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오롱 고공농성 세 남자가 나눈 수다를 엿듣다
오도엽 기자 odol@jinbo.net
지난 5월25일 코오롱노조정리해고자 3명이 청와대 옆 타워크레인에 올랐다. 그리고 열흘, 이들은 물대포를 쏘며 달려든 경찰특공대에 의해 끌려 내려왔다. 송진만 부위원장은 구속이 되고, 두 명은 영장실질심사에서 석방되었다. 과천천막농성장에서 6월16일 만났다. 기사에서 다루지 못한 이야기를 옮긴다.
늘 넉넉한 웃음을 짓던 송진만 부위원장이 굳은 얼굴로 부른다.
“됐나?”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퍼뜩 든다.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동료가 해야 된다. 이웅렬 회장 집에 담판을 하러 들어간 위원장은 손목을 끊고 구속이 되었다. 한 달 넘게 고압송전탑에서 농성 중이던 동료들이 단식에 들어가면서 막혔던 교섭의 자리가 열린 게 지난 4월이다.
올 것이 왔다
한 달간 십여 차례 진행된 교섭은 회사의 명분쌓기와 시간끌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김진년 화섬연맹 대경본부장이 다시 고압송전탑에 올라갔지만, 테러범 진압 당하듯 끌려나왔다. 이미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은 400일이 지났다.
참세상자료사진
질긴 놈이 이긴다지만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온갖 생각이 짧은 순간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지만 내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한가지 뿐.
“됐다.”
송진만 부위원장의 얼굴이 환하게 펴진다. “몸 단디 챙기고 기다리이소.”
“됐나?”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나 아닌 다른 정리해고자라도 “됐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무엇을 준비하는지도 몰랐다. 막연히 코오롱 과천 본사를 점거하지 않을까하는 추측만 들었을 뿐이다. 대답을 하고 삼사일이 흘렀다. 구속을 마음속에 담았다.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고 애들의 목소리가 나를 밤마다 울린다.
초조해진다. 시간이 이리 더디게 간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을 할지 모르지만 겁이 나기도 했다. 빨리 무슨 일이든 시작했으면 좋겠다.
초조했던 시간
‘사백일, 너무나 힘들었다. 동료의 얼굴을 보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 내 차례다. 내 차례로 이 싸움이 끝났으면 좋겠다.’
길기만 했던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내일 새벽에 같이 갈 곳이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푹 놓인다. 이제 시작이구나.
차에서 내린 곳은 청와대 주변이다. 본사 건물로 지레짐작했던 터라 의외였다. 5월 26일 새벽 1시 40분 거리에는 차도 끊기고, 어둡기만 하다. 각 자 배낭을 하나씩 짊어지고 송 부위원장을 따라 가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떻게 담을 넘었고, 타워크레인에 올랐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뿐. 꼭 성공해야한다는 생각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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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싸움은 다해보지 않았는가? 더 이상 할 것이 없을 정도로 싸우지 않았는가? 절박하다. 이 길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선택할 것은 이 길 뿐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스스로의 선택이고, 내가 아니면 내 동료가 기꺼이 선택할 길이다.’
타워크레인 조정실에 들어왔다. 땅에서 몇 미터를 올라왔는지 모른다. 조정실에서 다시 배낭을 등에 지려고 하니 몸이 뒤로 휘청 넘어간다. 내가 지고 온 배낭의 무게를 그제서야 느낀다.
우리가 짊어진 무게
“우리가 뛰어넘은 담이 몇 미턴지 아나?”
“….”
“6미터야.”
이 무거운 배낭을 단번에 6미터 담 너머로 던졌다니. 그 담을 이리 쉽게 넘었다니. 도저히 상상할 수없는 초인의 힘을 쓴 거다.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서로에게 놀라 웃는다.
한 평도 되지 않은 타워크레인 조정실에서 세 남자가 날이 새기를 기다린다. 날이 새고 펼침막을 걸기 전에 걸리면 안 된다.
‘끝이 없는 싸움을 했다. 이 싸움으로 회사가 대화의 자리에 제발 나왔으면 좋겠다.’
조정실에서 서로 얼굴을 보며 웃었다. 이미 비어버린 마음,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서로 웃을 수 있는 이야기만 했다. 마음 깊은 곳에 너무도 무거운 돌이 담겨져 있는 것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니.
‘조정실에서 그렇게 세 시간. 조정실 유리문 밖으로 벌건 해가 떠오른다. 소름이 온몸에 돋는다. 알 수없는 전율이 내 몸을 감싼다. 떠오르는 해를 보는 순간 희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승리한 싸움이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해가 떠온다, 희망이 솟아온다
조정실에서 나와 타워크레인 꼭대기에 섰다. 현수막을 걸고 구호를 외친다. 타워크레인 아래 건설현장 경비 아저씨가 그제야 우리를 발견하고 놀라는 모습이 보인다. 공사장 담 너머에는 기자가 온 모양이다. 무엇인가를 물어본다. 너무 멀어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정든 일터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기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저 멀리서 빨간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뛰어온다. 동료들이 분명하다. 꽹과리를 든다. 쇠를 친다. 깨깽깨갱 깨개깽 깨깽깨깽 깨개갱.
경찰들이 오고, 기자들이 타워크레인 밑에서 끌려나간다. 멀리 동료들이 경찰들에게 포위된 게 보인다. 꽹과리를 더욱 힘차게 친다.
동료들이 경찰들에게 해산을 당했다.
‘하지만 고립되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어. 동료들을 믿었어. 크레인 밑에 있든 없든 동료들은 땅에서 더 힘들게 싸울 거라는 것을 믿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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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째 되는 날 집회를 여는 것 같다. 기륭전자 조끼도 보이고, 화섬연맹 조끼도 보이고, 한국합섬 조끼도 보인다. 땅 아래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른다. 노동가요만이 들린다.
뙤약볕에 지치고, 언제 경찰에 끌려갈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다가 듣는 노동가요. 갑자기 힘이 솟구친다. 지겹도록 들었던, 사백일 동안 지겹게 들었던 노래가 땅 위에서 들으니 새롭게 내 귀를 울린다.
타워에서 들은 노동가요
‘노동가가 무슨 힘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지. 그게 아니야. 우리의 노동가는 지친 몸에 힘을 주고, 두려움에 용기를 주고, 절망에 희망을 주는 거야.’
오늘은 비가 온다. 가지고 올라간 천막으로는 비를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좋았다. 지금은 눈물을 흘려도 모르잖아. 마구 울어도 모르잖아. 빗물은 눈물을 감춰주고, 빗소리는 울음을 감춰준다. 울자, 맘껏 울자.
‘조정실에 세 남자가 모여 비를 피했지. 서로의 무릎을 맞대고 앉아 세 남자의 수다가 시작되었어. 배고팠던 어린 시절 이야기도 하고, 첫사랑 이야기도 했어. 지도부에 대한 불만도 이야기 했고, 이렇게 싸운다고 해결되느냐고 따지기도 했어. 아내 이야기도 했고, 우리의 미래도 이야기 했어.’
그리고 알았다. 우리는 남이 아니라는 걸. 너의 아픔과 나의 아픔이 다르지 않고, 너의 희망과 나의 희망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비에 젖은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며 사랑도 피어났다. 어느 사랑 못지않게 아름다운 동지의 사랑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