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애절양과 1862년 농민항쟁

  • 글쓴이: 박준성
  • 2003-01-09

정약용의 애절양과 1862년 농민항쟁

다산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 땅에서 유배살이를 하던 1803년 일이다. 어느날 갈밭 마을에서 일어난 눈물겨운 사정을 이렇게 전해 들었다.

"갈밭 마을에 착실하게 일하여 소를 한 마리 마련하고 처 자식과 오순도순 살아갈 꿈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던 젊은 농부가 있었읍니다. 그런데 관에서 그 농부의 죽은 아버지와 갓난아이를 군적(軍籍)에 올려놓고는 군포(軍布)를 내지 않는다고 소를 끌고 가버렸어요. 복창이 터질 노릇이었겠지요. 평생 애써도 내 소 한 마리 가져보기가 쉬운 일인가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지 못하여 그 사람은 식칼로 자기 생식기를 잘라버렸고, 젊은 부인은 관청을 향해 울부짖다 쓰러졌지요."

삼정 가운데 군정(軍政)의 문란인, 죽은 부모에게 군역을 물리던 백골징포(白骨徵布)와 어린 아이에게까지 물리던 황구첨정(黃口僉丁)의 폐단이 얼마나 심했던가를 보여주는 처절한 예이다.

원래 조선시대 법에는 16살부터 60살까지 평민 남자에게만 군역을 부과하여 역을 담당하거나 군포를 내도록 하고, 한 집에 두 사람을 한꺼번에 군역을 부과하지 말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경우는 죽은 아버지, 본인, 어린 자식에게까지 군포를 물도록 하였던 것이다.

정약용은 눈시울을 붉히며 이라는 시로 그 정경을 표현하였다.

갈밭마을 젊은 여인 울음도 서러워라
현문향해 울부짖다 하늘보고 호소하네
군인 남편 못 돌아옴은 있을 법도 한 일이나
예부터 남절양은 들어 보지 못했노라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 아닌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3대의 이름이 군적에 실리다니
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려도
범 같은 문지기 버티어 있고
이정이 호통하여 단벌 소만 끌려갔네
남편 문득 칼을 갈아 방안으로 뛰어들자
붉은 피 자리에 낭자하구나
스스로 한탄하네 '아이낳은 죄로구나'
잠실궁형이 또한 지나친 형벌이고
민 땅 자식 거세함도 가엾은 일이거든
자식 낳고 사는 건 하늘이 정한 이치
하늘 땅 어울려서 아들 되고 딸 되는 것
말·돼지 거세함도 가엾다 이르는데
하물며 뒤를 잇는 사람에 있어서랴
부자들은 한 평생 풍악이나 즐기면서
한 톨 쌀, 한치 베도 바치는 일 없으니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도 불공평한고
객창에서 거듭 거듭 시구편을 읽노라

농업이 주된 산업이였던 조선사회에서 땅과 농사꾼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농사꾼이 더 중요하였다. 땅이 아무리 많아도 농사꾼이 일을 하지 않으면 땅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좋은 논밭도 2∼3년 묵히면 잡초만이 무성한 묵정밭이 되어 버린다.

조선시대 농사짓는데 소는 농사꾼들의 힘을 덜어주는 아주 중요한 농사수단이었다. 농사꾼 없이 소가 저혼자 농사지을 수야 없지만, 큰 소는 하루에 논·밭 가는일, 써레질 하는 일, 곡식·풀·나무 옮기는 일 따위를 장정 네댓명보다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소를 몰고가 일을 하면 소 품값을 사람 품값의 네다섯배는 받았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소를 가지고 있는 집은 정작 열집에 한집 꼴이 될까 말까 했다. 그만큼 소가 귀했다. 값도 비쌀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소를 불법으로 매긴 군포대신 끌고 갔으니 그 젊은 농부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강진에서 위와같은 일이 일어났던 때보다 조금 앞 시기인 1786년(정조 10)에 큰 소 한 마리 값이 대략 40∼50냥이었다. 이것은 1793년(정조 17) 경상도 신령지역을 예로 들면 쌀 8∼10가마, 콩 10∼13가마, 조 13∼17가마에 해당하는 값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쌀 한가마에 5냥, 콩 한가마에 4냥, 조 한가마에 3냥이었다. 큰 소 한마리는 사람 4∼6명 몸값에 해당되기도 하였다. 이 때 사람 값이 얼마나 나갔던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자매문기(自賣文記)이다.

