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총선 이후 정세지형과 대의제 카르텔 읽기 -창립 13주년 기념 강연회

  • 글쓴이: 노동자교육센터
  • 2016-06-29

바보들이여! 정치를 사유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권리조차 없다!

 

김영수 (노동자교육센터 운영위원)

 

 지난 5월25일 노동자교육센터 창립 13주년 기념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노동자교육센터의 활동에 관심과 지지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고마움의 인사전합니다. 이번 13주년 기념 강연회는 김영수 운영위원이 "413총선 이후 정세지형과 대의제 카르텔 읽기"를 주제로 강연해 주셨습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자료집의 일부를 발췌해 올립니다. (편집자 주)

 

"4.13총선 이후 울산저널과 협의하여 ‘상상혁명,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를 기획특집으로 잡아 연재하고 있는 글이다. 기획하게 된 이유를 말하면, 아래의 글들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 정치와 권력을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습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보이지 않는 정치를 드러내는 계기를 만들어보자. 둘째, 정치와 권력이 자신의 일상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도화된 틀 내에서만 정치와 권력을 바라보고 있다는 전제에서, 정치와 권력을 정치적인 것의 부속품으로 간주하는 계기를 만들어보자. 셋째, 제도화라는 것이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너와 나의 상상력으로 ‘민’이 진짜 주체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와 권력을 상상하는 계기를 만들어보자." 서론 중 일부 발췌

 

 

<여보게들 정당은 어디 있나>

소제목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무소유’의 사상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돌아가신 법정 스님의 유명한 일화 중 한 대목과 매우 유사해서 그렇다. ‘법정 스님은 <여보게, 부처를 찾나>라는 설법에서, 부처는 사람이 만든 불상이 아니라 중생들의 일상 속에 부처가 있다고 하였다.’ 종교가 없는 바보이지만, ‘민’의 삶과 함께 하려 했던 스님의 종교관에서 정당의 참모습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도 언론에 찍히는 정당의 이름이나 화면 앞에 나서는 몇몇의 정치인을 정당과 동일시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고, ‘민’의 일상 속에서 찾기 어려운 정당정치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을 찾으려 시도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을 고려하면, 편집국이 기획을 참 잘한 것 같다. 바보는 그저 족집게 같은 그 혜안에 놀랄 뿐이다. 마침 주요 정당들이 4.13총선 이후 ‘민의’를 최고의 화두고 삼고 있는데, 바보는 그것이 ‘민’의 삶과 화학적으로 섞이기를 바랄 뿐이다. 일상의 삶이 정당정치와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것은 곧 권력에 대한 ‘민’의 자치를 일궈내는 디딤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보가 생각하기에, 3권 분립이라는 민주주의 기본 원칙에 따르면, 입법부를 구성하는 정치적 주체가 정당인만큼, 민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의 활성화가 곧 정당정치의 본질일 것이다. 정당은 구성원들의 이념적 정체성에 조응하는 국가와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권력의 희망공동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당이나 당원들은 그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에 노력을 한다. 정당이 선거시즌만 되면 그 동안의 정치활동을 다양하게 포장해서 내 놓거나,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다짐을 민에게 수없이 하면서 심판을 받는 이유도 그 일환임에 틀림없다.

‘민’은 그 다짐이 공수표라 하더라도 그것들을 미래의 ‘희망끈’이라는 위안으로 삼으면서 정당을 심판한다. 그 결과는 후보자나 정당 지지율을 반영하는 의회의 의석수로 드러난다. 그렇지만 바보들은 두 가지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하나는 정당을 심판하기 위한 판단기준이 즉자적이고 감정적이라는 늪이고, 다른 하나는 당선된 국회의원과 정당을 동일시하는 늪이다. 4.13총선 이후, 당선자나 대표자가 정당인 것처럼 인지하거나, 정당의 주인인 당원이 보이지 않는 것을 당연시한다. 늘 그랬던 것을 새삼스럽게 왜 바보처럼 제기하느냐라는 비난의 눈빛을 쏘지 않는 것만이라도 다행으로 여겨야만 할 것 같다.

