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적 노동운동과 사회적 헤게모니

  • 글쓴이: 폄(그런데요)
  • 2004-09-08

#미래연대에서 펴왔습니다.

계급적 노동운동과 사회적 헤게모니

최근 민주노총의 대기업 노동조합들은 커다란 시련을 맞이하고 있다. 그 시련의 핵심부에는 ‘사회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전투에서 직면한 난관’이 놓여 있다. 이는 파업투쟁을 비롯한 여러 노동자투쟁에서 대기업노조들이 거듭 수세적인 태도를 취하고, 파업을 중도에 멈추게 되는 근본토대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중핵이어야 할 대기업노조가 조합주의의 늪에 빠져 오직 자신의 이해관계에 집착한 결과, 응당 부메랑처럼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 ‘보복’이다.

이 보복이 두렵다면, 대기업노조와 민주노총은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한 부분으로서 자신을 재정립하고, 두 눈 똑바로 뜨고 노동해방을 향해 전진해야만 한다. 다른 탈출구, 다른 운명은 있을 수 없다. 둘 중 하나다. “압도적 다수 노동자계급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어 눈치 보면서 그럭저럭 자그마한 안정성을 누리는 데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전체 노동자계급과 결합해 노동해방을 향해 전진하는 단호한 계급적 중핵으로 도약할 것인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

문제의 심각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 구체적 상황들을 점검해보자.

사례 하나. 87년 직후 몇 년간, 고향을 방문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자신의 파업에 대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친척, 친구들은 열악한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파업을 한다는 말에 대략 심정적인 동의를 보냈다. 우려라고 하면, 단지 너무 과격하게 싸우는 것이 아니냐 혹은 괜히 앞장서다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니냐 정도였지 파업투쟁과 노동조합 활동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의 상황은 상당히 달라졌다. 친척과 친구들은 ‘그 정도 임금이면 됐지, 너무한 것이 아니냐’, ‘우리는 너보다 훨씬 더 열악하게 살고 있다’는 등의 반대견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그렇지 않아도 경제가 가뜩이나 어렵고 우리의 생계가 불안정한데, 너무 대기업 노동자들만의 이익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 ‘너희들의 파업으로 경제가 흔들리고, 우리는 불안하다’고 불만을 늘어놓기도 한다.

이것은 파업에 돌입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심리를 수세적으로 만들고, 스스로 ‘과연 우리의 파업은 정당한가’라는 의문을, 최소한 ‘우리 요구를 가지고 너무 쎄게 파업을 해서는 불리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만든다. 이것들은 자연스럽게 파업투쟁의 기초인 ‘심리적 단호함’을 뿌리부터 흔든다.

사례 둘. 궤도 등 공공사업장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마찬가지의 상황이 전개된다. 단, 그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므로 몇 가지 특수한 상황이 덧붙여진다. 승객들은 강한 항의를 한다. 물론 이 항의는 87년 이후 늘 존재했던 것이다. 출퇴근전쟁에 시달리는 승객들은 불편함 때문에 강하게 항의하곤 했다. 하지만 당시의 항의는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이 아무리 불가피해도, 승객들을 볼모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항의는 ‘불편함’보다는 ‘고임금 대기업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불만’으로서의 성격이 훨씬 강하다. ‘연봉 4,000만원씩 받는 노동자들이 대한민국에 몇 명이나 된다고 파업이냐’는 식의 항의에서부터 시작해, ‘우리는 늘상 실업의 위험성 앞에 조마조마하게 살고, 쥐꼬리만 월급으로 생활하는데 연봉 4,000만원 받는 노동자들의 파업은 너무 한 것이 아니냐’에 이르기까지, 항의는 파업의 정당성에 대한 직접적인 반대를 내포한다. 가장 전형적인 항의는 ‘나라경제가 흔들거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데 파업은 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항의는 2004년 지하철파업 기간 동안에 대단히 빈번하게 나타났다. 파업불참자들, 대체근로자들은 파업참가자가 아니었음에도 여기저기서 성난 승객들의 항의와 마주쳐야 했다. 이것은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인가? 파업불참자들은 마음 속 한 편에 있던 ‘죄스러움’보다는 ‘그래, 파업에 불참하는 것이 맞았어’라는 후진적 생각을 키운다. 파업파괴를 위해 투입된 군인들, 퇴직자들 등은 자기의 역할에 대해 더욱 합리화하게 된다. 파업참여냐 불참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동요하던 조합원들도 이런 상황 앞에서는 불참 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증폭된다.

다음으로 반드시 놓쳐서는 안 될 지점은 노동자계급의 연대 또한 심각하게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87년을 전후로 하는 당시만 하더라도, 직접적인 연대가 있건 없건 투쟁하는 노동자들 속에는 자기 투쟁이 전체 노동대중을 대변하는 투쟁이라는 정당성이 분명했다. 또한 대개의 경우, 자기 사업장과는 상당히 다른 요구를 가지고 진행되는 투쟁일지라도 노동자들은 여타 사업장의 투쟁이 자기 자신의 투쟁이기도 하다는 생생한 연대감을 갖고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은 심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대공장 노동자들은 자기의 투쟁이 전체 노동자들을 대표한다는 확신에 기반해 강고하게 투쟁했다.

가령 90년대 초반까지 대공장노조의 대명사였던 현대중공업의 파업투쟁은 전체 노동자들의 촉각을 집중시켰고, 모든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현중투쟁의 결과에 따라 전체 노동자투쟁의 진퇴가 좌우된다는 생생한 연대감을 가졌다. 바로 이것이 전노협운동으로 표상되는 전투적이고 계급적인 투쟁을 가능케 했던 정신적 기초였다. ‘노동운동의 핵심부로서 대공장노조’라는 규정이 대공장 노동자들 자신에게나, 중소기업 노동자들 자신에게나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금은 미조직 상태의 노동대중만이 아니라 조직된 사업장(가령 민주노총)의 노동대중까지도 투쟁하는 대기업 노동조합에 대한 연대감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중소노조들 속에서도 ‘대공장노조가 민주노총의 중핵이다’라는 규정은 웃음거리가 된 지 오래다. 대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이것은 더욱 극단적으로 모습(대기업 정규직노조에 대한 거부감과 불신)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민주노총 지도부가 계급적인 연대투쟁을 충분히 조직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상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연대 또한 대단히 약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현대자동차의 투쟁, 그리고 올해 궤도투쟁에서 특징적인 양상 중 하나는 타 사업장 노동자들의 연대가 대단히 부족했다는 사실이다. 궤도투쟁의 경우에도, 궤도노동자들 사이의 연대는 어느 정도 이뤄졌지만 여타 산업, 업종과의 연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은 민주노총 조합원들까지도 타 대사업장 투쟁에 대한 연대감, 즉 저 투쟁은 곧 나의 투쟁이라는 생각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투쟁하는 대사업장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의 투쟁이 전체 노동자들과 연결된 투쟁이라는 자부심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투쟁하는 주체 자신이 심리적으로 ‘이 투쟁은 우리들 만에 국한된 투쟁’이라고 느끼고 있으며, 따라서 연대를 추동해야 할 정당성에 대해서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상황에서는 대기업파업이 단호하게 성장하고, 계급적 투쟁으로 도약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공권력과 여론의 압박이 강해지면, 파업의 심리적 기초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계급적 연대 없이는 총자본의 공세에 맞설 수 없는 상황에서, 투쟁의 주체 자신이 계급적 연대에 대해 위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하나하나의 투쟁이 전체 민주노조 조합원들 다수에 의해 지지받고, 투쟁의 당사자들이 자기 투쟁이 전체 노동자계급을 대변한다는 확신에 기반했던 과거 상황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지금 대공장노조 투쟁은 더 이상 전체 노동자의 흔들리지 않는 단호한 구심으로 존경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만의 요구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지 않느냐’는 따가운 시선 속에 포위되어 있다. 바로 이런 심리적(정신적, 도적적) 기초 위에 대기업노조 투쟁이 놓여 있다.

사회심리적 조건과 노동자투쟁

모든 인간의 책임감과 의무감, 그리고 이로부터 비롯되는 헌신성의 정도는 무엇이 결정할까? 여러 대답이 있을 수 있고, 사람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대답은 ‘그가 대변하는 사람들의 숫자’일 것이다. 객관적인 분석을 위해 개인별 편차는 없는 것으로 치고, 문제를 간명히 설정해보자.