자매문기는 여러 사정에 따라 자신 또는 처와 자식들을 돈을 받고 노비로 팔아 넘기면서 만든 인신매매 계약문서이다. 여기에는 문서를 만든 연월일, 산사람 이름, 파는 이유, 판 값, 파는 사람, 증인과 문서 작성자 이름들이 쓰여 있다.

이러한 매매 문기 가운데 1776년(영조 52)에 한 사람이 45살된 비(婢)와 5·7살된 비, 16살된 노(奴) 네명을 60냥에 판 자매문기가 있다. 또 1786년(정조 10)에는 한 사람이 47살된 처와 3·8·12·20살된 아들 네명, 16살된 딸 모두 6명을 50냥을 받고 파는 경우도 있다. 사람 4∼6명 값이 소 한 마리 값에 지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조선후기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상놈'들 가운데서도 돈을 버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농사를 지어 팔아 돈을 벌려는 '상업적 농업'으로 성공하거나, 장사를 해서 돈을 번 사람들이다. 이들은 땅을 사서 지주가 되거나, 양반을 사서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처지가 나아지는 사람들이 생기는 반면 생활이 더 어려워지는 사람들도 많았다. 농사지은 나락에서 반 이상을 비싼 소작료로 빼앗겨야 했고 비싼 세금까지 물어야했기 때문이다. 빚은 늘어만 갔다. 지주들에게 얻어 부치던 땅마져 내년에는 그만 부치라고 야단이었다. 지주로서는 한꺼번에 많은 농사를 짖는 사람에게 땅을 빌려주는 것이 유리하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흉년이라도 들면 살아갈 길이 막막하였다. 빚독촉도 심했다. 참다 못하여 굶어죽기보다는 돈 많은 부잣집에 가서 목숨이라도 부지하는게 낫겠다 싶어 피눈물을 흘리며 처자식을 팔아 넘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때로는 자신까지 팔기도 하였다. 이렇게 처자식과 자신을 팔고서는 문서를 만들어서 증거로 삼았다.

참고 참던 농민들은 소를 끌어간다고 자신의 생식기를 자르고, 살아가기 힘들어 마누라와 자식새끼들을 돈 많은 부잣집에 팔아 넘기는 비참한 생활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 없었다.

'고분 고분 말잘듣는다고 지주들이 소작료를 덜받는 것도, 더 지으라고 땅을 떼어주는 것도 아니야. 그런다고 탐학한 수령과 이서배들이 세금을 줄여주기나 할줄 알아?'
'내가 농사지은 나락 내가 좀 더 가져가면 어때'
'내지 않아도 될 세금을 왜 굳이 내야만 하지?'
'버러지 처럼 참고 죽어지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야, 수틀리면 도망이라도 쳐야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진데 세상이라도 확 뒤집혀버렸으면...'

농민들은 꿈틀거리며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도망치는 노비들이 늘어났다. 소작료 바칠 나락을 팔아 돈으로 챙기고, 세금을 물지않고 새벽에 살던 마을을 몰래 빠져나가는 농민들이 많아졌다. '이 몹쓸 세상을 어떻게하면 바꿀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19세기 농민들은 이제 몹쓸 세상 바꾸고 새세상을 만들려는 항쟁의 불길을 지펴들었다. 농민항쟁의 불길이 곳곳에서 솟아 올랐다.

1862년 2월 경상도 단성과 진주에서 시작한 농민 봉기는 5월까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곳곳에서 들불 번지듯 타올랐다. 봉건 정부와 국왕은 중앙 관리를 파견하여 회유와 탄압으로 이를 무마하는 한편 민란의 양상과 원인을 조사하였다. 중앙 정부에서 파악한 항쟁의 직접 원인은 전정, 군정, 환곡이라는 수취제도인 삼정문란이었다. 정부에서는 삼정문란을 해결하려는 특별기구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수습방안을 마련하여 시행하기로 하였다.