주요 정당들은 4.13총선 이전이나 이후에 ‘기본이 없는 정당의 허상’이 무엇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막장드라마 그 자체였던 후보자 공천, 탈당 후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들의 복당 러시, 정당의 공약이나 그것의 실현 가능성 여부에 대한 무관심, 낙선자든 당선자든 정당에서 파견한 한 사람에 불과할 텐데 당선자와 정당을 동일시하는 ‘민’의 오류. 이것 말고도 더 많지만, 그만 자제하고 싶다. 지적할수록 더 슬퍼지기 때문이다.

공천의 막장드라마는 주요 정당들이 공천을 위한 진검승부가 판을 친 한 편의 무협지였다. 상향식은 고사하고 정략적인 컷오프 공천, 분파세력 살리기 공천, 구정치인을 새정치인으로 둔갑시켜 ‘그 나물에 그 밥’을 만든 공천의 과정에서 ‘당원’이나 ‘민’의 자리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당원’이나 ‘민’에게는 그저 허탈함 그 자체만을 안겨주었다. 물론 여론조사의 허점과 함정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지만, 정당의 주인이나 권력의 주권자들은 그저 공천을 둘러싼 검투사들의 진흙투성이 싸움을 바라만 보아야 했다. 주요 정당들은 공천 후보자들을 심사한 기준조차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고서, 정당의 기능 중에 하나인 ‘정치인 양성’을 흑막으로 가려버린 것이다. 바보는 살면서 기준이 없는 심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바보야! 정말 문제는 정치인 것 같다. 당의 권한을 행사하는 몇몇의 정치인들은 막장드라마의 주연과 조연으로 득세했지만, 정당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4.13총선의 공천과정은 후보자를 추천하고 결정하는 권한만이 난무했다. 혹자들은 진검 승부의 긴장감을 ‘민’에게 던져주는 것이 정치가 아니겠냐고 자위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정당이 휘두르는 칼로 피에 젖는 사람은 공천후보자들이 아니라 ‘민’이다. 공천 후보자들은 정당의 규정과 규칙에 따라 경쟁이라도 한다. 그런데 ‘민’은 철저한 관객으로만 남아 있다가 정당이 뿜어대는 핏물의 피해자가 된다. 정당에 가입하지 않았어도 특정한 정당의 공천후보자를 지지하고 있던 ‘민’은 순간 ‘닭 쫒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 버렸다. 세상의 수많은 바보들이 어리석은 것일까? 특정 정당을 대표하는 몇몇의 정치인을 그들의 정당으로 간주하는 바보들의 행진을 왜 멈추지 않는 것일까?

남아공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을 받으려면 5번의 심사과정을 거쳐야 한다. 지역의 당원과 ‘민’이 심사하는 두 번의 과정, 광역 단위의 당원과 당의 시스템이 심사하는 두 번의 과정, 그리고 전국적인 중앙당의 시스템이 심사하는 마지막 과정이 있다. 이렇게 다차원적으로 심사하는 것은 ‘민’과 정당의 정치활동을 밀접하게 결합시키기 위한 것이고, 정당의 주요 역할 중에 하나인 ‘정치의 사회화’를 실현하는 과정인 것이다. 당원이나 ‘민’은 이 과정에서 ANC를 실제로 관리하고 지배하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존감을 확보하거나 강화시킨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민’의 정치의식이 높아지게 된다. 남아공만의 특수한 경우라고 치부하지 말자.

이번 4.13총선도 여느 선거와 마찬가지로 공천에서 탈락한 후보자들이 탈당해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바보는 정당의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진 그 행위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당에 가입하거나 탈당하는 것도 권력의 희망공동체를 위해 구성원들과 함께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일진대, 국회의원 후보에서 낙천되는 순간 탈당하고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순간에 복당하겠다니.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정당 활동의 근간을 선거에서만 찾는 무지와, 선거가 끝나고 난 이후에 나타난 진짜 바보들의 뻔뻔함과 ‘무늬만 정당인 사실’에 숨이 턱 막힌다. 정치인들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탈당할 경우에 그 직을 상실하는 남아공의 제도와 그 의미에 전율을 느껴야 할 것이다.