어떤 개인이 자신만 관련된 문제에서 느끼는 부담감과 책임감은 자기 가족 전체와 관련된 문제에서 느끼는 그것에 비해 훨씬 작을 것이 분명하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사람의 책임감과 헌신성은 미혼노동자들이 갖는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가령 자기 개인의 문제에서는 대단히 소심한 사람도 아내나 자식들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대단한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 아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가족들을 부양하고 책임지기 위해서는 어떤 굴욕까지 감수하면서 견디어낼 수 있다.

분석을 좀 더 확대해보자. 만일 그가 자기 가족을 뛰어넘어 사회 전체에 대한 숭고한 책임성을 갖고 있다면 어떨까? 그는 엄청난 헌신성, 나아가서 놀랄 만큼의 영웅주의를 보여줄 수 있다.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초개처럼 내버릴 수 있다. 소위 초인적 힘을 발휘하는 위인들은 바로 이 부류에 해당된다. 그들은 보통 사람은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헌신과 용기, 투혼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자신이 대변하고 책임져야 할 대상이 세계 전체, 즉 인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가 노동자투쟁의 힘과 역동성을 설명하는 데서도 대단히 유용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물론 모든 비교는 단지 제한적으로만 타당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지금 분석하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해서는 퍽 유용하다. 노동자투쟁의 힘은 이 투쟁이 대변하는 범위에 의해 근본적으로 좌우된다. 여기서 말하는 범위는 단순히 이 투쟁에 직접 참여하는 주체의 숫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투쟁이 대변하려 하고, 실제로 객관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숫자라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에서 사용된다.

만약 어떤 투쟁이 그 투쟁에 직접 참여하는 좁은 범위의 노동자들만을 대표한다면, 그 투쟁의 역동성은 아주 제한적이다. 반면 만약 그 투쟁이 대표하는 것이 전체 노동자들이라면 이 투쟁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의 의무감과 책임감, 자부심은 엄청나게 높아진다. 그들은 마치 위인이 된 것처럼 숭고한 의무감에 입각해 투쟁한다. 가령 조합원들을 책임진다는 자세로 몸을 불사른 열사들의 행동은 그가 가진 ‘집단적 책임감’ 말고는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과거 80년대 말의 전노협투쟁과 지금의 투쟁이 갖고 있는 차이를 해명할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당시의 전노협투쟁은 비록 수십, 수백 명 밖에 되지 않는 중소사업장에서 전개되더라도, 투쟁의 주체들이 전노협에 소속된 수십만 노동자들, 나아가서 전체 노동자들을 대표해 투쟁한다는 생생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이 투쟁에 끈질김과 단호함, 추진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당시의 대공장에 이르면, 선진노동자들은 이 대공장투쟁에 전체 노동운동의 진퇴가 달려있다는 숭고한 의무감에 불탔다. 이것은 대공장 선진노동자들의 실천에 단호함과 확고부동함, 투철함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투쟁의 요구와 정신이 단사 내로 찌그러들자 헌신성과 책임감이 약화되고, 당연히 투쟁의 추동력은 하락했다. 특히 대공장노동자들이 자기 투쟁을 전체 노동자들, 최소한 민주노조 조합원들 전체를 대변하는 투쟁으로 전진시켜야 한다는 생생한 의무감을 잃어버리자 투쟁에 대한 책임감과 단호함은 형편없는 수준으로 하락해버렸다.

이처럼 노동자투쟁은 ‘사회심리적 기초’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는 인간 일반이 사회적이고 의식적인 동물이라는 근본 특징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만일 이 사회성과 의식성을 빼버린다면 인간은 동물과 구분되기 힘들 것이다. 만일 이 사회심리적 기초가 노동자투쟁의 정당성을 강화한다면, 노동자투쟁의 힘과 역동성은 고양된다. 가령 어떤 노동자투쟁이 대변하는 사회적 범위가 전체 노동대중으로 확장되어 있다면, 나아가서 그것이 전세계 노동자계급으로까지 확장되어 있다면 이 투쟁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헌신성은 대단히 높아진다. 그들은 어떤 위인들과도 능히 견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에너지를 발휘한다.

가령 1917년 러시아 노동자혁명 당시 노동자대중이 발휘한 영웅주의가 그것이다. 당시에 수십만, 수백만 러시아 노동대중은 세계 노동자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들은 아주 평범한 노동대중이었지만, 자신의 실천을 통해 세계 노동자계급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숭고한 책임감으로 불탔다.

그래서 그들은 혁명을 파괴하기 위해 도발해오는 자본가반동들과 제국주의 군대로부터 노동자정부를 지키고 혁명을 전파하기 위해 총알이 비오듯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도 목숨을 돌보지 않고 앞으로 진군했다. 총탄이 사방에서 날라오고 따라서 진격이 곧 죽음임을 직감하는 상황에서도, 바로 옆에서 동료들이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마치 목숨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오직 적의 진지를 점령하기 위해 앞으로 내달렸다. 일상의 시기에는 아주 사소한 어려움 앞에서도 좌절하고 도망치며 외면하기 바빴던 대중이 혁명의 몇 달 동안 목숨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들의 영웅주의가 없었다면 혁명은 단 하루도 지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이름도 없이, 아무런 대가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기꺼이 자신을 내던졌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도 비교될 수 있는 위대한 삶이었다. 비록 종교적 신비주의로 가려지고 변형 왜곡되어 버렸지만, 민중에 의해 성인으로 추앙받았던 예수의 삶에는 깊이 있게 고찰해야 할 그 무언가가 있다. 예수는 평범한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이 평범한 인물이 고문과 온갖 회유를 뚫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이 박혀 조금씩 피를 흘리면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와중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그가 당시의 예루살렘 민중에 대한 책임감과 혈연적인 연대성으로 똘똘 뭉쳐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혈연적 연대성은 그가 죽은 뒤에도 민중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었다. 당시의 민중들은 ‘예수의 부활’이라는 신념으로 이 연대성을 표출했고, 수많은 순교자가 예수의 뒤를 이었다.

민중의 한복판에서 솟아난 이 위대한 행위가 세월이 흐르면서 전설로, 신화로 둔갑하고, 다시 지배자들에 의해 순화되고 변질되며 그들의 입맛대로 재편되면서 제도권 종교로 가공되었지만 당시의 진실은 바로 이상의 것이었다. 이 예수의 삶을 집단적 차원에서 구현한 위인들이 바로 1917년 러시아 노동대중이었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혁명가였던 그람시는 이들의 정신을 공유하면서 실천하고 있는 이탈리아 선진노동자들을 ‘오늘날의 예수’라고 불렀다. 그는 하루에 8시간 이상 공장에서 일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노동해방운동을 학습하고 조직하며 실천하는 데 나머지 8시간을 바치면서 노동대중 속에서 매일 살아가고 있는 이탈리아 선진노동자들은 예수보다 더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극찬했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고통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하루가 아니라 수십년 동안 계속될 고통이기 때문이다. 이런 고통을 견뎌내면서 세계와 인류의 숭고한 해방을 위해 실천하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위인이 아닐 수 있겠는가?

이것을 뒷받침했던 토대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회심리적 조건이었다. 당시의 이탈리아 선진노동자들은 자신이 수행하는 노동해방운동을 수백만이 죽어가고 있는 제국주의 전쟁으로부터 전체 인류를 구원하고, 수십억 노동자계급이 직면하고 있는 실업과 가난, 불평등과 착취의 사슬을 단호하게 끊어내며, 러시아를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맹렬하게 전개되고 있는 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에 한 주체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바로 이 세계 노동자계급과의 혈연적 연대성과 책임감이 당시의 수만명의 이탈리아 선진노동자들을 예수를 능가하는 위대한 인물로 밀어올렸던 것이다.

한국 노동자투쟁이 직면하고 있는 역동성과 단호함의 약화 또한 이 사회심리적 조건과 연결지어 다뤄야 진지한 분석일 수 있다. 지금 한국 노동자투쟁은 과거 80년대 말에 비해 이 투쟁이 심리적으로 대변하는 ‘사회적 범위’가 대단히 협소하다는 근본한계에 봉착해 있다. 많은 조합원들은, 특히 대기업노조 조합원들은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사회 전체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들은 자기 투쟁에 호응하고 지지하는 광범위한 대중으로부터 숭고한 책임감과 의무감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단이기주의’ 정도로, 심지어는 ‘경제를 파탄시켜 광범위한 노동자들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드는 이기적 행동’ 정도로 간주하면서 적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중과 도처에서 마주치고 있다.

