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중예술 작품이 중국과 베트남, 대만에 이어 일본에서까지 인기를 얻고 있다는 소식에 가슴 벅찬 흥분을 이어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한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타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중국과 베트남 등지에서 시작된 한류의 역사는 길어야 10년, 동아시아 전체로 영향력이 확대된 것은 최근 2,3년 간의 일일 뿐이다. 그러나 벌써 아시아 각국의 반한류 움직임은 구체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 만화 <혐한류>에서 보이는 다소 유치해 보이는 대중정서의 표현에서, 한국 드라마의 방송시간 제한조치 등의 정책적 차원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한류의 일선에 나서 있던 대중문화산업 담당자와 정부, 언론, 경제 관련 연구소 등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에 분주하다.
실질적인 대책 마련은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이와 함께 한류와 반한류 현상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점검해보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는 단기적인 수출 전술의 차원을 넘어서서 민족?국가 간의 문화교류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문제와 관련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먼저 한류와 반한류에 대한 우리 국민들이 태도를 먼저 되짚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어쩌면 한류에 대한 우리 국민의 뜨거운 관심과 그 원인이야말로 한류를 성공시킨 동력인 동시에 빠르게 반한류 현상을 해명하는 결정적인 열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가 왜 그렇게 한류 현상에 대개 뜨겁게 반응했는지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의 반응이 남다르게 뜨거웠는가에 대해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미국이나 일본의 텔레비전 드라마나 대중음악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다면 과연 그것이 뜨거운 관심을 받는 뉴스 거리가 되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미국이나 일본의 대중예술 작품이 한국이나 대만에서 인기를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앞서나간 나라이며 서유럽, 미국, 일본 등 이른바 선진국이라 칭해지는 이들 나라의 문화가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나라로 흐르는 것은, 근대 이후 변함없는 관행이었다. 한류에 대한 우리 국민의 뜨거운 반응은, 이러한 현상이 뒤집어졌다는 데에 대한 신기함과 반가움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뒤집혀진 후진국 콤플렉스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근대 이후 한 번도 남에게 이겨보지 못한 문화적 약소국의 위치에서 벗어나 남에게 팔 만한 문화적 생산물을 만들어냈다는 자부심이 우리를 들뜨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과연 이 한류 현상은 정당한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보자. 이 질문은 앞의 질문보다 답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본과 미국, 서유럽 등 강대국의 문화의 강력한 영향을 받으면서,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이나 균형감을 잃은 것에 대한 반성과 반발을 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이후 우리를 식민지화하고 통치한 일본과,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우리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미국, 그리고 더 나아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로서 전 세계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서유럽의 몇몇 국가들이 우리 나라에 미친 문화적 영향이란, 일방적이었으며 강력했고, 무엇보다도 지속적이었다. 식민지시대 조선의 대중들의 일본의 대중음악과 대중소설 등을 대대적으로 수용했고, 해방 후 미국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 팝음악의 영향력 역시 거의 절대적이었다. 이러한 일방적이고도 지속적인 강한 영향은, 분명 정상적인 문화교류가 아닌 문화식민주의적 현상이다. 강대국의 문화가 약소국으로 일방적이고 지속적으로 흐르면서 약소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파괴하는 현상, 강대국의 문화는 우월하고 선진적이며 자신들의 문화는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현상, 약소국의 대중들이 스스로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강대국의 시선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현상 등, 문화식민주의적인 현상들은 대부분 20세기 내내 우리 나라 대중문화 속에서 늘 나타나는 현상이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상당 부분 남아있는 현상이다.