다수 정당의 자유로운 정치활동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중에 하나인데, 정당의 정치활동을 눈 씻고 찾아도 쉽게 눈에 띠지 않는다. 의회활동은 정당의 여러 기능 중 하나에 불과한데, 정당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국가는 정당에게 정치활동을 잘 하라고 어마어마한 세금을 보조한다. 주요 정당들은 2012년 6월부터 시작된 제19대 국회에서 아래와 같은 보조금을 받았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새누리당은 약1,235억 원,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민주통합당(민주당)은 약 1,090억 원, 그리고 통합진보당과 정의당은 약 292억 원을 보조받았다. 주요 정당들이 ‘민’의 혈세를 소중하게 사용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정당에게 경상보조금, 선거보조금 등을 세금으로 지원하는 세계 유일의 국가가 대한민국임을 이 글에서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바보는 또 다른 바보로 취급당하는 ‘민’에게 약속 하나 하고 넘어가야겠다. 꼭 기회를 만들어 정당국고보조금의 정당성 여부를 함께 이야기해보자는 약속이다. 정당도 이 약속을 하면 좋겠다. 아무튼 보조금이 유흥비로 탕진하라는 것이 아닌 만큼, 정당은 보조금에 상응하는 대가를 민에게 지불해야 하는 약속이 아니겠는가? 나만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며 고민하는 것일까, 아니면 모두가 바보처럼 살아가는 것일까. 바보야! 문제는 정치거든. 이 보조금은 명목상 정책개발비, 임대료, 인건비 등으로 사용된다. 정치활동의 근거자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보는 혹시라도 보이지 않을까 싶어 두 눈 크게 뜨고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면서까지 두리번거렸지만, 의회의 교섭단체가 되어 있는 정당들의 정치활동을 ‘민’의 삶 속에서 볼 수가 없구나. 문제는 내가 바보인가 아니면 정당이 바보인가.

정치는 4.13총선 이후 제19대 국회의 바통을 제20대 국회가 이어받을 준비로 바쁘다. 제20대 국회는 원내교섭단체가 3개 정당으로 구성된다. 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이다. 제19대 국회와는 다양한 측면에서 다를 수 있다. 특히 국회선진화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3개 정당은 협치를 내세우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국회가 작동되지 못하는 책임을 뒤집어써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래서 누구든 어떤 정당이든 ‘민생’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이 기능 때문에 원내 교섭단체로 참여한 정당들이 싸우고 또 싸워왔다. 그런데 이들 정당의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들 입에서 ‘일하는 국회, 일을 위해 협치(협력+통치)하는 국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있다. 바보는 이를 접하는 순간 포복절도에 가깝게 웃었다. 민생을 바라보는 가치와 철학이 다른데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정당 스스로 정당의 'ㅈ'조차 알지 못하는 무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누구를 ‘협력해서 다스리고 통치하겠다.’는 말인가. 선거 기간 내내 당신들의 종복이 되어 당신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했던 사람들 입에서 통치라니. 정당은 의회에 파견한 국회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육을 철저하게 시켜야 한다. 첫째, 정당이 해야 할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민생과 관련된 정책을 법으로 만들기 위해 ‘민’과 지속적으로 협의하고 소통해야 한다. 모든 정당들이 ‘민’의 삶터 속에 소위 ‘소통위원회’나 ‘협의위원회’를 만들어 운영한다고 가정해 보자. 둘째,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끼리 성벽 안의 비밀정원에서 만나는 회동을 ‘민’과 ‘소통’한 것처럼 떠들고,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힘이 약한 사람의 힘까지 빼앗아 힘을 집대성하려는 사람들의 생각이 ‘민’의 것인 양 포장하는 대민사기단이 되지 말아야 한다. ‘민’이 그러한 자들을 고소·고발하거나 직접 징치할 수 있는 ‘정치인 감시·통제단’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다. 실업자를 구제할 수 있는 일자리로 정착시키면 어떨까. 국가가 이런 단원들에게 적정한 월급을 주고, 각종 정보에 대한 접근을 실제로 자유롭게 하면 된다.

