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약자일수록 짓밟는 사회 - 이철의

  • 글쓴이: 운영자
  • 2004-12-13

-- 이글은 이철의 동지가 한겨레신문 독자기고란인 "왜냐면"에 기고한 글입니다. 신문에 나올지 안나올지는 미지수입니다. --

“비정규직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닙니까?”

이 철 의

여기 해고를 20여일 앞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새마을호 안에서 승객서비스를 맡고 있는 새마을호 계약직 여승무원들이다. 이들은 3월 3일 해고통지서를 받았다. 3월 10일, 이들을 대신할 신규 채용자들을 선발했고 12월1일 철도청과 근로계약을 체결했다.

해고통보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31명, 2년 정도 새마을호를 승무했고 3년간 일한 사람도 몇 명 있다. 그러니까 1년 가까이 해고통보를 받은 채 일한 셈이다. 잔인한 일 아닌가? 갑자기 해고통지서를 보내는 것도 그렇지만, 해고 날짜를 기다리며 일하는 것도 못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철도청 고위 관리자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 같다. 지금은 건설교통부 차관으로 있는 김세호 차관은 이들을 직접 만나서 “본인의 희망없이 강제퇴직 시키지 않겠다. 비정규직 차별을 하지 않겠다. 계약이 종료되면 역무에서 일하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그것을 증빙하는 공문을 게시하기도 했다.

김세호 차관은 철도청장으로 재직하던 2003년 4월 20일 철도노조와 “새마을호 여승무원들을 정규직화 하겠다.”는 단체협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수많은 조항가운데 하나였으므로 그는 그 사실을 잊었을 것이다. 그는 건설 교통부 차관으로 영전해갔고 당사자들은 해고를 앞두고 있다.

그러면 김세호 차관과 단체협약 체결을 맺었던 노동조합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노동조합은 사측이 단체협약을 공공연하게 위반해도 모른척하고 있다. 왜? 이들이 비정규직이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못한 비조합원이기 때문이다. 여승무원들은 계약할 때 노동조합에 가입하면 즉시 계약해지될 것이라는 회유를 받았다고 한다.

철도노조 간부들은 “정규직의 밥그릇도 챙기지 못할 형편인데 비정규직을 돌아볼 여가가 어디 있단 말인가?”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철도노조는 여승무원들의 해고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거부하였다. 서명운동을 회의에 붙이자는 제안조차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거부 이유는 “2003년 4월 20일 체결한 단체협약은 여승무원 보직을 정규직화하자는 것이지, 지금 있는 계약직 여승무원들을 정규직화하자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어떻게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지 나는 도대체 이해하지 못하겠다. 해고가 예정된 여승무원들이 그때 일하고 있던 사람들이고, 위원장이 올해 4월 당사자들을 만나서 노동조합에 가입할 것을 권유한 사실도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이율배반적인 주장을 할 수 있는지 납득할 수 없다.

단체협약에 그런 내용이 없더라도 노동조합이라면 이들의 해고반대투쟁에 앞장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라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노동조합이 이런 식으로 주장하니까 철도청이 마음놓고 이들에게 해고통보서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노동조합이 이런 주장을 하니까 철도청 고위 관리자가 여승무원들 앞에서 “단체협약은 보직을 정규직화 하자는 것이지 여러분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라는 것이 아니라.”고 똑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노동조합의 어느 간부는 “계약직 여승무원들은 모두 관리자들의 자녀들이거나 친척들이다. 그냥 내버려둬도 제 살길을 찾는다.”며 노동조합이 이들을 외면하는 것을 합리화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모두 관리자들의 딸이라면 그렇게 일치단결하여 싸울 수 있겠는가? 관리자들의 딸이라고 하여도 이들은 계약직 노동자들임에 틀림없다. 사상,신념,종교등을 따지지 않고 노동자라면 모두 함께 하는 조직이 노동조합인데 이런 반노동자적인 주장을 간부된 사람이 할 수 있다니 기가 찰 뿐이다.

철도노조는 조합원이 2만명이 넘는다. 힘이 있고 나서기만 하면 이들의 해고를 막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노동조합이 왜 이런 해괴망칙한 주장을 해야 하는가?

과거 철도노조 홈페이지에 이런 글이 올라온 일이 있다. “우리는 힘들게 시험을 쳐서 정규직이 되었고 저들은 시험도 치지 않은 계약직 노동자들이다. 어떻게 같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의식에 편승하여 계약직 노동자들의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간부가 있다면 그 사람은 노동조합 간부의 자격이 없다.

해고를 40여일 앞둔 11월 20일이 되어서야 반대투쟁이 벌어졌다. 반대투쟁이라고 해보아야 “일방적 계약해지 철회하라.”는 리본을 달고 다니는 정도이다. 그리고 수도권 전철이나 새마을호등에 내용을 알리는 스티커를 붙이는 정도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철도청은 이들을 역무계약직으로 채용하겠다고 한다. 열차승무에 숙련된 이들을 1년짜리 계약직 역무원으로 배치하여 새로 일을 배우라는 것이다.

여승무원들이 “계약직으로 일해도 열차승무를 하고 싶다.”고 호소하자 철도청은 이들을 한사람씩 불러 회유하고 있다. 수시로 전화하여 회유하는가 하면 개별면담하며 “빨리 계약서를 쓰지 않으면 역무원으로 채용하지도 않겠다.”며 생존권을 무기로 협박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여전히 묵묵부답, 이제까지 해온 주장을 뒤집는 게 체면을 상하는지 교섭요구를 묵살하고 있다.

노사를 불문하고 힘없는 계약직 노동자들을 외면하는 풍토를 보며 힘없는 사람일수록 짓밟는 사회를 실감한다. 인간의 이기심에 편승하는 정규직 노동운동의 불길한 미래를 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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