우리 선인들은 왜 말하지 못하는가? 중요하기에 미리 언급한다.
우리의 문화유산은 각기 별개가 아니라 장소와 형태의차이가 있을 뿐 구성요소와 내용은 대동소이하기에 소쇄원을 통하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시각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등산 원효계곡을 오른쪽으로 두고 산모퉁이를 휘감아 돌면 오백년의 숨결이 있는 소쇄원을 만나게 된다. "황금정"이라는 정자 터 또는 우물 터로 추정되는 곳이 지표 발굴 조사도 없이 논과 주차장으로 변했기에 나 또한 문화유산의 훼손 멸실자라는 죄책감을 느끼며 입구에 들어선다.
"창암촌"이라는 안집과 "수박정"이라는 정자 터로 추정되는 곳을 왼쪽에 끼고, 대숲 사이를 흘러 외부로 빠져나가는 물줄기 위로 다리가 놓여 있다. 초가 지붕이 슬레이트로 바뀌고 온 나라가 시멘트로 뒤법벅이 되기 전까지는 이 곳에 홍교(虹橋 : 무지개다리)가 있었다.
홍교는 사찰 입구의 일주문, 서원ㆍ향교의 홍살문처럼 속(俗)과 비속(非俗)의 경계요, 마음을 가다듬는 상징적 구조물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엔 홍교는 흔적도 없고 "퇴비증산"이라는 글귀와 함께 시멘트 다리가 놓여 있다. 나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우리 문화유산과 정신ㆍ사상의 파괴를 알리는 서곡을 듣는다.
다리를 지나 대숲길이 나온다.
본래는 두 사람이 비켜 지나갈 정도의 호젓한 오솔길이었는에 새마을 운동을 내세워 시멘트로 포장하는 바람에 호젓함은 어디가고 왜곡된 근대화에 신음하는 소리만 귓전에 맴돈다.
위로 올라가면 담장이 나온다.
우리의 전통 담장에는 기(氣)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사람이 사는 집안에 상서롭지 못한 기운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함이다. 기(氣)가 어려운 이론만은 아니다. 우리의 의식과 생활속에 내재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기분 좋다, 기분 나쁘다, 기 살다, 분위기 좋다, 분위기 나쁘다, 기가 막히다, 기절했다, 감기 들었다 등이다. 우리의 전통 담장 높이도 나즈막했다. 자자일촌 사회였기에 굳이 담장을 안 쌓아도 되었지만 위의 이유 때문이다.
어느 답사기에는 소쇄원과 마을을 구분, 경계 짓기 위함이라 했는데 이는 담장에 대한 의미와 사상을 모르는 억설이다. 또한, 소쇄원 조성 당시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소쇄원 외원(外園)에 관한 내용을 도외시한 얘기라고 생각한다. 아낙네들이 담장에 기대어 속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며, 담장 너머로 떡을 나눠 먹던 모습이 선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경제적 가치만을 중시하여 담장을 높이 쌓고, 깨어진 병 조각을 꽃아 두고, 철책을 두르고 감시기구까지 설치하지 않는가? 지금의 담장 높이는 우리들 마음의 벽이요, 각종 장치는 불신의 소품들이 아닐까?
안쪽으로 들어서면 대봉대(待鳳臺)가 나온다. 귀한 손님을 봉(鳳)에 견주어 맞이했던 곳이다. 우리 선인들은 나무 한 그루, 꽃 한 포기에도 등급(1~9)을 두었으며 의미를 부여하여 역할에 맞게 심고 대우하였다. 또한, 가정에서는 제사를 모시기에 신을 쫒는다는 의미를 지닌 배롱나무와 여성들의 정숙함을 헤친다는 밤나무처럼 심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그런 의미를 모를 뿐더러 감각 기관 중에서 유독 시각만 발달하여 화려하고 오래가는 수목화초라면 가리지 않고 심는다. 하기는 자신의 배우자마저 키 크고 얼굴 예쁘면 덥썩 선택했다가 셋 중에 하나는 헤어진다니 더 말해 무엇하리. 화무십일홍(化無十日紅)이라 했거늘!
으뜸으로 삼았던 수목화초는 매(梅)ㆍ국(菊)ㆍ죽(竹)ㆍ송(松)ㆍ연(蓮)이며 등급에 들지 못하는 것들을 잡초ㆍ잡목이라 하여 뽑고 베어냈던 것이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등급이 있다. 예전엔 태생적 신분이었으나 지금은 정신ㆍ사상ㆍ품위에 따라서 등급이 엄연히 존재한다. 인간 이하의언행을 한 자에게 인간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잡놈ㆍ잡년"이라 하지 않더냐! 요즘 사람들은 이런 소리를 듣고도 그저 웃더라. 모두 다 도를 깨쳤나보다.