이런 사회심리적 기초 위에서 노동자투쟁은 비틀거릴 수밖에 없다. 이제 투쟁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어야 하는 심리적 조건에서 거대한 파열구가 생겨버린다. 이것은 위인과도 같은 위대한 선진노동자들을 아주 평범한 사람으로 둔갑시켜버리며, 대단히 영웅적이고 투철했던 조합원들을 소심한 존재로 퇴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노동자투쟁의 힘을 약화시키고, 동시에 이 약화된 노동자투쟁은 노동조합들을 계속 찌그러뜨림으로써 노동자들의 심리를 더욱 위축시켜 단사내로 더욱 가둬버리는 악순환의 고리가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단호한 출발을 개시해야 한다. 그러나 이 출발은 투쟁의 사회심리적 조건이 지금 한국에서 작동하는 냉엄한 토대를 정확히 응시해야만 제대로 시작될 수 있다.

사회심리적 고지를 둘러싼 전투의 최근 성격

‘사회심리적 고지’를 누가 장악할 것인가를 둘러싼 전투가 시작된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이 전투가 아주 본격화된 것은 생각보다는 오래되지 않았다. 길게는 약 10년, 짧게는 5년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심리적 고지’라고 부르든, ‘사회적 헤게모니(주도권)’라고 부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이 개념화에 해당되는 내용에 대해 민주노조운동은 최근 어떤 식으로든 대응해야만 하는 상황과 마주치고 있다. 민주노총이든, 연맹이든, 대기업노조든, 심지어 중소기업노조까지도 이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그중 가장 먼저 이런 문제에 대해 고심하는 사람들은 민주노총과 연맹, 대기업노조 간부들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부분들이 사회적 전투의 지형에 가장 먼저 마주치는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은 투쟁의 가시적 요구, 기자회견 등에서 발견된다. 물론 대부분 그들의 대응은 개량주의적인 것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단히 무기력하고 하등 쓸모없는 것이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사회적 합의주의와 같은 노사협조주의적 결론으로 귀착된다. 그러나 분석해야 할 문제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이 점을 일단 제외하고 논의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이런 사회적 대응을 강제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한국 자본가계급이 감행하는 전투의 성격이 ‘사회적 차원의 거시적 전투’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자본가계급은 언론과 온갖 이데올로기 기구를 통해 이렇게 전투를 걸어오고 있다. “경제 상황은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다. 실업은 늘어나고, 당장 실업자가 되지 않더라도 실업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계속 증폭되고 있다. 젊은 층의 일자리는 찾기 힘들다. 게다가 이 일자리조차 대부분 비정규직 형태로 존재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상시적인 고용불안과 마주치고 있다. 그런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전체 노동자들의 과반수를 훌쩍 넘어서고 있다.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도산과 해외이전 등으로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 모든 것은 경제가 살아나야 해결될 수 있다.”

여기까지는 노동운동 또한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객관적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자본가계급은 말한다. “경제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자본투자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투자는 기업이윤이 활성화될 때만 본격화될 수 있다. 그러면 경기가 살아날 것이고, 새로운 일자리와 더 나은 임금이 보장될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세계체제로 전화한 이래, 이제 투자는 단지 국내자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해외자본이 국내로 유치되어 대규모 투자가 이뤄질 때만 광범위한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임금이 보장될 수 있다. 그런데 노동조합의 투쟁이 이 모든 가능성을 제약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 투쟁은 전체 노동자들의 삶을 위협하는 셈이다. 그들은 단지 소수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침범하고 있다. 당신들의 실업과 생활의 불안정성, 저임금은 바로 저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노동조합들 때문이다.”

이런 간단한 주장은 모든 교육기관과 언론기구들을 통해 사회적으로 유포된다. 또한 모든 회사들은 바로 이 논리를 자기에 맞게끔 가공해서 노동자들에게 회사교육, 유인물, 관리자들의 조회, 해외연수 등등 갖가지 수단을 총동원해 유포한다. 세련된 방식으로는 ‘중립을 가장한 토론회’가 사용된다.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이 참가하는 토론회에서 부르주아 정당들과 정부관리들은 줄기차게,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이 논리를 제창하면서 노동운동을 ‘세상 물정 모르고 사회를 책임질 능력이 없는 사람들의 이기주의적 운동’으로 매도한다. 문제는 이런 주장들이 아주 평범한 노동대중에게까지 체계적으로 그리고 반복해서 유포된다는 점이다.

민주노총과 연맹, 대기업노조는 이런 자본가계급의 총공세 앞에서 ‘사회적 주도권’(사회심리적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가령 이번 궤도파업에서 노동조합들은 ‘노동시간 단축하고 인력을 충원해 신규 일자리를 창출하자. 그래서 청년실업을 해결하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병원파업의 경우에도, ‘인력을 충원해 환자들에 대한 의료서비스를 늘리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런 구호는 ‘사회공헌기금’처럼 노사협조주의 냄새가 풀풀나는 형편없는 처방전을 들이밀었던 자동차 완성차 5사 노조에 비해 질적으로 한층 진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자체로 보면 거기에는 흠잡을 만한 것이 없다. 과학적 측면에서 볼 때도 그런 요구는 하등 틀린 것이 아니다. 조직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인력충원은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접근법을 일단 배제하면) 당연히 일자리창출과 노동의 질의 상승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사회적 주도권을 둘러싼 전투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서 문제는 전체 노동대중, 심지어는 가난한 민중까지 포괄한 사회의 압도적 다수 대중에 대한 설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루는 범위 자체가 다른 셈이다. 여기서 문제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사회적 차원에서 크게 제기되어야 한다. ‘전체 노동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차원의 해법’이 제시되어야 하며,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고립을 면하기 힘들다. 바로 이 지점이 한국노동운동의 아킬레스건이다.

하나의 예를 들자. 여기 20명의 난파자 집단이 있다고 치자. 어떤 한 사람이 그중 3명이 구출될 수 있는 처방전을 내놓는다고 치면 어떻게 될까? 이 처방전에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합의될 수 있는 것은 20명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해결책이지 단지 3명 정도에 국한된 해결책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확률은 떨어질지라도 여기서 채택될 수 있는 해결책은 20명 모두가 살 수 있거나 최소한 다수가 살아남을 전망이 있는 해결책이다. 이와 똑같은 이치가 여기에도 적용된다. 한국에는 약 천 사백만의 노동자계급이 있다. 청년실업자만 해도 대략 200만 명에 육박한다. 그런데 만일 지하철파업이 그중 2~3천 명 정도가 혜택을 볼 수 있는 인력충원 요구를 내건다면, 그것이 ‘사회적 해결책’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천사백만 노동대중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을까? 그 요구는 분명 정당하지만, 그럼에도 사회 전체를 설득할 수 있는 그런 요구는 아직 될 수 없다.

예컨대 청년실업자만 가지고 문제를 검토해 보자. 2~3천 명(좀 더 범위를 넓혀서 지하철공사 시험을 준비하는 약 만 명의 젊은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백구십구만 명의 청년실업자들은 지하철파업의 ‘인력충원을 통한 청년실업 해결’ 구호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들은 “지하철을 비롯한 대기업 조 파업으로 경제가 위축되면, 가뜩이나 부족한 우리 일자리는 더욱 좁아질 것이 분명하다. 비록 지하철파업이 승리해 2,000명 정도의 일자리가 늘어날지라도, 만약 경제가 위축된다면 나머지 청년실업자들의 미래는 더욱 암울해지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사회적 전투’가 전개되는 냉정한 객관적 무대다. 여기서는 단사, 심지어는 업종별, 산업별 차원의 분산된 대응은 소기의 성과를 절대 거둘 수 없다. 사단병력을 꾸려 대규모 전투를 감행하는 적들에 대항해 소대별로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게릴라부대는 서로간의 연락체계도 없고, 통일적인 지휘도 받지 못하는 지리멸멸한 부대일 때 전투의 결과는 자명하다.

자본가계급의 논리는 물론 정말이지 형편없고 가증스런 착취자의 논리다. 그러나 문제는 그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자본가계급은 나름대로 ‘사회 전체 차원의 해결책’을 보여주려 애쓴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들은 이 사회적 차원의 해결책을 일국적 범위를 뛰어넘어 세계적 범위에서까지 제기하고 있다. 그들은 대중매체를 통해 광범한 노동대중에게 한국자본주의가 연결되어 있는 세계자본주의의 총체적인 그림을 보여준다.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세계 속에서, 그리고 첨예화되고 있는 세계경쟁 속에서 한국자본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광범한 대중에게 적용될 수 있는 사회적 해결책을 그들은 보여준다. 그것은 해외자본의 투자를 적극 유치하는 것이고, 세계경쟁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술과 임금경쟁력을 갖추는 것이다.

