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의 '전투성'과 '계급성'을 방어하며...........

  • 글쓴이: 폄(그런데요)
  • 2004-09-12

노동운동의 '전투성'과 '계급성'을 방어하며
[노동운동 논쟁 5탄] 박승옥씨 글에 반박한다

2004-09-10 오후 3:33:41

노동운동의 전투성과 계급성을 방어하며

한국 노동운동을 비판한 박승옥 씨(이하 존칭 생략)의 글(‘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생인가’ 2004 가을호)이 인터넷 언론 에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실리면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노동귀족론’을 무기로 노동운동을 공격해 온 상황에서 박승옥의 글은 의도와 상관없이 곧 지배자들의 노동운동 공격에 이용됐다.

은 “현재의 노동운동이 이미 배가 불러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 변모했(다)”(9월 5일자 사설 ‘선배 노동운동가 충고 경청해야’)며 노동운동을 비난했다. SBS는 9월 3일 뉴스에서 “(노동운동이) 집단 이기주의란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며 박승옥의 글을 언급했다. 이처럼 박승옥의 글이 ‘악용’되는 것은 박승옥의 노동운동 비판 논리가 노무현과 지배자들의 노동운동 공격 논리와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박승옥은 이미 1992년 “나라경제를 살리는 것이 곧 근로조건을 개선시키는” 길이라며 대화와 타협의 ‘사회발전적 노동운동론’을 주장했었다.

나는 이런 논리에 맞서 노동운동을 방어하고, 이어서 노동운동의 진정한 문제점과 대안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노동운동이 ‘또 다른 가진 소수’의 운동인가?

박승옥은 한국 노동운동이 “정당성의 위기와 존폐의 위기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노동운동이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의 “또 다른 가진 소수의 운동”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기의 원인을 “노동운동 자체의 내부 요인”에서 찾으며 그는 두 가지 글을 인용한다.
“(노사가) 상견례를 핑계로 룸살롱을 같이 가(서) … 아가씨를 끼고 양주 마시면서 놀고, 사용자가 용돈을 쓰라고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면] … 받기도 한다”
“대기업 노동자 중에서는 연봉 4~5천만 원, 심지어는 6천만 원을 받는 곳도 있다.”

사용자와 유착한 부패한 노조 간부의 모습이 민주노조운동에서 전혀 없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이것은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노조운동은 정권과 자본에 유착한 ‘어용노조’에 반해서 성장해 온 운동이다. 민주노조운동 일부에서 생기는 일탈을 경계하는 것과 이런 일탈을 마치 운동의 주된 특징인 것처럼 과장해서 운동의 정당성을 공격하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

박승옥의 과장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을 언급하면서도 반복된다. 그가 “또 다른 가진 소수”, “연봉 4~5천만 원, 심지어는 6천만 원”, “고용안정과 높은 수준의 보상” 등을 인용ㆍ언급할 때 노무현과 조ㆍ중ㆍ동의 ‘노동귀족론’이 떠오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평범한 노동자들과 수십ㆍ수백 배나 차이가 나는 진정한 ‘가진 소수’들(국내 1백대 기업 임원들의 2002년 평균 연봉은 2억8천4백13만 원이고 10대 기업 임원의 평균 연봉은 13억1천5백84만 원이다)을 우선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는 점 뿐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과 근로조건을 과장한다는 데도 문제가 있다. 대표적인 ‘노동귀족’(?)인 현대자동차 노동자들도 기본급은 1백30여만 원에 불과하다. 휴일도 없이 잔업, 철야, 특근까지 하루 14시간씩 일해야 연봉 5천만 원이 가능하다.

민주노총 조합원의 월급 평균은 2백12만 원 정도인데 이것은 4인 가족 기준 표준생계비 3백60여 만 원에 한참 못 미친다. 즉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은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만’ 나은 것이다.

더구나 박승옥도 인정하듯이 이런 대기업 조직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마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투쟁의 과실”이다. 즉, 민주노조를 건설해 단결하고 투쟁해 온 노동자들이 지배자들의 양보를 받아낸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ㆍ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단결

물론, 박승옥의 지적처럼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 “대다수는 조직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의 어떠한 결실이나 혜택에서도 배제되어 있다.” 사실 기업주들은 민주노조 운동이 투쟁으로 쟁취한 결실과 혜택에서 많은 노동자들을 배제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늘려왔다.