대봉대와 의미를 같이하는 곳은 해운대, 경포대, 을밀대 등이며 청와대 또한 대통령이 사는 집이 아니라 국빈을 맞이하는 곳이다. 대봉대 앞에는 벽오동이 있다. 봉황은 오동나무에서만 깃을 내리고, 대나무 열매와 대나무 이슬을 먹고 산다하여 오동나무가 심어져 있으며 주위엔 대나무가 있고 샘이 있다. 이 또한 나무 한 그루라도 의미있게 심어야 할 곳에 심었던 선인들의 의미로운 삶이 아니던가?
몇 걸음을 옮기면 애양단(愛陽壇)이 나온다. "효경"에 출전하는데 부모공양, 곧 "효(孝)를 의미한다. 바로 앞에는 효를 상징하는 동백나무가 심어져 있다. 동백은 사철나무요 추운겨울철에 꽃을 피운다. 이렇듯이 사시사철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모를 공양하되, 추운 계절엔 더욱 더 지극정성으로 부모님을 공양하라는 의미이리라.
왼쪽으로 돌면 오곡문(五曲門)이라는 글씨와 축대 밑으로 흐르는 물을 볼 수 있다. 오백년을 의연히 품어온 축대도 불가사의하려니와 물길을 돌리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며 조화ㆍ상생을 추구했던 선인들의 정신에 경탄을 금할 길이 없다.
오곡문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무이구곡(武夷九曲) 중 오곡에서 무이정사를 경영하며 학문과 후학 양성을 했던 데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답사기에서 오곡문의 담장 밑으로 물이 다섯 번 굽이쳐 흐르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은 억측이라 생각된다.
숫자에 관하여 간략히 얘기해 보자. 홀수가 양이요, 짝수가 음이다. 홀수 중에서 1, 2, 3, 4, 5가 생수(生數)이고 6, 7, 8, 9가 성수(成數)이다. 3이 기본이요 5가 중간이고 9가 가장 크고 깊으며 완전하다. 그리하여 천지인, 초사흘, 삼칠일, 삼신 할머니, 아침ㆍ낮ㆍ저녁 등이 3에서 비롯하며 심지어 가위바위보를 할 때도 세번 하지 않는가? 또한 구중궁궐, 구중심처, 구곡간장, 화왕구곡, 고산구곡, 구룡폭포, 무주구천동, 대붕(大鵬)이 구만리를 난다 등은 9에서 비롯한다.
외나무 다리를 건너려 하니 살구나무가 서 있다. 살구나무는 무병장수를 의미한다. 예전에 이곳은 인적도 드믄데다가 나무는 울창하고 수량이 많아 다리를 건너기가 조금은 무섭고 위험스러웠나보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살구나무는 조심하라는 주의ㆍ경고의 말을 의미한다. 요즘은 어떠한가? "거기 위험하니까 조심하세요."라고 고함을 지르거나 표지판을 세웠을 것이다. 얼마나 경박스러운가? 우리 선인들은 자연물에다 상황에 맞는 뜻을 실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묵담(默談), 필담(筆談), 주담(酒談), 화담(畵談), 다담(茶談) 등도 맥을 같이 하는 다양한 대화의 방법이다.
여성들이여, 다담을 시도해 보라! 은은한 차 향기에 그대의 마음을 실어 보낼 때 연초록 미소로 화답하는 남성이야말로 진정 그대의 화담이 아니겠는가? 남성들이여, 묵담을 보내보라! 한 시간이 지나도록 말 한 마디 아니해도 그윽하고 고운 눈빛을 보내는 여성이 그대의 진이 아니더냐?
외나무 다리의 아래쪽에는 조담(槽潭)이 있는데 학문과 도(道)를 닦기 위한 정갈한 마음을 준비하기 위한 곳이다. 조담이 용솟음쳐 바위폭포가 이뤄진다. 폭포수를 봉황의 춤이라 했던가?
옆에는 세월의 유혹에 넘어가 비스듬히 드러누운 탑암이 있다. 한 사람이 정좌하여 수양을했음직하다. 소쇄원 목판도에는 좌선 모습의 한 사람이 새겨져 있다. 초ㆍ중학교 시절에 잘못을 한다치면 선생님은 그 아이를 불러 무릎을 굻렸는데 이것을 체벌의 한 방법으로 여겼는지 수양의 기본자세임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외나무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오곡문 터가 있으며 밖으로는 봉황이 목을 축인다는 샘이 있다 오곡문 터와 제월당(齊月堂)이 있다. 괴석은 홰나무와 쌍으로 어러지는데 남가일몽의고사에서 연원하며 인생의 무상함을 일깨워 준다.