맞다. 그것 이외의 해결책은 없다. 단, ‘자본주의적 해결책’, 즉 ‘착취자들의 해결책’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말이다. 이런 집요하고도 체계적인 설득 속에서 이제 아주 평범한 노동대중일지라도, 그들은 세계적 차원에서 자신의 생존문제를 포착하게 된다. 그들은 세계자본주의 속에서 어떻게 한국자본주의가 놓여 있고, 바로 이 한국자본주의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삶이 놓여 있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것은 단지 정부의 주장이나 TV 토론회, 다큐멘터리 등에서만 나오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아주 평범한 자본가일지라도, 그가 매일 매일 노동자들에게 말하고 주입하며 교육하고 있는 이야기다. 이렇게 사회적 주도권을 둘러싼 전투의 지형이 이미 세계화된 거대한 체제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게다가 이것이 객관적인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주 협소한 영역에 국한되어 반격을 도모한다면 이것은 사회, 즉 광범위한 노동자민중을 설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집중해서 검토해야 할 지점은 분명하다. 자본가계급은 지금 전투의 중심을 거시적인 전투(사회적이고도 세계적 차원의 전투)로 이동시키고 있다. 여기서 대응력을 구비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지엽적인 전투에만 머무른다면 노동운동은 고립을 면할 수가 없다. 미조직된 90%의 광범위한 노동대중은 노동운동에 곱지 않은 태도를 취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사회적 주도권을 잃어버린 노동자들의 투쟁은 허약해질 수밖에 없다.

개량주의적 대응의 파멸적 결과

이런 예를 들어보자. 지금 전체 노동자들의 약 80%가 속해 있는 중소기업에서 노동자들은 커다란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우선 임금수준이 계속 하락하고 있다. 대기업 노동자들에 비해서도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은 상대적으로 계속 하락하고 있다. 또한 내수부진과 공장 해외이전에 따른 폐업과 도산, 그리고 인력감축의 상시적인 위험과 마주치고 있다. 이 문제 앞에 적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그들은 거의 매일 같이 신문과 방송, 회사교육 등을 통해 집요하게 선전 선동하고 있다. “지금 그나마 남아 있고 앞으로도 생존가능성이 있는 중소기업들은 주요 대기업에 하청으로 일거리를 받고 있는 기업들에 불과하다. 그런데 대기업은 낮은 하청단가를 통해 중소기업의 지불능력을 하락시키고 있다. 이 구조 속에서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저임금은 불가피하다. 인력감축을 통한 인건비 절약도 마찬가지의 요인과 결부되어 있다. 하지만 대기업 노동자들은 계속되는 투쟁으로 자기 임금을 올리고 있다. 이것은 다시 낮은 하청단가로 우리의 목을 죄어오고 있다. 그렇다고 대기업자본의 이윤을 낮춰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대규모 투자를 계속해서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때만 대기업이 살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 하청 중소기업들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기업 노동자들의 고임금을 낮춰야만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생존도 보장될 수 있다.”

이런 포위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갖가지 처방전을 고안한다. 이 처방전은 다양한 경로로 만들어진다. 어떤 이는 ‘단사주의적 분열을 타개하고 노동운동이 사회적 차원의 대응력을 구비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처방전을 고안한다. 가령 자동차 사회공헌기금 제안의 중매자인 금속연맹 조건준씨는 ≪피플타임즈≫에서 ‘내가 바보일 수도 있지만, 고급 수를 두는 현자일 수도 있다’는 취지로 항변한다. 이것은 그의 뇌리 속에서는 사회공헌기금 제안이 사회적 고립을 타개하면서 노동운동을 사회적 차원으로 한층 끌어올리는 비장의 카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조합주의적 실리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 고립되는 것을 최대한 저지하려는 영악한 관점에서 처방전을 고안한다. 현대자동차 이상욱 집행부나 기아자동차 박홍귀 집행부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어떤 이는 노동자당의 사회적 주도권 쟁취라는 보다 큰 관점에서 처방전을 고안한다.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의도가 무엇이든 이 모든 개량주의적 처방전의 객관적 역할은 분명하다. 그것은 ‘사회적 차원의 대응’이라는 이름으로 자본가계급의 주문에 선선히 응하고, 노사협조주의적인 길을 도모하는 것이다. 위에서 예를 든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연관지어 문제를 검토해보자.

첫 번째 예.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 민주노동당의 입장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은 재벌, 즉 대기업자본에게 중소하청업체에 대한 수탈을 줄이라는 것이다. 하청부품단가 인상요구(그리고 그 연장선에 있는 재벌독과점 규제요구)가 대표적인 항목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중소기업 노동자들에 대한 중소자본의 지불능력이 향상되어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삶이 개선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발 더 나아가 그들은 이런 정책은 ‘중소기업 영세자본가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이런 식으로 중소기업의 기업환경이 개선되면 부품의 질도 향상될 것이므로 대기업 또한 이익을 볼 것이라는 충고까지 덧붙인다.

민주노동당의 이런 논리를 과거에 민주노총 위원장이었고 지금은 국회의원인 단병호씨는 TV 토론회에서 단골메뉴로 제기하고 있다. 그래서 토론회에 참가한 중소기업 사장으로부터 ‘중소기업인들의 처지를 이해해주어서 참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중소기업 노동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물론 일시적으로는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환상으로 노동자들의 배가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논리는 중소기업 자본가와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상생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부품단가가 인상되면 중소기업 자본가들은 중소기업 노동자들에게 어느 정도 지불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 환상 그 자체다.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소자본이 대자본에 종속되는 것은 완전히 불가피하다는 사실이다. 만일 이 종속성을 깨려고 한다면, 약육강식의 자본가들의 경쟁체’인 자본주의 자체를 깨서‘노동자들의 연대성에 기반한 공동체적인 계획경제체’로 대체해야만 한다. 다른 하나는 대기업들의 경쟁력을 지탱하는 주요한 원천 중 하나가 바로 이 종속성이라는 사실이다. 하청부품단가를 최대한 낮추는 것으로부터 대기업들의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이 자라나온다. 만일 이 하청단가를 ‘정치적 개입’에 의해 강제적으로 높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대기업의 경쟁력은 약화될 것이고, 바로 그만큼 이 대기업과 연결되어 있는 중소기업들의 생존이 불투명해진다. 그것은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대량실업을 야기할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불가능하기까지는 않더라도 대단히 실현가능성이 낮기는 하지만) 만일 부품단가가 인상될지라도, 중소기업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삶을 보장할 중소기업 자본가들은 없다는 사실이다. 중소기업 자본가들 또한 이윤확대가 목적인데, 이 이윤확대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요구와 정면으로 대립한다.

사실 중소기업 자본가들은 자본가계급 중에서 노동운동에 가장 적대적인 세력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중소기업 자본가들의 이윤의 상당 부분은 사회의 평균임금보다 더 낮은 임금으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데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기업 자본에 대한 종속성, 그리고 중소기업 자본들이 늘 직면하고 있는 과잉경쟁, 마지막으로 중소기업 자본의 (기술적, 경영적) 후진성 때문에 발생하는 손실들을 그들은 중소기업 노동자들에게 추가로 전가함으로써만 비로소 평균이윤을 확보할 수 있다. 당연히, 중소기업 자본가들의 서열의 사다리를 내려가면 갈수록, 즉 영세하면 할수록 이들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도는 높아진다. 평균 이상의 극악무도한 착취 없이는 그들은 결코 ‘자본가의 본분’(평균적 이윤창출과 경쟁에서의 생존)을 다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중소기업 자본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상생을 말하면서, 대기업자본에 대항한 ‘공동전선’을 제창하는 민주노동당 단병호씨의 논리는 정신나간 짓이다. 중소기업자본과 대기업자본 모두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공동투쟁을 통해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상황에서 중소기업 노동자들에게 중소기업 자본가들과 협조하고 공동의 전선을 꾸리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노동자 당은 노동자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의도가 선하더라도, 이것은 결국 재앙만을 가져올 뿐이다. 어떠한 종류의 자본가든, 자본가와 노동자가 한 배를 타고 있고 서로 상생할 수 있다는 주장은 노동자계급을 파멸시키는 가장 극악한 처방전이다. 만일 그것이 독약이 아니라면, 기껏해야 독 바른 사과일 뿐이다.