이로부터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민주노조 건설을 통한 단결과 투쟁으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87년 이후 투쟁으로 쟁취해 온 ‘과실’을 따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민주노조로 조직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런 투쟁에 앞장서 연대해야 하고, 이 속에서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리를 넘어 전체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임금과 근로조건의 상향평준화가 가능하다. 이미, 올해 금호타이어 노동자들은 정규직ㆍ비정규직 연대 투쟁으로 온전한 주5일제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이루는 훌륭한 모범을 보여준 바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더 나은 조건을 따내는 것이 “중소영세기업 비정규 여성 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꼴”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성과는 다른 노동자들에게 확산되는 선례가 되곤 한다. 지난해 현대차 노조가 파업으로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5일제’를 따내자 는 “중소 및 영세업체에 도미노 식으로 확산될 … 악영향”을 걱정하며 “현대차 임단협 결과가 다른 기업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 서둘러야 한다.”(2003년 8월 8일치 사설)고 절규했다.

이 사회의 진정한 불평등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들 사이에,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 있지 않다. 진정한 불평등은 노동자 전체와 소수 특권 지배자들간에 있다. 이 불평등한 구조에 맞서는 투쟁에서 가장 선봉에선 노동자들을 매도해서 나머지 노동자들과 이간질시키고, 투쟁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노동귀족론’의 본질이다.

그런데 박승옥이 이 같은 본질을 놓친 채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주변부 노동자들의 참상”이 “노동운동의 정당성과 도덕성을 근거지에서부터 허물어뜨릴 것”이라며, 참상과 고통의 뿌리인 체제와 지배자들이 아닌 노동운동을 겨냥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덧붙여 박승옥이 받아들이는 바란과 스위지의 ‘독점이윤론’, 또는 ‘식민지 초과 이윤론’은 자본주의의 핵심이 강대국의 제3세계에 대한 수탈이나 독점자본의 중소자본에 대한 ‘수탈’(가치이전)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가치창출)에 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이 이론은 강대국ㆍ독점기업의 노동자가 제3세계ㆍ중소기업 노동자들에 대한 ‘식민지 초과이윤’ㆍ‘독점이윤’의 착취에서 이익을 본다는 논리를 통해 노동자들의 단결을 방해한다.

이 이론은 제3세계 많은 나라가 오히려 투자에서 배제되어 있고, 세계 투자의 70퍼센트가 선진국간에 이뤄지는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선진국ㆍ독점기업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은 더 높은 생산성과 고부가가치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며 이들 또한 착취 당하고 있다.

전투성에 대한 공격

‘주변부 노동자들의 참상’에 분노하는 박승옥이 체제와 지배자들을 비난하고, ‘주변부’ 노동자들과 연대 투쟁에 소극적인 ‘중심부’ 노조와 노동자들을 비판하며 적극적인 단결 투쟁을 호소했다면 나무랄 데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변부’ 노동자와 ‘중심부’ 노동자의 단결을 해치는 논리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나아가 엉뚱하게도 ‘중심부’ 노동자들의 전투적 투쟁을 공격하고 있다.

그가 “총파업 선언의 빈번한 반복”, “대중투쟁 일변도의 전략”,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인용ㆍ지적할 때 그의 칼 끝은 분명히 ‘전투성’을 겨냥하고 있다.

그가 ‘정권과 자본에 맞선 전투적 투쟁’이라는 민주노조운동의 소중한 전통을 거부하는 이유는 두가지다. 그런 투쟁은, 그 성과가 물가인상 등을 통해 도로 사라지는“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것이다. 또 ‘전투적 조합주의’는 “한국판 생디칼리즘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내에서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은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언제든지 후퇴한다. 이 때문에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도 이것을 “시지프스의 노동”이라 말했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는 파업에 대해 “그 경제적 결과들이 겉보기에 하찮다고 해서 그것들에 눈감아서는 안되며, 무엇보다도 그 도덕적 정치적 결과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노동조합을 통한 일상적인 투쟁과 파업을 통해서만 노동자 계급의 의식과 조직이 성장하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일상적인 실천투쟁은 … [노동자 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임금체계를 폐지한다는 최종 목표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박승옥이 제시한 “시장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 강화를 위한 제도적 참여의 대장정”은 노동자 대중을 상층지도부와 정부의 협상을 바라보는 수동적 구경꾼으로 만들 것이다.