정당이 그 동안 우상과 가면 속에 가려져 있었던 자신과 정치인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바보이기에 정당이나 선거의 진짜 모습을 알기 어려워 그럴 수 있으려니 하면서도, 세상을 살아가는 상식의 잣대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정치가 암 덩어리야! 이 바보야’와 같은 외침이 또 다른 바보들에게 쉽게 전이될 것 같아서 괴롭기는 하다. 하지만 바보는 정당에게 정말 바보스러운 질문 하나를 던진다. 여보게들 정당이란 또는 정당이 꿈꾸는 권력의 희망공동체란 당신들만의 권력카르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민’의 삶터에 있다네. 바보들이여! 정말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려거든, 아니 바보로 취급받지 않으려면, 우리의 삶터에서 활동을 하지 않는 정당이나, 우리를 정치의 주체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정당만큼은 ‘지구 밖으로 내던져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 정치를 바라볼 힘이 미약한 ‘민’은 정말 노예와 다를 바 없이 취급당하다가 죽는다. 사람답게 살다가 죽겠다는 생각이 있거들랑, 바보가 하는 이 말을 꼭 기억했으면 한다. 바보들이여! 정치를 사유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권리조차 없다!

 

<지겹지도 않니~ 의회 내 정당의 카르텔>

카르텔이라는 말은 매우 익숙하다. 경제적인 영역에서 유무형의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담합의 울타리’를 친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울타리는 경제적인 영역만의 것이 아니다. 삶의 주변에 널려 있는 것이 그러한 울타리다. 연고주의적인 공동체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족벌과 학벌의 경계선, 가족주의와 지역주의의 경계선, 그리고 강제검열과 자기검열과 같은 이념적 경계선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계는 바보들의 의지와 무관하지만 바보들 스스로도 그러한 울타리를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 경계를 긋기도 하고, 다른 경계선 때문에 고통을 받기도 한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생산하든 그렇지 않든, 사회구조는 이러한 경계의 자기생산체계로 떠받혀지고 있다. ‘민’이 연고주의적인 자기 카르텔 속에서 허우적댈수록, ‘보이지 않는 손’은 챙길 것 다 챙기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사랑과 시혜의 손길인양 뻗칠 것이다.

그런데 ‘민’을 연고주의적인 자기 카르텔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정치적 주체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정당이다. 물론 어떤 정당은 ‘민’의 본성에 가장 가까운 계급적 카르텔을 구축하려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당은 ‘민’의 연고주의적 자기 카르텔을 더욱 고착화하려는 대부분의 정당 때문에 의회에 진입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민’의 삶터에서 정치활동을 일상적으로 하면서도 그 내용들을 사회화시키기가 쉽지 않다. 이미 거대한 경계의 장벽이 높기 때문이다.

정당은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문화를 쉽게 바꾸지 않는다. '민'이 봉기정치의 직접적인 주체로 나서지 않는 한, 사회체제의 지배관계가 '민'의 투쟁으로 위협받지 않는 한, 그러한 정치문화를 끝까지 고수하려 한다. 의회라는 공간은 정당끼리 '민'의 연고주의적 카르텔에 부응하는 그들만의 리그를 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20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4·13 총선이 원내교섭단체를 국민의당(38석), 더민주당(123석), 새누리당(122석)으로 만들었다. 원내의 양당 교섭체제가 3당 교섭체제로 바뀐 것이다. 바보들이여! 제발 정치학자나 언론의 미혹에서 벗어나, 정치현실을 직시하면서 생각하는 주권자가 되자꾸나. 무슨 소리냐 하면.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다당 정치체제’였지 ‘양당 정치체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려내야 한다는 말이다. 제20대 국회에는 정의당(8석)과 무소속(11석)도 참여하는데 양당 정치체제라니? 그리고 국회 밖에는 녹색당, 노동당, 한국국민당 등 수많은 정당이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데, 양당 정치체제라니?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

