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성의 투병일기 1 -

  • 글쓴이: 이세영
  • 2004-01-08

박 선생,
그래도 그동안 간간이나마 전화도 있고 소식도 있었는데,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던데, 도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오. 영호한테서 전화받고 알게 되었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세상이 병들었다고 당신마저 병들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요. 정작 병들어야 할 사람은 멀쩡한데 왜 하필 당신이어야 한단 말이요. 이 무슨 변괴요, 뭐 이런 세상이 있단 말이요.
교육자센타에 전화했지만 전화받는 사람이 없소. 이 메일을 보거든 지금 어느 병원에 있는지 알려 주시오. 정말로 가슴이 아프요.
>>> Writer : 박준성
> 참 묘한 기다림이었습니다
> 그리움이 없는 기다림이었습니다
> 기다리고 싶지 않으나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시간이
> 한 달 열흘이 지나고, 그보다 더 긴 3일이 지났습니다
>
> 오늘 오전 담당 의사가 회진을 했습니다
> 예상은 했으나 바라던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
> "지난 번 CT 촬영 사진에서 보았던 3-4cm되는 것이...
> 확실하니까 29일 오전에 색전술 시술을 하는 것이
> 좋겠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
> 색전술 시술은
> '간종양 동맥 경화 화학 색전술'이라고도 하고
> '간종양 화학 색전술'이라고도 하는 간암에만 쓰이는 치료법이랍니다
> 종양 앞쪽 동맥을 화학약품으로 막아 피와 산소를 통하지 못하게 하여
> 종양을 괴사시킨다는군요.
>
> 11월 14일부터 여기까지 한 단계씩 걸어왔던 검진 결과를 돌아보면서
> 병원에 들어와 먼저 입원해 있던 선배들의 경험담에 귀를 기울이면서
> '그냥 나갈 수는 없겠구나'하고 마음 준비는 하고 있었습니다
> 그런데 막상 조직검사 결과를 듣고 나니까
> '아, 내가, 세상 크게 잘못 산 것도, 아닌데,
> 아직 나이도 창창한데, 할 일도 많은데, 내가, 왜, 암이야!'하는
> 반발감이 물밀 듯 밀려왔습니다.
> 준비했던 마음의 평정이 파도에 휩쓸리듯 휘청거렸습니다
>
> 마음이야 마음으로 수없이 다스리려 했지만
> 몸은 몸대로 무척 긴장을 했나 봅니다
> 2-3일 사이에 사방 어금니들이 찬물 한 모금도 닿지도 못하도록 예민해졌습니다
> '몸' '몸' 하던 사람이 갑자기 '마음' '마음'하니까
> 몸이 헷갈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 몸이 좀 안좋다고
> "몸가는데 마음간다"를 바꿀 수는 없겠지요
> 몸이 그것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
> 평생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전해주고 다른 병실로 떠난
> 담당 의사의 표정과 말투가 떠올랐습니다
> 의사에게 나는 환자이듯
> 내게 간종양은 종양인걸
>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간암은 치료를 받으면 되는 거잖아
> '내'가 왜 이렇게 흔들리지...
> 나도 의사처럼 간에게 담담해져야지...
> 다시 기분을 추슬러 보았습니다
>
> 입원 날자 예약하고 열흘 남짓 약속했던 강의
> 처리해야 할 일들 마무리하는 사이에
> 그전 같으면 볼 일이 없었을
>
>
>
> 을 훑어 보았습니다.
>
> 마지막 팬클럽을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한 마디가 "지면 어때?"였습니다
> 소설 속의 '나'는 푸른 하늘 처다볼 시간조차 없이 몇 년을 일했지만
> 구조조정에서 밀려 '가정을 버리고도, 회사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퇴출당했습니다
> 상처가 쉬 아물지 않고 때때로 분노가 터져나옵니다
> 어느 날 친구와 나 사이에 이런 식의 얘기가 오고 갔습니다
> "부끄러운 게 아니잖아"
> "부끄러운 거야"
> "왜?"
> "진거니까"
> 그때 친구가 말합니다.
> "지면 어때?"
> 이 말을 듣는 순간 주인공에게 졸음이 몰려오고
> '자면 어때?'
> 하는 생각이 들면서 길고 아득한 잠에 빠져듭니다.
>
> 이 부분을 읽으면서 '지면 어때'를 '아프면 어때'로 바꿔보았습니다
> 기분이 개운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 그러면서도 '아프면 어때' 같은 말 안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더 간절했습니다
> 이제는 '좀'을 보태 확실하게 이 말을 해야할까 봅니다
> "아프면 좀 어때?"
> 여기에 한 마디 더 보태야 하겠습니다
> "다시 시작해야죠 뭐"
>
> 속으로 '또 다시 앞으로'를 불러봅니다
> 가버린 세월을 탓하지 마라
> 지나간 청춘일랑 욕하지 마라...
> 자 또다시 일어나 역사에 발맞추어 하나!둘!셋!...
> 끝내는 우리가 건설할 세상을 향해 앞으로!
>
> 다시 시작하더라도 그 길은 지금까지 왔던 길에 이어지는 것일 터이고
> '역사의 제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면
> 투쟁의 역사
> 희망의 교육
> 해방의 꿈을
> 함께 이루어갈 관계와 실천이 필요하겠지요
> 혹시 제가 좀 천천히 가더라도 때때로 기다려 주십시오
> 모르지요
> 제가 더 빨리 갈 때도 있을 겁니다
> 그때는 그리움 가득 담아 기다리겠습니다
>
> 걱정해주시는 분들께 이원수 선생님이 돌아가시기전
> 마지막으로 썼다는 동시
> '겨울 물오리'를 전해드립니다.
>
> 얼음어는 강물이 춥지도 않니
>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아
>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 아장아장 물오리 귀여운 새야
> 나도 이젠 찬바람 무섭지 않다
>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
> 백창우가 곡을 붙인 노래는 나중에
> 기타치면서 같이 불러보겠습니다
>
> 묘한 기다림 끝에 얻은 이 아픔과 시련이
> 앞으로 지금보다 더 고개숙이고 낮춰살라고
> 수련과 명상의 시간을 좀더 가져보라고
> 2003년이 제게 준 소중한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렇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순간 순간이
>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 꿋꿋하게 버텨
> '박준성의 투병일기' 될 수록 빨리 끝내겠습니다
>
> 2003년 잘 마무리 하시고
> 2004년 힘차게 맞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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