두 번째 예. 금속연맹과 자동차 완성차 5사 집행부의 이른바 사회공헌기금 제안. 이 제안에는 자본과 정부가 걸어오는 사회심리적 전투에 대한 노조관료들의 대응의 핵심이 잘 묻어나고 있다. 이들은 금속연맹과 자동차산업 대공장노조들을 압박해오는 정부와 자본의 사회심리적 전투에 상당한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있다. 이것이 노동조합과 투쟁의 토대를 뿌리부터 위협하고 있음을 감지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영리한 셈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감지’의 결과는 노사협조주의라는 삼천포로 그들을 이끌고 있다. 그들의 개량주의적이고 조합주의적인 관점이 문제의 핵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사회적 압박을 모면하기 위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만과 비판으로부터 비껴나기 위해서 무언가 탈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일부 자동차노조 지도부에게는 그런 평가도 과할 것이다. 그들이 현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노사협조주의로 일관한 모습이고, 따라서 그들의 ‘사회공헌기금 제안’은 대공장노조로서의 일말의 책임감을 반영하기보다는 대두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투쟁을 봉쇄하고자 하는 대자본의 열망과 요구를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 일단 여기서는 그런 말종 집단의 경우는 배제하기로 하자. 여기서는 백번 양보해서 ‘최상의 선한 의도’를 그들이 갖고 있다는 전제 하에 문제를 점검해보자.

최선의 경우를 가정하더라도, 사회공헌기금은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 노동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 만일 이 원칙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노동운동 자체가 붕괴되는 바로 그 원칙은 ‘노동자의 권리는 오직 노동자 스스로의 투쟁과 의식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이 맞은 편에는 ‘스스로 투쟁하지 않고 적들의 시혜와 하사품에 의존하는 굴종적 관점’이 놓여 있다. 노동운동의 오랜 역사는 노동자의 권리를 장기적으로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노동자의 투쟁력과 단결력에 있다는 점, 역으로 이 투쟁력과 단결력을 약화시키면서 자본과의 협조로 기울어지는 모든 조류, 경향은 노동자의 권리를 헌납하는 가장 해로운 자들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 단순한 진리는 민주노조의 경험을 갖고 있는 모든 건강한 조합원들이라면 마지막 한 명까지도 승인하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다. 불행하게도 금속연맹과 자동차 5사 집행부에게는 이 가장 기초적인 노동자의식, 직관도 마모되고 없다.

사회공헌기금 제안은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대공장 노동자와 중소하청공장 노동자의 대자본가에 맞선 공통투쟁과 단결이라는 기본원칙을 폐기하고, 그 자리에 ‘대기업자본과 대기업 정규직노조 사이의 협조’를 아로새겨 놓았다. 대자본의 이윤증대를 위해 상호협조하고, 그렇게 형성된 이윤을 우선 주주들과 대기업노조들이 분배하고, 또 ‘산업발전’ 명목으로 투자(물론 이 투자금은 주주들의 재산으로 적립된다)하자는 것이다. 그 뒤 남은 이윤의 쪼가리로 이른바 사회공헌기금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 사회공헌기금은 ‘지역발전과 하청중소기업 육성,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개선’ 용도로 제기된다. 지역발전과 하청중소기업 육성은 대부분 지역 자본가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 그나마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중소하청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 협조주의의 달콤한 밀월관계가 잉태한 사생아인 사회공헌기금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라고 요청받고 있는가? 한마디로 몇 푼 챙기라는 것이다.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자주적인 투쟁,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전투적 단결을 위해 전진하는 대신, ‘협조주의의 블루스’를 지켜보고 있다가 몇 푼 던져지면 ‘고맙다’고 냉큼 받아먹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전투에서,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중핵이라는 금속연맹 자동차 대공장노조들이 채택해야 하는 대안이란 말인가? 이것으로 과연 대공장노조들은 천삼백만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사회적으로 결집시킬 수 있고,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을 가장 극명히 보여주는 예는 이번 현대자동차노조의 임금합의안이다. 현자노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까지 포함해서 교섭하고 합의해버렸는데, 그것을 통해 비정규직노동조합의 자주적 투쟁의 기회를 사실상 봉쇄했다. 게다가 정규직 임금인상분의 80% 수준에서 비정규직 임금인상분을 합의함으로써, 정규직 비정규직의 임금 차이를 오히려 키워버렸다. 결국 비정규직 임금인상 합의라고 하는 것은 ‘정규직 노조원들의 과도한 임금인상’이라는 정권과 자본의 악선동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용한 들러리에 불과했다는 따가운 비판을 그들은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 상태에서 ‘사회공헌기금’은 단 1% 정도라도 ‘계급적 연대기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대기업 정규직노조와 대기업자본 사이의 노사협조주의적 밀월관계(여기서 그들은 이윤증대를 위해 상호협조하고 그 이윤을 서로 나누어 먹는다)에 대한 따가운 비난을 비껴가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을 들러리로 내세우는 가장 기만적인 쇼에 불과하다. 이것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의 방관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점차 스스로 일어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주적 전진을 봉쇄한다는 점에서 더욱 비판받아야 한다. ‘사회공헌기금’은 투쟁력과 단결력의 강화라는 노동자 권리쟁취를 향한 단 하나의 길을 봉쇄하고, 자본과의 협조라는 엉뚱한 절벽으로 노동자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아무리 ‘사회적 책임감’이라는 포장을 두르고 있더라도 가장 철저한 배신이다. 만일 그것이 조금이라도 ‘사회공헌기금’이라면,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자본가들에게 공헌한다는 점에서만 그럴 것이다.

사회심리적 전투의 객관적 기초 - 계급투쟁

사회심리적 전투에서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분명해져야 하는 요소는 사회의 계급적 성격이다.

사회란 몰계급적인 것이 아니다.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그리고 이 사이에 있는 중간계급으로 명백히 분열되어 있다. 사회심리적 전투 혹은 사회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전투는 바로 이 회피할 수 없는 계급적 분열상태에서 전개된다. 여기가 전투가 전개되는 객관적 무대다. 그리고 이 객관적 무대를 거부하는 모든 이들은 결국 무대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 것이다.

자본가계급은 한줌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사회가 각각의 계급이 놓여 있는 객관적 토대를 따라 선명하게 분열되어 버린다면, 자본가계급은 절대 사회적 주도권을 확보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 그들은 매장될 수밖에 없다. 그들의 계급적 이익은 사회의 압도적 다수자인 노동자민중을 수탈하고 착취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 때문에 그들의 사회적 주도권은 항상 일정한 불안정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검토해야 할 지점은 이 한줌 자본가들이 그럼에도 어떻게 사회적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느냐에 있다. 답은 간단하다. 다른 계급의 지지를 끌어내거나 최소한 무기력한 중립 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다른 계급이 너무 약해서 계급적으로 전혀 정립해있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그들 지배의 ‘근본조건’이다.

중간계급은 사회적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지 않다. 노동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본가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이기에, 그리고 그들의 경제적 기반 자체가 지속적으로 몰락하는 소규모 생산과 유통(가령 마찌꼬바나 동네 가게)에 놓여 있기에 그들은 사회적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사회를 앞으로 전진시킬 수 있는 대안과 힘이 몰락하는 낡은 계급인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생산에 기반을 둔 과거 계급(중간계급)이 현대적 대공업에 기반한 현재 계급(자본가계급)을 능가할 수는 없다.

노동자계급은 사회적 주도권을 완전하게 장악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춘 유일한 계급이다. 우선 노동자계급은 사회의 압도적 다수다.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은 대략 전체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대규모 사회적 생산의 진전과 함께 계속 많아지고 더욱 대규모로 결집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은 성장하는 미래의 계급이기에 사회적 주도권을 둘러싸고 자본가계급을 능히 능가할 수 있다. 만일 사회를 구성하는 각 계급이 성숙해서 각자의 계급적 관점을 갖고 경쟁하고 대립한다면 사회적 주도권은 응당 노동자계급의 수중에 귀속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제는 노동자가 자신을 계급적으로 통일시키고 노동자계급의 의식으로 무장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역으로 말해서 이것은 노동자가 자본가계급에 대해 확고한 적대적 태도를 취하고, 중간계급으로부터 독립적이고도 독자적인 계급적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뜻한다. 사회심리적 전투에서 노동자계급에게는 이것 말고는 다른 무기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계급투쟁 노선에 철두철미한 것, 이것 말고 노동자계급이 사회적 주도권을 쟁취할 다른 길은 없다.