6월 들어 철종은 전국의 정치인 지식인들에게 수습책을 물었다. 수백명이 해결 방안을 마련하여 상소를 올렸다. 그들의 처지나 지위, 관심과 관점에 따라 온갖 의견이 나왔다.

1862년 농민항쟁의 직접 원인인 삼정문란에 대한 인식과 대응은 크게 개선안, 개혁안, 혁신안으로 나뉘어 진다. 개선안은 삼정문란의 원인을 수취 질서가 흐트러지고 운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제도자체에는 결함이 없기 때문에 제도는 그대로 유지하되 운영을 개선하자는 지배층 중심의 보수적 방안이었다.

개혁안은 온건 개혁안과 강경 개혁안으로 나뉘어 진다. 온건 개혁안은 운영을 개선할 수 있는 것은 그대로 유지하고 법과 제도를 고쳐야 할 것은 고치자는 부분 개선 개혁안이었다. 강경 개혁안은 삼정의 세금 걷는 제도가 문제이므로 제도 자체를 모두 바꾸자는 안이었다.

혁신안은 농민항쟁을 삼정문란이나 농민침탈에 대한 저항만이 아니라 지배층이나 지주층에 대한 농민들의 계급대립으로 파악하고, 삼정 제도는 물론이고 당시 경제 제도의 중심축이었던 지주제까지 개혁해야 한다는 혁신적인 방안이었다. 사회 구조의 모순이 문제라는 인식이 깔려 있으며 농민층의 이해를 적극 반영하는 안이었다. 하지만 왕에게 올리는 상소였기 때문에 사회구조를 전면 변혁해야 한다고 드러내기는 힘들었다. 구조의 문제로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구조자체를 변혁해야 한다는 인식까지 이르지 못한 측면도 있다.

봉건정부와 철종이 택한 방안은 무엇이었을까? 대지주들과 보수적 중앙관료들은 내심으로는 개선안으로 수습하길 바랬다. 그러나 개선안으로는 농민들의 폭발되는 항쟁을 잠재울 수 없었다. 봉건정부는 온건 부분 개혁안을 채택하였다. 전정과 군정은 부분 개선하고 환곡은 혁파하는 대신 토지에 세금을 더 매기겠다는 '파환귀결'안이었다. 이렇게 삼정의 문제를 고치려는 삼정이정책을 삼정이정청이라는 특별기구에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삼정이정책과 삼정이정청은 농민들이 투쟁으로 얻어낸 일정한 성과물이었다. 지배층으로서는 체제를 유지하려는 양보와 개량의 무마책이었다. 삼정 가운데 가장 문제가 컸던 것이 환곡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환곡을 혁파한다는 발표들 듣고 기대를 가졌다. 불붙듯이 번지던 항쟁은 멈칫하였다.

농민들이 잠잠해지자 보수 기득권 세력이 개혁의 덜미를 잡기 시작하였다. 중앙 관료와 철종도 삼정이정책을 적극 실현하려는 의지가 부족했다. 보수 세력을 휘어잡으며 개혁을 밀고 나갈 힘도 약했다. 삼정이정책의 실시가 계속 뒤로 밀려났다. 7월에 들어서는 '이하전 역모사건'을 터뜨려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하였다.

10월 말 개혁안이 폐기되었다. "너무 서둘러서 완벽하지 못할 염려가 있어 옛 제도로 돌아가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개선안으로 후퇴한 것이다. 농민들은 기대했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자 곳곳에서 다시 봉기하였다. 그러나 한풀 꺾였다 타오르는 불길은 기세가 봄과 같지 않았다.

1862년 농민항쟁의 역사는 온건 부분 개혁조차도 투쟁없이는 얻어내지도 지켜내지도 못한다는 보여준다. 그 뒤의 우리 근현대사는 투쟁을 무마하려는 당근에 현혹되지 말고 개혁을 디딤돌 삼아 변혁의 길로 갔어야 했다고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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