당나라의 순우분이란 사람이 남가 태수가 되어 공주와 혼인하여 5남 2녀를 낳고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전쟁에 패하여 만신창이가 되었다. 언뜻 눈을 뜨니 꿈이었더라. 부귀영화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로고, 부자(富者)는 삼대(三代)를 못 넘기고,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아니하더냐!
걸을을 옮기니 담장에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라는 글씨가 쓰여 있고 뒷담장은 단(亶) 처리가 되어 있으며, 앞에는 고사한 측백나무가 의연히 버티고 서 있다.담장의글씨는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문패가 아닐까 생각한다.
앞의 측백나무는 살아 천년, 죽어 천년 간다는 학문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따라서, 이곳은 학문하는 장소임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뒷 담장의 단(亶) 처리는 담장 뒤쪽에 소쇄원을 방문 할 때 신위를 모시고 공격의 예를 갖추던 제단이 있기 때문인데 이는 애양단(愛陽亶), 교단(敎亶)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앞으로 향하니 제월당(霽月當)이 나온다. 안주인의 거처 공간이 내당이고 바깥주인의 거처 공간이 외당인데 당호를 사용하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의 위치, 역할에 기인한 일종의 존칭이다. 연경당, 녹우당, 다산초당, 환벽당, 부원당 등이 그 예이다.
마당에서 제월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두 개인데 왼쪽 것은 주인 전용이고, 오른쪽 것은 내방객용이다. 이는 사찰, 서원, 향교, 사당 등 절대자나 신적인 존재, 망자를 모신 공간에서 일반인이 중앙의 문이나 계단을 사용하지 않는 것과 같이 상대에 대한 배려요, 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곳 굴뚝에서는 연기가 자주 피어오른다. 아궁이에 불을 지핌으로써 습도 조절이 되고, 사람이 살기 때문에 관리, 보전이 잘 되는 것이다. 전통 건축 문화재를 관리 보전하는 최소한의 방법이다. 박재화한 문화재는 훼손ㆍ멸실의 지름길이다.
허탈감이 앞선다. 아궁이를 없애버린 건축문화재를 많이 본 터라서...
제월당에서 광풍각(光風閣)으로 향하는 일각문(一閣門)이 있다.
"꿍! 꿍!" 머리 부딪히는 소리가 종종 들린다. 우리들은 대개 자신의 무지와 경박함을 모른 채 조상들의 체구가 작아서 문을 낮게 만들었다고 탓하며 화를 낸다. 문을 일부러 낮게 만든 의도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고개 속여 예를 갖춘다면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무례하고 거만함의 대가랄까? 지금처럼 인사 안 한다고 나무랄 필요도 없다. 지혜롭지 않은가?
문을 나서니 담장과 잠장 사이에 해묵은 배롱나무가 서 있다. 배롱 나무를 살리기 위한 배려에 순간 한없는 부끄러움이 치솟는다. 선인들은 미미한 것까지도 자연과의 조화ㆍ상생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을 우리는 더럽힐 대로 더럽히고, 파괴할 대로 파괴해 놓고, 제 숨이 차니까 자연환경보호를 외쳐대고 있으니....
배롱나무 꽃이 여름부터 피기 시작하여 피고 지고 반복하기를 일백일쯤이면 하얀 햅쌀이 나온다. 춘궁기를 겪었던 선인들은 기다림과 반가움으로 쌀밥나무라 칭하기도 했다.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니 광풍각이 있다. 문을 열어 젖히니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고, 문을 닫으니 아늑한 학문의 공간으로 주로 이용되었다.
나는 종종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백 년 전에만 태어났더라면 나도 이곳에서 기생들과 어우러져 걸판지게 놀았을텐데 후대에 태어난게 한이로다."라고.... 호기는 가상하나 무지의 소리다.
춤과 노래와 술과 기생이 등장하는곳은 루(樓), 곧 연회장이다. 예를 들자면, 경회루, 광한루, 촉석루, 부벽루 등이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 선인들은 집을 쓰임새에 따라서 백 이십여 가지로 분류했다는 설이 있다. 사실이라면 세계에서도 유래가 없으며 고도의 문화생활을 했다는 증거이리라. 예를 들자면 현판의 끝 글자에 따라 정(亭), 당(堂), 재(齋), 루(樓), 헌(軒), 정사(精舍), 대(臺), 전(殿), 각(閣) 등인데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자세히 언급하겠다.