공화정 체제에서 서로가 담합하여 권력을 나누어 갖는 권력 카르텔 구조에 참여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권력 자원을 분점하면서 기득권에게 유리한 권력 구조를 화하는 담합이다. ‘의회 내 그들만의 리그’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선거 제도는 권력 카르텔 구조의 대표적인 장치 중 하나이다. 선거는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지배 세력은 선거를 이용하여 공화정의 원리와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대다수 인민들은 선거로 선출하는 대표가 자신의 권리를 대신해 줄 것이라는 환상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듀베르제(Duverger)는 정당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유형으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①엘리트정당 ②대중정당 ③카르텔 정당 ④선거전문정당. 듀베르제는 소선거구제와 양당제의 고착을 말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부르주아 정치의 정당체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권력형 양당체제를 지향한다.

정당의 최고 가치는 이념적 정체성에 기반하는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권력투쟁이다. 이러한 투쟁의 과정에서 출현하는 정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람 중심의 계파는 정파가 아니다. 그저 정당정치가 아니라 인물 중심의 종파정치의 산물이다.

다당제이면서 일당제와 유사한 경우는 없는 것인가? ‘그놈이 그놈이네, 그 밥에 그 나물이네.’ 정치인들이 정당을 새로 만들거나, 새로운 정치 세력이라고 선언하기는 하는데, 실제로는 ‘새로움’이 전혀 없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러 정당이 있는 상황은 겉으로 보면 선거 경쟁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특정 지배 세력이 ‘그들만의 정치 리그’를 유지한다면, 혹은 소수 정치 세력만의 권력 카르텔이 깨지지 않는다면, 그러한 다당제 정치는 실제로 블록화된 일당제와 다를 바 없다. 외피만 민주주의로 치장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다당제 권력 카르텔’이다.

새로운 정치 세력의 진입 장벽을 만들어 버리는 카르텔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정당 카르텔’의 악순환 구조인 것이다. 진보이든 아니든, 이것이 새로운 정치 세력이 출현하거나 의회에 진입하는 것을 구조적으로 막는 ‘정치 사회의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정당 카르텔의 대표적인 현상은 거대한 양당 정치이고, 그러한 정당 정치의 구조는 정치의 안정화와 효율성에 기여한다고 한다. 소수일수록 정치적 협의와 협상의 과정이 효과적이고, 의회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도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의심스럽다. 두 개의 정당만이 정치 사회의 공간에서 서로 협의하거나 경쟁한다고 정치적 안정화와 효율적인 입법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는 정당이 아무리 난립하여 경쟁한다 하더라도 정치 사회의 민주적 시스템이 작동하고 그것에 조응하는 정당 정치가 성숙되어 있다면 문제가 아닌데, 정치적 지배 세력들은 다당제가 작동하는 것을 쉽게 허용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대의제 민주주의는 공화정의 정치 원리로 세워졌다. 대의제도의 기본 원리는 대의제도와 민주주의를 동일하게 여기면서 ‘민’이 직접 정책 결정 과정에 자유롭게 참여하는 정치 체제를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은 보통선거권을 행사하고 대표자들을 잘 감시하는 능력의 주체가 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인지한다. 또한 자신들을 통치할 대표자들을 선택하는 선거에 참여하여 가장 강력한 정책 결정자들을 선출하는 정치 체제의 장이야말로 가장 민주적인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민’은 대의제도 속에 들어 있는 민주주의의 이중성 때문에 자신이 감당해야만 하는 민주적 과제의 과중함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삶의 기본이 버거워지면서 민주와 정치에 대한 능동적 주체임을 포기하기도 한다. 방관자가 되거나, 혹은 ‘정치적인 것’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곧 자유라고 오해한 채 살아간다.

인간이란 군집 생활을 해야만 하는 존재이고, 그 생활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또는 왜 그런 생활을 하는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존재한다는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삶 조건’을 마련하여 살다가 죽는 것 자체가 인간의 고결한 ‘삶 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