이것 이외의 길, 가령 계급타협노선은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주도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사회적 주도권을 향한다. 노사협조주의 노선은 자본주의와 기업의 성장과 안정성에 기반을 두는 노선인데 이것은 100%의 확실성으로 자본가계급의 주도권을 보장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전제는 자본의 이윤축적, 자본주의의 원활한 작동인데, 이 전제 하에서는 자본가계급의 논리가 상황을 주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노사가 함께 이윤을 나누고, 심지어는 일부를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분배한다 하더라도, 전제는 ‘이윤을 늘리는 것’인데 이 전제에 입각하면 자본가의 모든 논리와 주장을 노동자는 승인해야만 한다.

여기서 사회적 주도권은 확실히 자본가계급에게 속해 있다.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을 위해서라도, 이윤증식을 위해 생산에 협조하고 죽어라고 일하며 파업을 자제하라는 논리 앞에 노동운동은 확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노사정 사회적 합의주의나 사회공헌기금, 중소하청 납품단가인상과 같은 개량주의자들의 사회적 대응책이 모두 노동운동의 사회적 주도력을 해체하고 자본가계급의 주도권을 보장해주는 결과로 귀착되는 본질적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주도권은 그와 정반대의 길, 즉 단호한 계급투쟁의 길을 통해서만 활짝 열릴 수 있다. 사회적 주도권을 둘러싼 전투에서 노동자계급이 승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자기 계급의 힘을 키우는 것이다. 이것 말고 다른 어디에도 사회심리적 전투에서 노동자가 전진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계급투쟁의 길과 대기업 선진투사의 관점

노동자가 자신을 위력적인 계급으로 정립하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간단하다. 우선 노동자는 단사와 업종, 고용형태, 성별을 막론하고 자신을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시키는 요구로 단단히 무장해야 한다. 또한 노동자는 모든 자본가와 정부에 맞서 하나로 단결해 투쟁해야 한다. 어떤 사업장 노동자의 투쟁이든, 이 투쟁을 전체 노동자들이 합심해서 방어하고 사수하며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 특히 먼저 민주노조로 조직된 사업장의 노동자들, 그중 가장 힘이 강력한 대공장노조 노동자들의 역할이 막중하다. 이들은 자신에게만 국한된 요구에 머물지 않고, 전체 노동자들의 요구를 대변하고 이들을 하나의 투쟁으로 결집하는 데 더 집중하는 ‘계급적 중핵’으로 반드시 기능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주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 국한되어 있거나, 최소한 이 대기업 정규직노조의 투쟁만이 위협적일 정도로 운동이 단사별로 조각나 있다면, 자본가계급과 정부는 이들의 요구에만 양보를 한다. 또한 한국에서처럼 조직률이 낮은 국가에서 자본가계급과 정부는 오직 조직된 부분의 요구에만 약간 양보한다. 대기업 노동조합이 계급적 구심이 되지 않게 하고, 광범위한 미조직 노동대중과 관련해서는 침묵과 무시로 일관할 것을 약간의 양보를 미끼로 노동운동에 주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가 하나의 위력적인 계급으로 조직되어 사회를 좌우하는 길을 봉쇄하려 한다. 바로 이것이 자본가계급이 사회적 주도권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원천 중 하나다.

이 문제를 분석함으로써, 이제 우리는 자본가계급의 사회적 주도권 쟁취를 가능케 하는 두 번째 본질적 요소와 대면할 수 있게 된다. 자, 여기 자본가계급의 두 가지 대응(그러나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대응)을 보자. 한편으로 그들은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부추겨서 대기업 노동자투쟁을 집단이기주의로 몰아붙인다. 그러나 그들의 실천이 여기에만 머문다면 이것은 반쪽짜리에 불과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대기업 노동조합을 향해서는 “연대 파업에 나서거나 타 사업장 노동자들의 요구를 대변하는 것은 노동조합의 본질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불순한 것이다. 이미 그것은 노동조합이라 할 수 없고, 체제전복을 향하는 정치집단이다!” 하고 외친다. 실제로 만약 타 사업장 노동자들, 그리고 전체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내건 투쟁에 나선다면 자본과 정부는 극악무도한 탄압으로 대응한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중소기업과 파견업체의 사장들은 일상적으로 모든 책임을 대기업 노조원들의 고임금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대기업자본은 어떻게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설득하고 세뇌하고 있는가? 아주 간단하다. “너희들에게는 고용안정과 어느 정도의 고임금을 보장해줄테니, 제발 중소기업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는 관심을 뚝 끊어라”는 것이다. 좀더 피부로 와닿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너희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다른 일반 노동자들에 비해 훨씬 더 좋은 조건을 보장해주고 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엄청난 양보다. 회사가 이렇게 잘 해주고 있는데, 전투적 투쟁과 적대적 노사관계라는 것이 도대체 말이나 되는가. 대한민국에서 우리 회사만큼 노동자들에게 잘 해주는 데가 도대체 몇 군데나 되느냐. 그러니 다른 문제(노동자계급의 문제)에는 관심을 딱 끊고 당신들의 이익에만 집착하라. 회사와 상생의 길을 도모하자”고 그들은 매일매일 속삭인다.

바로 이것이 대기업 사업장의 객관적 지형이다. 이 지형은 IMF처럼, 대기업도 더 이상 여유가 없는 극단적인 상황이 오면 물론 흔들릴 지형이다. ‘약속’이 ‘정리해고 통지서’로 바뀔 때, 오히려 기존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한 노동자의 저항은 높아진다. 98년을 전후로 하는 대기업 파업투쟁의 물결이 그것을 반영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 뒤로 또 바뀌고 있다. 이제 ‘안전판’으로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중이 대단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다시 IMF가 오더라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량해고를 눈감으면 정규직 조합원들의 고용이 보장될 여지가 이제는 열려 있다. 물론 경제위기의 정도에 따라 상황은 유동적일 것이다.

하지만 다음은 분명하다. 최선의 경우를 가정해서 IMF 당시처럼 대기업에서 계급타협의 조건이 형성되지 못하고 대규모 파업의 물결이 일렁거린다고 보자. 그러나 98년을 전후로 하는 당시의 대기업 파업은 결코 전체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창조하지 못했다.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지도 못했다. 대신 대량의 비정규직을 낳았고 중소기업의 대량실업을 낳았다. 또한 대기업 노동자들 자신이 해고의 재물이 되기도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의 파업이 전체 노동운동의 구심으로서 대기업노동조합을 낳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결국 핵심문제는 대기업노조와 이 노조의 투쟁의 성격이다. 대기업노조가 노동자계급 중핵의 관점, 즉 단사의 자기 이익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계급의 권리쟁취와 노동해방을 향해 선두에 서서 모든 희생을 치르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한국 대기업노조는 앞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되든 항상 사회적으로 고립될 것이 분명하고, 또한 그래야 마땅하다. 노동자계급 전체를 대변하지 못하고, 배신했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의 비참한 상황(대기업노조가 계급적 책임을 완전히 방기하는 것)이 더욱 확대된다면, 그리고 사회적 고립 속에서 힘 한번 못쓰고 몰락하면서 노사협조주의에 더욱 경도되고 노동자계급의 결집을 포기한 대가로 하사되는 약간의 양보에 흠뻑 취해 있다면, 대기업 정규직노조는 노동운동의 최후진 부위로 밀려날 것이고 노동귀족이라 정의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진지한 노동운동가들은 대기업 정규직 노조운동으로부터 당분간 손을 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령 대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율이 50%에 육박하고, 또한 외주 하청화 형태로 중소하청업체로 생산의 많은 부분이 이관된다면 어떠한 대규모 공황이 일어나더라도 대기업 정규직노조는 (물론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대량해고를 용인한 대가로) 자신의 고용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는 구조적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이때 대공장노조라는 규정은 이제 더 이상 대공장 ‘정규직’ 노동조합으로 협소하게 규정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공장의 중핵노동자들’로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런 가장 불행한 상황(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대공장 비정규직과 중소하청업체 노동자들에게도 불행한 상황)을 저지할 기회가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우리는 전력을 다해 이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그러나 이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는, 대공장 정규직 활동가들은 대공장에서 계급투쟁의 전선의 핵심이 이렇게 열려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계급적 중핵으로 설 것인가, 아니면 자기 문제에만 집착하는 타락한 조합주의 조직으로 추락할 것인가!” 이 핵심을 비껴가고자 하는 대기업 활동가들은 그 누구든 사실상 자본가계급의 주문에 응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양보를 최대한 따내는 데서는 전투적일 수는 있겠지만, 전체 노동자계급의 지도자로 전진하는 데서는 전혀 전투적이지 않다. 대기업 정규직노조에서의 조합주의적 전투성과 타협성 사이의 차이란, 전체 노동자계급 운동의 관점에서 보자면 종이 한장 차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노동자계급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음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서의 잣대는 단사의 잣대가 아니다. 여기서의 잣대는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익이라는 잣대다. 이것 말고 선진노동자들이 각자의 실천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다른 기준은 있을 수 없다.