이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노동귀족론’과 경찰력을 양손에 휘두르며 노동자 투쟁을 파괴하고, 민주노총 지도부를 구슬러 ‘노사정 대타협’에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박승옥은 민주노총 지도부가 투쟁보다 대화에 중심을 두며 이런 시도에 말려드는 것을 “이전 집행부와는 사뭇 다른 행보”라며 지지하고 있다.

박승옥이 ‘전투적 조합주의’는 “한국판 생디칼리즘”이라고 비판할 때도 그의 비판의 초점은 ‘전투성’에 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조합주의’다.

생디칼리즘(조합주의)은 정치와 정치운동을 배척하고 노동조합을 통한 경제적 투쟁만을 강조하는 사상 및 운동이다. 총파업 등을 통해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혁명적 생디칼리즘까지 포괄하는 모든 생디칼리즘의 문제점은 정치 배제에 있다.

이런 정치 배제와 기권은 노동자들의 의식을 공장 담벼락 안에 가두어 경제적 투쟁마저 마비시키며, 결국 정치에 대한 주도권을 부르주아 정치인이나 개량주의자들에게 맡겨버리게 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은 경제 투쟁에 머물지 않고 정치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은 상호 작용해, 노동자들의 의식과 힘을 강화시킨다.

‘전투성’이 경제적ㆍ조합적 투쟁에만 한정되면 결국 전투성마저 갉아먹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전투성’이 문제가 아니라 경제 투쟁에서 발휘되는 ‘전투성’이 정치 투쟁에도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들의 투쟁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아니라 독 자체를 바꾸는 투쟁으로, 즉 ‘임금인상’이 아니라 ‘임금노예제 철폐’를 요구하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하고, 이 투쟁에서 혁명적 정치와 조직은 필수 불가결하다.

생태적 위기와 마르크스주의

그러나 박승옥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에 대해 혁명적 대안이 아니라 ‘생태적 대안’을 제시한다. 그는 “사회주의는 노동운동의 대안 이념이 될 수 없음이 이미 입증되었다”고 말한다. “사회주의는 성장과 발전의 이념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쌍둥이에 지나지 않”고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개인소유를 제한한다고 해서 생태적 위기가 해결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생태적 위기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은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오해와 왜곡에 기초해 있다. 그는 “자연을 고려하지 않기는 … 마찬가지”라며 마르크스주의를 매도한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는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이다.

마르크스는 자연이 인간의 “비유기적 몸”이라고 말했다. 엥겔스는 “우리는 언제나 외국인을 지배하는 정복자처럼 자연의 외부에서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살과 피와 뇌를 가진 우리가 자연에 속하고 그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며 “정신과 물질, 자연과 인간의 대립이라는 어리석고 부자연스러운 관념”을 비판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서 환경파괴가 이윤을 위한 경쟁적 축적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즉각적인 이윤을 위해 생산과 교환에 참여하는, 개별자본가들은 가장 단기적이고 직접적인 결과들만을 우선적으로 고려”(엥겔스, )하기 때문에 이윤을 위한 환경 파괴가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수단을 사회화”하여 경쟁적 축적의 노예인 개별 자본가들의 통제권을 뺏는 것은 “생태적 위기가 해결될 수” 있는 중요한 전제이다.

노동 대중이 사회 전체의 필요와 안전을 위해 생산을 집단적ㆍ의식적으로 통제하는 사회주의도 “성장과 발전의 이념”이라는 박승옥의 주장은 옳지 않다.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은 자본주의의 특징일 뿐이다.

아마 박승옥은 구소련 등 몰락한 ‘현실 사회주의권’의 환경 파괴를 보고 “이미 입증되었다”고 말하는 듯 하다. 그러나 관료 지배자들이 미국과 군사적ㆍ경제적 경쟁 속에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환경을 파괴하며 강박적 축적을 한 구소련의 모습은 이것이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체제임을 입증할 뿐이다. (토니 클리프, , 책갈피)

따라서 “‘보다 더 적게’ 소비”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이 체제의 진정한 문제는 부와 권력을 독점한 소수 지배자들이 인간과 자연을 착취한다는 데 있다.