문화식민주의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없다 하더라도 몇몇 나라의 문화가 과도하게 한 나라이 문화를 점하는 현상은, 분명 그 나라 문화산업의 기반을 약화시키며 그 나라 국민의 가치관과 생활감각 등에 과도한 영항을 미치면서, 균형감을 깨뜨린다. 이러한 문화적 균형감 상실은, 우리가 겪어본 바와 같이, 그 사회로서는 당연히 극복해야 마땅하며, 이는 단지 국수주의라 손가락질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한류 현상을 문화식민주의적 현상으로 규정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중국과 베트남의 한류 현상이, 우리의 높은 근대화?산업화에 대한 부러움의 소산이며, 이를 통해 우리 나라의 문화상품뿐 아니라 소비재 등의 소비 촉진이나 한국 기업의 진출에 기여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한편 타이완과 홍콩, 일본의 한류는, 오히려 우리의 대중문화 상품의 독특한 매력이 동아시아 시장에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일본이나 홍콩과 달리 여태까지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던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화가, 그것도 영화나 음반과는 다른 텔레비전 드라마처럼 일상공간을 바로 장악하는 방식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은 분명 그 사회로서는 일정한 충격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미국이나 서구의 팝 스타들 앞에서 환호하는 10대의 열광을 ‘광란’ 취급했듯이, 중국이나 베트남의 기성세대들이 한국 댄스뮤직 가수들에 열광하는 10대들을 우려스러운 눈으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한때 홍콩영화 범람에 우려스러운 눈길을 보냈던 것처럼, 우리의 드라마나 영화의 인기 상승이, 자국 문화의 균형감을 깨뜨릴 수 있다는 우려는 당연히 있어야 마땅한 것이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일고 있는 반한류 역시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한국 대중문화가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다양성과 문화적 균형을 깨뜨린다고 판단한다면, 이는 그네들로서는 정당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반한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가 갈길을 방해한다는 불쾌함이나, 우리의 이득이 줄어든다는 즉자적인 경계의 수준에 머문다면 오히려 문제이다. 우리가 꼭 다른 나라를 이겨야 한다는 생각, 우리 것이 최고라는 생각, 외국 시장을 전부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은, 편협한 국수주의적인 시각이다.
한류가 의미 있는 것으로 지속되려면, 단지 우리에게만 이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동아시아 대중문화 시장 속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우리 대중문화가 일방적이고 폭압적인 영향력으로 다른 나라의 문화적 균형감을 깨뜨릴 정도로 시장을 장악한다면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상대방에 해를 끼치면서 우리가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장기적으로 볼 때에 평화와 공존을 깨뜨려 결국은 우리까지 자멸하게 만드는 위험한 사고이다.
한류는 궁극적으로 아시아와 전 세계 대중문화의 다양화와 문화다양성 증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한 다양화에 대해서는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류가 확산되고 진전됨에 따라 우리의 문화 교류 대상이 넓어지고 우리 역시 상대편의 문화에 대한 넓은 수용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 우리의 다양한 문화수용력은 다시 우리 문화를 발전시키는 동력을 작용할 것이다. 우리가 정치?경제력을 바탕으로, 스크린쿼터제를 폐지하라고 압력을 넣는 미국과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의 정치?경제력 수준을 생각할 때에 가능한 일도 아니다.
여기에서 우려되는 것이 우리 나라 국민의 태도이다. 한국방송이 중국의 <칭기스칸>을 수입?방영한 것에 대해 대중들이 거센 비판을 쏟아붓는다거나, 동아시아권 다른 나라 문화에 대한 낮은 관심도는, 우리가 지나치게 관용적이지 못하고 폐쇄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류의 발전과 확산이 이루어지는 만큼, 훨씬 더 활발하게 우리는 상호의 문화교류를 증진할 수 있는 방안을 고안해야 한다. 합작이나 협력 등의 서로간의 활발한 교류는, 우리 문화의 발전의 밑거름이 되며, 나아가 한류 발전의 중요한 동력이 될 것이다.
한류는 자랑스러운 것이고, 반한류는 기분 나쁜 것이라는 감정적인 태도는, 한류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초기 한류 현상에 지나치게 흥분한 언론이나 정치권이 한류 지원을 한다고 설치면서 오히려 상대편 국가에 문화적 경계심과 반감을 만들어낸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오히려 이제 우리는 동아시아 문화 전체, 세계의 문화 전체를 조망하는 폭넓은 시야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이슈투데이 2006년 1월 게제된글이며, 노동자도 생각해보아야 할 주제라고 생각되어 재수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