레닌은 “단사주의적으로 고착된 대기업노조, 그리고 오직 10%도 안 되는 조직된 노동자들의 이익만을 지키려는 노동조합운동은 사실상 자본가계급의 주도권을 보장해주는 간접적 동맹자들이다”라고 단호하게 규정한 바 있다. 진실로 계급적으로 각성된 대기업 노동자라면, 그리고 사회적 주도권을 거머쥐려는 노동자라면 노동자 전체를 위해, 나아가서 자본주의 하에서 고통받는 인민 전체를 위해 투쟁한다. 이들은 투쟁의 요구를 대기업 정규직만의 편협한 요구에서 구출해, 광범위한 전체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요구로까지 끌어올리고 바로 이 요구를 전면에 내건다. 가령 이들은 자신의 임금을 몇 퍼센트 인상하라는 요구보다, 오히려 ‘4백만 노동자들의 삶과 연결된 최저임금을 인상하라! 비정규직 제도를 철폐하라!’는 요구에 더 집중하며, 이 후자의 요구에 입각한 투쟁을 더 전면에 내세운다. 바로 이런 관점에 입각한 노동자들 및 노동조합을 통해서만 비로소 노동운동은 전체 노동자를 하나의 계급으로 세워낼 수 있고, 자연스럽게 사회적 주도권을 쟁취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사회적 주도권을 둘러싼 전투에서 대기업 정규직노조들을 단사 울타리에 가둠으로써 승리자로 서 있는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사회적 주도권을 재탈환하고, 승리를 향해 진격할 수 있다.

이런 실천을 통해 평범한 노동자들 전체가 “그래, 바로 저들 대기업노조의 투쟁, 민주노총의 투쟁은 우리를 위한 투쟁이다. 그들은 진실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믿음직한 동료들이다.” 하고 매일매일 자각하게 될 때, 그리고 고통받는 이들 노동대중이 항의하고 저항하며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 할 때 이들을 방어해주고 보호해주는 튼튼한 버팀목이 바로 그들임을 깨닫게 될 때, 바로 그날 ‘자본가계급의 주도권’은 천삼백만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먼지처럼 사라진다. 그 대신, 이 광범위한 노동대중은 투쟁하는 노동조합들을 지지하고, 민주노조운동에 대대적으로 합류하기 시작한다. 그와 나란히 100만 대기업 노동자들은 자신의 투쟁에 천사백만 전체 노동자계급의 운명이 결부되어 있다는 생생한 자각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그리고 천삼백만 노동자계급 대중의 열정적이고 전면적인 지원과 지지를 바탕으로 단호하게 투쟁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노동자계급의 힘이 커지면, 중간계급 중에서 노동자계급을 지지하는 층이 넓어진다. 중간계급은 사회적 생산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의 특수성(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중간지대) 때문에 항상 동요하고 눈치를 본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힘이 쎈 편을 지지한다. 노동자가 자신을 단호한 계급으로 조직하여 세력관계의 저울추가 노동자 편으로 이동한다면, 중간계급의 흐름 또한 노동자 편으로 이동한다. 최소한 그들은 노골적으로 자본가계급을 편들지 못하고 중립화된다. 이는 노동조합과 사측 사이에서 동요하면서, 노동조합의 힘이 강하면 노동조합 편으로 기웃거리고 사측의 힘이 강하면 사측에 줄을 대는 하급 관리자들의 속성에 비교할 수 있다.

정리하자. 사회적 주도권을 둘러싼 전투에서 현재의 수세적이고 퇴행적인 비참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대기업 노조들은 조합주의의 울타리를 박차고 노동자계급의 중핵으로서의 면모를 재건설해야 한다. 이것은 10년 이상 대기업노조들을 휘감았던 단사주의적이고 조합주의적인 전통과 철저히 단절하고 계급적 운동으로 재탄생할 절박한 필요성을 지상명령으로 제기한다.

그러므로 지금의 대기업노조의 사회적 고립과 그 연장선에 있는 투쟁들의 하락을 평범한 노동대중의 후진성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중핵의 길로부터 벗어나 ‘사회적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계급이 대기업노조들에게 던진 양보의 미끼’에 길들여지면서 자기만의 이익에 집착했던 대기업노조들의 역사적 배신의 필연적인 결과로 규정해야 한다. 이 점을 솔직히 승인한다면 그는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투쟁해본 적도 없는 후진적 노동자들의 문제’로 규정하고 양심의 문을 닫는 순간, 그에게는 영원히 미래가 없을 것이다.

노동해방 사상에 입각한 근본적 대응의 절실함

다음으로 우리는 최근 사회적 주도권을 둘러싼 전투에서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과제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미 앞 장에서 다룬바 있지만, 지금 한국자본가계급은 세계적 차원에서 문제를 던지고 있다. 이것은 단지 이데올로기적 지형에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 토대를 반영하고, 그 토대로부터 이 이데올로기가 솟아나고 있기에 이것은 중차대한 문제다. 실제로 이미 노동자들의 삶은 세계적 문제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버렸다.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그것의 물질적 토대다. 세계적 차원의 전망 없이는 사회적 주도권을 둘러싼 전투에서 광범위한 대중을 설득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특히 한국자본가계급이 바로 이 지점에 초점을 맞춰 대중을 설득하고 있는 이상, 노동운동 또한 이 전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한국자본주의가 세계자본주의와 대단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경제적 토대 때문에 더욱 부각된다. 한국은 내수에 비해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높은 축에 속하는 나라다. 그런데 수출은 거의 전적으로 세계자본주의의 운동에 좌우된다. 한국자본주의의 성장을 떠받치는 토대가 해외자본가들의 금융, 주식투자인 상황도 영향을 미친다. 물론 이런 경향은 비단 한국자본주의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이 자본주의의 세계화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지는 것과 나란히 세계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더 강하게 영향 받는다. 한국자본주의는 이런 영향력이 더욱 빠르고 전면적이라는 점에 특수성이 있다.

이런 객관적 상황에서는 더 이상 일국적 차원의 전망으로는 대중을 제대로 설득하기 힘들다. 세계적 차원에서 노동자계급의 탈출구를 반드시 제기해야 한다. 우리는 격화되는 국제경쟁, 그리고 더욱 강화되고 있는 초국적 대자본의 영향력 앞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노동운동의 국제적 결속과 함께 노동해방을 향한 근본전망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우선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부터 검토해보자.

● ≪근로시간 연장으로 ‘U턴’≫ 독일의 노동자 1인당 평균 근로시간은 지난 30년간 25%가 줄었다. 노동조합과 회사측 합의로 주 35시간 근무제는 10년째 지속돼왔다. 그러나 최근 높은 노동비용 때문에 임금이 싼 동유럽국가들로 생산공장을 이전하는 기업들이 늘면서 실업률은 자연스럽게 높아지고, 경기불황까지 겹치면서 독일의 대기업 사업장에서는 신규투자를 확대하거나 공장이전 계획을 백지화하는 조건으로 근로시간 연장에 노사가 합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근로시간 연장의 물꼬를 튼 기업은 독일 최대 전기전자업체인 지멘스. 지멘스 노사는 지난달 추가적인 임금인상 없이 주당 근무시간을 35시간에서 40시간으로 환원하는 데 합의했다. 지멘스 경영진은 당초 노조가 노동시간 환원에 합의하지 않으면 휴대전화공장 2곳을 임금이 5분의1에 불과한 헝가리로 옮기고 2,000명을 감원하겠다고 밝혔었다. 지멘스 노사의 전격합의를 계기로 다임러크라이슬러, 오펠 등 독일 주요 기업들이 생산비 절감을 위해 노동시간 연장을 본격 추진하고 나섰다.