소수에게 집중된 부와 권력을 다수 대중의 수중에 돌려서 인간과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게 핵심이다. 그런 사회는 반드시 저소비 사회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돈이 없어 제대로 먹고 입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회가 될 것이다.

계급투쟁과 폭력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을 대안으로 보지 않기에 박승옥은 마르크스주의의 계급과 계급투쟁 사상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는 … 부정의 배타성이 곳곳에 기저에 깔려 있다”고 비판한다. “계급의식과 적대감을 지나치게 고취시키는 계급 개념은 노동운동의 능동적 전환에 하등의 도움을 주지 못”하고 “배타적 계급 운동은 … 공동체의 통합과도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사물이나 사회 내부의 모순과 대립ㆍ갈등에서 변화와 발전을 설명하는 ‘부정의 변증법’이다. 따라서 ‘계급투쟁’을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 본다.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대립하는 두 계급 사이의 적대는 필연적이다. 조지 부시와 노무현에 대한 노동자들의 적대감처럼 말이다.

물론 이것은 ‘공동체의 통합’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공동체는, 예컨대 이라크 파병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국가보안법 폐지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분열돼 있다. 이런 분열의 바탕에는 대립되는 이해관계가 있다.

마르크스는 낡은 체제를 유지하려는 지배계급에 맞서서 피지배 계급이 승리할 때 역사가 발전한다고 봤다. 이 투쟁의 승리를 위해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물론 이것은 박승옥이 생각하는 “노동운동의 능동적 전환”과 “공동체의 통합”에는 맞지 않겠지만 말이다.

노동운동의 전투성을 비판하는 것에서 나아가 박승옥은 “노동운동은 … 이제 폭력 행동도 그만두어야 한다. … 아직도 시위 때 등장하는 쇠파이프는 이제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폭력에 반대한다면 수많은 사람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넣는 이라크 파병과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는 노무현 정부의 진정한 폭력을 먼저 비난해야 했다.

이처럼 진정한 폭력을 모른 척하며, 그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한 노동자들의 방어적 폭력만을 매도하는 것은 보수언론이 즐겨 쓰는 수법이다. 예컨대 김주익, 이해남, 이용석 열사의 잇단 죽음으로 노동자들의 분노가 치솟았던 지난해 노동자대회 다음날 조ㆍ중ㆍ동의 1면 헤드라인은 “화염병”, “불바다”, “폭력시위” 등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맨손에 쇠파이프만 든 1천 명의 노동자 사수대가 2만 명의 중무장한 전경들에게 토끼몰이 식으로 구타ㆍ진압 당한 것이 노동자대회의 진상이었다.

용역깡패나 경찰력에 맞서 자신들의 투쟁을 방어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방어적 폭력은 대개 불가피하고 정당하다. 선정적으로 “쇠파이프”를 말했지만 “파업에 대해서도 신중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말에서 보이듯 그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행동 자체에 부정적이다.

대중 행동 대신 그는 “삼보일배”같은 소수 행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소수행동은 대중 행동을 통한 대중의 의식과 조직 성장을 대체할 수 없다. 소수 행동은 무엇보다 지배자들을 물러서게 할 수 없다.

전태일 정신 계승

박승옥은 이번 글에서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다 바치며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간 전태일 정신의 계승을 말했다.

전태일 열사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세대 …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짤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고 썼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동등하게 보장되며 인간이 서로 사랑하면서 인간적인 정을 느끼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떤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전태일 열사의 이같은 비타협적ㆍ혁명적 사상은 박승옥이 말하는 전투성과 계급성이 거세된 노동운동 노선과 전혀 다르다.

진정한 전태일 정신의 계승은 노동운동이 전투성과 계급성을 더욱 고양시키며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을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 노동운동은 전태일 열사가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목적지인 ‘노동해방 세상’까지 굴려야 한다.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데, 굴리는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전태일 유서)

필자

전지윤: 반전 반자본주의 노동자운동단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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