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니 샌더스 열풍, 미국 정치의 위기인가!, 미국의 위기인가!
배성인(한신대) 노동자교육센터 운영위원
“이 선거운동은 또한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를 이기기 위한 것 … 이 나라에서 인종차별과 성차별 등 모든 종류의 차별의 세기들을 겪은 입장에서 우리는 편견과 차별을 자신의 선거운동의 중심으로 삼는 주요 정당 후보는 필요 없다”
지난 1년 동안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킨 변방의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는 공화당의 대선 후보 지명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의 당선을 막기 위해 모든 역할을 다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6월 14일(현지 시간) 워싱턴DC 프라이머리가 마무리되면서 135일간 펼쳐진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과의 경선레이스에서 샌더스는 패배했다. 하지만 그는 7월의 전당대회 때까지 계속 싸울 것임을 천명했다. 그것은 그가 내세웠던 민주당을 혁신해서 미국사회를 바꾸지 않으면 트럼프 정부의 등장으로 미국은 다시 한번 세계 역사의 죄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샌더스는 그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갖고 있는 걸까? 그가 미국 사회에 던진 정치경제 정의의 화두는 울림이 클까? 혹시 샌더스 열풍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닐까?
하지만 그의 열풍은 실체가 분명하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민주당 유권자들은 좌클릭한 가운데 오바마 행정부의 우경화에 대해 적잖은 실망을 하였다. 일부 정책을 제외하고는 공화당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의 확대와 심화는 시민들에게 새로운 사유체계를 요구하였다. 문제 해결을 위한 2011년의 ‘월가 시위’에 대해 기성 정치인들이 어떠한 화답도 못하자 시민들의 불만은 지속적으로 누적되었던 것이다.
샌더스가 시민들에게 유급 모성휴가가 없는 미국, 일원화된 공적 건강보험이 없는 미국, 영아 사망률과 불평등 정도가 가장 높은 미국을 비판하자 수많은 미국인들이 ‘격하게’ 공감하였다. 특히 냉전이나 이념의 문제에 대해 큰 선입견이나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은 청년실업, 학자금대출, 주거 및 생활안정 등 2008년 이후의 암울한 경제 현실에서 자신들이 얻은 경험을 근거로 열광적인 지지와 호응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샌더스는 기본기에 충실했다. 최근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선거운동 전략이 디지털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그는 촌스러운(?) 아날로그 방식을 선택했다. 직접 만나 악수와 대화를 하고 후보 자신이 정책을 홍보하는 기본에 충실한 선거운동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다.밑바닥을 훑는 전통적인 선거운동은 적극적인 당원들을 심쿵하게 만든다. 이번 4.13총선에서 대구의 김부겸을 보면 기본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쉽게 알 수 있다.
샌더스와 트럼프는 동전의 양면
그러나 샌더스 열풍 못지 않은 트럼프의 열풍이 없었다면 샌더스의 열풍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개혁세력들이 기성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미국식 사회주의 개혁을 주장하고 나선 샌더스에게서 희망을 찾았다면, 미국의 보수 유권자들은 기본의 보수 정치에 실망하고 더 극단적 우경화로 치닫는 트럼프에게서 희망을 찾은 셈이다.
트럼프가 좌충우돌하면서 막말을 쏟아내는 행동에 대해 많은 우려는 당연하지만, 상당수는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먼저 이슬람교도들의 입국을 금지하겠다는 발언이다. 2001년 9.11사태를 경험한 미국의 많은 백인들은 이슬람교도에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 동안 말을 아껴왔다. 그런데 트럼프가 이들을 대변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에 거주하는 330만 명의 무슬림보다는 이슬람 세력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유색인종을 포함한 수 천만명을 자기편으로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치겠다는 발언은 남미의 빈곤한 히스패닉이 미국에 들어와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을 막아주겠다는 것이다. 미국에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는 1100만 명을 고려하면 노동자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트럼프의 열풍은 샌더스와는 반대로 공화당의 주요지지 기반인 백인 중심의 보수적 유권자의 경제적 몰락과 그들의 정치사회적인 좌절, 미국 사회의 양극화와 전반적인 우경화 등등이 거론된다. 그 동안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자신들을 대변해 주지 못했다고 느꼈던 정치적 소외자들이 트럼프라는 아웃사이더의 등장에 뜨겁게 반응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샌더스와 트럼프의 열풍이 미국 정치 시스템이나 미국의 경제와 사회시스템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미국의 방향에 대해서도 시사하고 있다. 트럼프에 대한 유권자들의 선택은 미국 사회가 ‘더 나쁜 사회’로 갈 수 있음을, 샌더스에 대한 선택은 ‘더 나은 사회’로 갈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힐러리가 샌더스의 요구를 어느 정도, 얼마 만큼 수용할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샌더스는 22개 주의 민주당 경선에서 클린턴을 이겼다. 1000만 명 이상이 그에게 표를 던졌다. 이 과정에서 힐러리는 무역 자유화, 최저임금, 건강보험 등 중요 공약을 거듭 수정해 원래보다 상당히 왼쪽으로 움직였다.
무엇보다 샌더스 열풍은 미국 정치를 풀뿌리로부터 흔들고 있고, 99%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자발적인 시민들이 주도하는 시민정치 또는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샌더스는 740만건의 개인 소액기부에 의지하면서도 월가 금융기관들과 대기업들로부터 돈을 받은 힐러리보다 정치자금을 많이 모았다. 돈과 조직력을 가진 민주-공화 양당구도는 깨지지 않는다던 미국 정치에서 시민들이 주도하는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물론 제3당의 등장 가능성으로 이어질 지는 의문이다. 그것은 미국의 진보정치가 미국 좌파의 근본적 딜레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현재 파편화된 좌파들로서는 99%의 정치적 표현으로서 샌더스 열풍을 조직적 성과로 가져갈 만한 주체적 역량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전망
5.1 메이데이는 1886년 시카고 헤이마켓 사건에서 유래한다. 3.8 세계여성의 날은 1908년 뉴욕 여성노동자들의 시위에서 출발했다. 이와 같은 노동계급의 투쟁 열기와 함께 1901년 ‘미국 사회당(SPA)’이 창당됐다. 하지만 미국의 사회주의는 진보정당의 분열과 탄압 속에 스스로 파산한 역사적 경험이 있다.
미국에서의 노동자 정치와 사회주의가 재구성될 수 있는 힘은 바로 주체형성전략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은 맥카시즘의 향기가 아직까지 진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 세력의 정치세력화를 요원하게 만든다. 무소속인 샌더스가 사회당 후보로 대선에 나오지 않고 민주당 경선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젊은층을 중심으로 생각이 변화하는 것이 관찰된다. 이는 지난 30여 년 동안 맹위를 떨쳐온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길게는 ‘미국의 위기’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가 아닐까. 그럼에도 우리는 미국 사회의 시민적 양식이 결국 승리할 것이라고 믿어봐야 하나!
*(편집자 주) 교육지 길에 올라오는 글은 노동자교육센터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