프랑스에서는 독일계 기업인 보슈의 근로자들이 지난 19일 정리해고와 공장의 해외이전을 막기 위해 추가임금지불 없는 노동시간 연장을 수용했다. 리옹 인근의 베니시외에 있는 자동차부품 생산공장 ‘보슈 프랑스’의 노사는 추가임금지불 없이 주당 노동시간을 현행 35시간에서 36시간으로 늘리고,회사측은 공장의 체코이전계획을 철회하기로 합의했다. 합의안에 대한 노조원 투표 결과 근로자 820명의 98%가 새로운 노동계약을 받아들였다. 반대는 2%에 불과했다.

독일이나 프랑스에 비해 주당 근로시간이 긴 편인 스위스에서도 이런 분위기에 편승, 근로시간을 더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스위스의 주당 근로시간은 41.7시간으로, 연간으로 따지면 독일보다 200시간 이상 많다. 스위스 경영자단체는 인접국가와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근로시간의 연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 ≪임금 싼 동유럽으로 속속 공장이전≫ 유럽에서는 근무시간을 둘러싸고 노사간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지만 논란은 앞으로 더욱 거세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이미 서유럽의 많은 기업들이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해 공장을 임금이 상대적으로 싼 동유럽으로 이전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옮겨갈 계획을 갖고 있다. 유럽연합(EU) 확대 이후 서유럽 기업들의 생산기지이전은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지속되는 경기불황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실업률은 10%에 육박한다. 이런 상황에서 근로자들은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근로시간연장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주간지 ≪슈피겔≫이 독자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7%가 주당 40시간 근무로 회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응답했다. 프랑스 중도우파 정부는 사회당 정부시절 채택된 35시간 근로제도에 본격적인 수정을 가할 태세다. 프랑스의 경제주간지 ≪액스팡시옹≫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54%가 주 35시간 근무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답했으며, 52%는 점진적인 폐지를 지지했다.(, 2004년 7월 23일자 ≪서울신문≫)

위 사례는 사회적 주도권을 둘러싼 전투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모든 쟁점이 단사별로 흩어지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집중되는 경향이 강한 서유럽 나라들, 한마디로 한국보다 사회적 주도권을 둘러싼 전투가 훨씬 더 일찍 일정에 오른 나라들, 게다가 자본가계급의 지배가 강제력보다는 사회적 토론에 따른 자발적 동의에 더 의존하는 나라들에서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의미심장하다. 사태의 핵심은 간단하다. 세계적 쟁점들 앞에서 대응력을 갖지 못하는 노동운동은 비극적 운명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런데 공장 해외이전이나 휴폐업과 같은 문제들은 ‘노동해방’의 근본과업을 즉각 일정에 올린다. 노동자계급은 일국적 차원을 뛰어넘어 세계적으로 단결할 수 있어야만 이러한 세계적 차원의 자본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다. 또한 이에 맞선 투쟁은 ‘공장과 기업이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즉 ‘누가 소유하고 통제할 것인가’라는 근본문제를 던진다. 만일 이런 세계적이고 근본적인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노동운동이라면 시대에 뒤처지게 되고 자본가계급의 주도성을 허용하게 된다. 이것이 남의 나라의 일인가? 또한 한국에서도 닥칠 것이 분명하지만 아직 본격화되지 못한 그런 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최근 내수중소기업이나 화섬업종과 같은 경우를 살펴보자. 내수중소기업들은 중국 등지에서 들여오는 값싼 소비재 앞에 비틀거리고 있다. 또한 중국이나 동남아로 공장을 옮기는 흐름 또한 가속화되고 있다. 화섬업종의 경우에는 이미 노동집약적 분야는 중국으로 생산시설이 대대적으로 이동하고 있다. 얼마전의 효성, 태광투쟁, 그리고 지금 전개되고 있는 구미의 코오롱, 금강화섬투쟁은 이것을 객관적 토대로 하고 있다.

자동차산업의 경우에도 이미 해외공장들이 자동차들을 대대적으로 토해내기 시작하고 있다. 이는 오래 지나지 않아 국내 자동차산업 전반을 위협할 것이 분명하고, 이에 따라 고용보장을 미끼로 노조에게 양보를 강요하는 흐름은 커질 것이다. 국제적 경쟁이 격화되면 될수록, 노동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가혹해질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가면 갈수록 세계적 차원의 자본의 공격과 씨름하게 될 것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만일 노동운동이 기껏해야 일국적 전망에만 갇혀버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자본주의 체제의 세계경쟁 앞에 노동운동은 무기력한 집단으로 머물게 될 것이다. 해외의존도가 대단히 높은 한국에서 상황은 더 극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노동운동은 자본주의 세계경쟁체제와는 명백히 구별되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하며, 이를 위해 우리 노동자계급의 힘을 세계적으로 결집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 과업에서 성공하지 못한 채 일국 차원에만 갇혀버린다면, 세계자본주의의 냉엄한 현실을 보여주면서 타협과 굴종을 강요하는 자본의 공세를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제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주도권의 활동 무대는 세계적 차원으로 대담하게 확장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세계 노동자계급을 하나의 계급적 부대로 결속하는 과업에 반드시 착수해야만 한다.

이미 많은 노동대중은 자기의 삶이 세계적 차원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을 직감하고 있다. 문제는 이 직감을 세계적 차원의 노동자계급운동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노동대중을 이렇게 설득해야 한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금 우리의 운명은 세계적 차원의 문제들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버렸다.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자본의 중국, 동남아 진출이라는 문제와 맞닥뜨리고 있다. 대량의 휴폐업이 예고되어 있다. 올해 가장 끈질긴 투쟁으로 기록될 금강화섬과 코오롱투쟁 또한 기본적으로 자본의 해외이동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이런 문제들은 전세계 노동운동이 공통으로 마주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의 세계적 단결과 공동의 대안을 통해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은 나라별로 나뉘어서 자본의 협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경쟁체제가 세계적으로 확장될 뿐만 아니라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자본주의 경쟁체제를 세계 노동자계급의 단결된 해방투쟁으로 분쇄하지 못한다면 노동자들은 국가별로 나뉘어 서로 경쟁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경쟁의 격화는 노동자들을 하향 평준화시키며, 더 열악한 처지로 추락시킨다. 자본주의 경쟁체제를 넘어서는 노동자해방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광범위한 노동대중을 설득하는 데서 관건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 이윤경쟁체제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노동대중은 단순히 싸우자는 호소에 대해 ‘시큰둥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이윤경쟁체제 하에서는 기업과 산업, 국가의 부흥 말고는 광범위한 노동대중의 절실한 문제들(고용과 임금)을 해결할 길이 없다는 점을 그들은 느끼고 있다.

사회적 주도권은 수백만, 수천만의 노동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만 쟁취된다고 나는 이야기했다. 이제 나는 이렇게 말해야만 한다. “이 수백만, 수천만의 한국노동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오직 이윤경쟁체제 자체를 문제삼는 노동해방의 근본전망을 제기할 수 있을 때만, 그리고 이 전망 아래 노동운동이 계급적 관점으로 재조직될 때만 그것은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한 가지를 덧붙여야만 한다. 수백만, 수천만 한국노동대중을 조직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우리는 수십억 세계 노동자계급의 공동의 노동해방 투쟁과 운동을 조직하는 데 대담하게 착수해야만 한다!”

사회적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자본가계급의 최근 시도는 노동운동에게 위기와 함께 기회를 던져주고 있다. 한 방 맞고 심하게 비틀거리고 있는 한국노동운동은 이제 살기 위해서는 ‘계급적인 노동운동’에 대해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거대하고 본질적인 문제 앞에서 기존의 조합주의적 대응을 고수하면서 ‘자신만의 사소한 양보’를 따내는 데 집착하는 대기업 조합주의자들과 ‘사회적 차원의 노사협조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개량주의자들은 절대 노동운동을 이끌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자본가계급의 사회적 주도권을 보장해주는 통로로 기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대응이 도망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사회적 대응 즉 노동자계급적 대응, 그리고 국제주의적 대응 없이 단순히 단사적 전투성이나 조합주의적 전투성과 같은 전투적 조합주의로는 이 거대한 문제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들은 거대한 전투 앞에서 ‘도망자’일 수는 있지만, 현명하고도 대담하며 승리를 향해 전진하는 노동자계급의 지도자일 수는 없다. 이제 이 지도자들이 한국노동운동의 혁신을 통해 사회적 주도권 쟁취와 노동자해방이라는 근본과업을 향해 단결해 전진할 때다! 오직 이 전진을 통해서만 대기업노조와 민주노조운동의 사회적 고립이라는 노동운동을 제약하는 근본문제 또한 해결할 수 있다. 다른 길은 없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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