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적 64만7500㎢, 2003년 현재 인구 2,817만명,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아시아 중부의 최빈국 아프가니스탄은 북동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힌두쿠시 산맥을 끼고 있어 한때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등산 관광국이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의 외침과 내란으로 초토화되어 지금은 3무(無)의 나라로 변해버렸다. 산에는 나무가 없고, 강에는 물이 없고, 밥그릇에는 먹을 것이 없다. 최근의 한 발표에 의하면 아프가니스탄의 신생아 사망률은 세계 1위, 4명의 아이 중 1명은 영양부족으로 5살 이전에 사망하고, 문맹률이 84%에 이른다.
극단적인 이슬람원리주의 무장단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을 잡게 된 것도 궁핍한 환경과 무관치 않다. 먹고 죽을 쥐약도 없을 정도로 한계상황에 내몰린 사람들로 하여금 질긴 목숨을 부지하게 해준 것은 미국의 코카콜라도 아니었고, 소련제 탱크도 아니었고, 가슴 속의 알라뿐이었다. ‘taliban’이라는 말은 ‘이슬람 교리를 배우는 학생들의 조직’이라는 의미, 1979년 구소련이 침공하자 죽기 살기로 항쟁을 벌였고, 1989년 구소련이 군대를 철수하여 마약 군벌들의 내전이 확산되었을 때 알라의 가르침 하나로 똘똘 뭉쳐 세를 규합해나갔으며, 결국은 1997년 국민 60%의 이상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통치수단이라고는 극단적인 교리 하나뿐이었던 그들이 지난 2001년 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바미얀의 불상들을 파괴한 것도 그렇게 해서라도 이교와 서구문물을 차단하지 않으면 더 이상 체제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9.11 테러 후 오사마 빈 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국의 침공을 받아 축출된 탈레반이 최근 마구잡이 인질극을 벌이는 것도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자포자기의 성전’이라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탈레반이 한국인 인질 두 명을 살해하여 나라가 뒤숭숭한 가운데 민감한 시기에 민감한 발언으로 물의를 야기하여 이름을 알리는 게 주특기(?)인 것 같은 강정구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가 어제 고려대에서 열린 ‘통일학교’ 강연회에서 한반도 역사에 미국이 개입한 것은 부당했다는 취지의 강연을 하던 중 “탈레반이 테러집단이냐? 그렇다면 상하이 임시정부도 테러집단이라고 봐야 하느냐?”고 발언하여 물의가 일었다. 강 교수의 발언에 대해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 같은 사람은 “정통성을 갖고 나라를 침략한 주역이나 군인을 상대로 저항했던 상하이 임시정부와 민간인까지 납치해 살해한 탈레반을 동일시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라고 꽤나 날카롭게(?) 지적했지만,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자면, 강 교수의 발언이 어처구니없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은 적국인 미국을 편들고 있으므로 ‘적의 편은 모두 적’이라는 탈레반의 단순논리를 박살 낼 논리가 마땅치 않거니와, 이슬람 교리에 죽고 사는 탈레반에게 있어서 기독교 선교·봉사 활동은 교회예배 시간에 목탁 두드리며 나무아미관세음보살 염불 외우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예수나 석가나 마호메트 모두 부인하지 않을 것이며, 사지에 내몰린 탈레반이 인질극보다 더 잔악무도한 짓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 하는 사람들이 더 우스꽝스럽다. 강 교수의 발언이 틀렸다고 비난하기보다는 하필이면 이때 왜 그런 발언을 했느냐고 질책하는 게 옳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무시한 극단적인 주장은 일방적인 편들기에 지나지 않는다. 굳이 편을 들려면 탈레반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고 이해와 관용의 편을 들기 바란다. 이해와 관용은 상대방보다 우월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만의 특권이자 의무, 열등한 사람들에게 이해와 관용을 기대하는 것은 탈레반처럼 민족주의적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강정구 교수가 친미로 돌아서서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예찬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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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 교수의 고려대 강연에서 있었던(펌) 소말리아에 지금 78일째 잡혀인는 선원노동자는 어떻게 된 것인가? 죽었다는 소리가 들려야 노통 특사나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