입석은 장승ㆍ벅수처럼 나쁜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수호신적 역할과 의미를 지닌다. 광풍각은 학문의 공간이기에 잡 기운을 물리치기 위하여 그 곳에 배롱나무, 복사나무, 입석 등을 배치한 듯하다. 유교적 공간에 무속 신앙적 요소라! 우리 선인들은 신앙의 다양성과 어우러짐을 자연스러이 여겼다. 반목질시가 횡행하는 지금의 우리나라 종교 상황과는 달리 유ㆍ불ㆍ선ㆍ무속이 아름답게 상생조화를 이루지 않았던가?
소쇄원에는 중심을 가로지르는 계곡이 있으며 두 개의 작은 못이 있다. 계곡 수는 학문에 견주어 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는 것처럼 학문의 공간인 이곳도 학문이 영속되고 무궁무진하기를 기원하는 도학(道學)을 상징한다. 우리나라의 못은 거의가 방형이다. 따라서, 음ㆍ양의 조화를 위하여 원형의 작은 섬을 만들거나, 둥근 잎의 연, 순채 등을 심었다. 못이 있어 물이 있고 물고기가 있고 사람이 있다. 유유자적하는 물고기를 보고 자신을 되돌아 보는 관어도(觀魚圖)가 그려진다. 그러나 지금 이 곳은 물의 양이 현저히 줄었고 갈수기엔 말라버린다.
지척에 있는 전라남도 교육연수원이 들어서면서 소쇄원 뒤쪽에 대형 관정을 통하여 물줄기를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국민의 문화 의식 수준이요, 한심하기 그지없는 행정의 현주소이다. 관이 자연환경과 문화유산 파괴를 주도하고 있지 않는가? 물이 필요하다면 소쇄원을 흘러나오게 한 후 담수하여 사용하면 될 것을,. 이번 월드컵 때 온 국민이 하나되어 대한민국을 외치던 정신과 정열이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믿는다. 우리의 외침이 우리의 의식 수준 향상을 위한 포효라는 것을...
필자는 지금까지 1755년에 제작된 소쇄원 목판도에 근거하여 이야기 했으며, 미흡한 부분은 다음 기회에 상세히 설명할 것을 약속한다.
약 70여 년에 걸쳐 만여 평의 내ㆍ외원에 10여 채의 정자 류와 수목화초, 석물 요소, 수(水) 공간 등 종합적 학문의 공간으로 규모를 갖췄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노역에 참가한 그 시대 민중의 노고를 간과해서는 결코 안된다. 도학ㆍ도의를 중시한 정암 조광조에게서 수학한 소쇄 양산보와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사촌 김윤제, 석천 임억령, 서하 김성원, 제봉 고경명, 고암 양자징, 고봉 기대승, 송강 정철, 미암 유희춘, 풍암 김덕보 등 걸출한 인물들이 학맥을 이어오면서 호남 사림에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할 것이다. 또한, 국난을 당하여 의병 봉기를 통해 의(義)를 실천했으며 이는 동학농민항쟁, 광주학생운동,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문화유산의 근간은 의미ㆍ정신ㆍ사상이다. 겉만 보고 지나치면서 "볼 것도 없는데 뭐가 그리 유명한가?"라는 말을 자주 들어 온 나는 가슴 저림을 많이 느꼈다. 천박한 문화 의식 수준의 단적인 표현이다. 이는 자주적이지 못한 외래 위주의 잘못된 교육의 결과요, 주체적으로 우리의 문화유산을 알고자 하는 노력 부족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왜곡된 교육 정책의 피해자다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요. 이 나라의 주인이다.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사회교육 과정과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역사 문화 과목을 개설하여 올곧은 정신으로 품격 높은 삶을 영위 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그리하여 반만 년 역사에 걸맞는 문화 민족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지금 이 순간에도 문화재 조경수에 이름을 새기고,화초를 꺽으며, 벽에 낙서를 하고, 신발을 신고서 마루나 방에 올라가 음식물을 먹거나, 쓰레기를 버리며 고성방가하는 모습들이 선함을 어찌할꼬!
이동호----------------------------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나 전남대 법대를 졸업하고 동대학 사학과 대학원에서 역사문화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그만두었다. 다년간 문화와 역사에 대한 열정으로 답사를 하였으며 고문서를 탐독하였다. 무등산 원효계곡 시가문화권 사진첩 제작 및 시가문화권 안내 설명을 주도했다. 현재 우리 민족 문화와 역사를 위한 역사문화공동체의 발기인으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전국의 우리 민족 문화를 아우르는 답사를 주도하면서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