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일기 4 - 끊을 수 없는 것들

  • 글쓴이: 박준성
  • 2004-03-09

항암제 후유증으로 몸이 고통스러울 때는 만사가 귀찮고
몸이 좀 회복되고 나서는 먹고 놀고 자는데 지장이 없게되니까
'투병일기'를 쓰기도 머쓱합니다.
2월 24일 2차 입원을 해서 26일 다시 시술을 했습니다.
1차 때는 시술 잘 끝난 것만도 다행이지 하면서
울렁거리고 메스꺼운 고통을 잘 버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항암제 후유증이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마 이제는 살겠구나 싶으니까 긴장감이 떨어져서 더 그런지도 모릅니다.
내 자리에 먼저 있던 환자는 3일 낮밤을 잠도 거의 못자고
고통스럽게 구토를 하다가 퇴원을 했다고 하는데 저는
26일 시술 끝나고 27~28일 낮까지는 그리 힘들지 않게 지났습니다.
다른 환자 담당 레지던트가 술 많이 마시던 사람은
구토없이 잘 지내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요.
술이라는 독성의 화학제품에 단련이 돼서 그렇다는 말인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래서 술에 익숙해 있던 나는 괜찮은가 싶었습니다.
웬걸 닝겔을 빼고 후유증 방지 주사약 기운이 떨어져서 그런지
28일 밤 10시 반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잠에서 깨어나 낮이 밝도록
끊어질 듯한 배를 움켜쥐고 변기를 부여잡고 쓴 물까지 토해냈습니다.
다른 환자들이 잠자고 있어 신음 소리를 낼 수도 없고
아내는 집에서 밥해오려 가고 없고...
29일도 퇴원해 집에 온 날 밤도 비슷하게 힘들었습니다.
70년대 80년대 고문과 감옥살이하면서 겪었어야 할 고통을
다른 식으로 겪는거지 하면서 위로를 해봐도 몸이 들어주질 않았습니다.
이런 고통을 보름 이상씩 내내 겪어야 하는 암환자들은
암 때문이 아니라 항암치료 후유증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기도 한답니다.
그러고 나서 3.4일 지나자 후유증이 가셔지면서 다시 밥맛도 돌고
움직이는데 불편함이 없이 2차 입원하기 전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경과가 좋아서 암 종양 세 개 가운데 두 개는 보이지 않고
하나도 많이 작아졌답니다. 2차 시술 결과도 좋답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담당 의사 얼굴 표정에서도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버텨야할 시간이 몇 년은 남아 있지만
그동안 정말 많은 분들 도움 덕분에 경과가 이렇게 빨리 좋아지고 있구나...
고맙고, 감사하고, 좋아서 아내와 함께 몰래 눈물을 흘렸습니다.
4월 1일 또 검사를 하고 4월 7일 의사와 면담 약속이 잡혔습니다.
지금도 점점 나아지고 있고 앞으로도 경과가 좋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를 아껴주는 많은 분들의 좋은 기운을 듬뿍듬뿍 받고 있다는 걸
하루하루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칫 방심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잘 알압니다.

제 투병일기에 김진균 선생님이
'투병은 고생스러운 것-위안만이 필요하다'면서
달아주신 댓글입니다.
"기다리면서 '좀 병들면 어때' 하지 마세요.
어째튼 일어나는 방도를 찾아 모두 함께 노력하도록 합시다.
투병은 역시 고생스러운 거죠. 오직 자신을 위로하고 다독그리며
일어나도록 해야겠지요.
정말 명상을 통해서 용기를 얻고 시간을 차지하세요.
참, 마음 아프다"
다시 읽어 볼 때마다 제 마음도 참 아픕니다.
노동자교육센터 동지들이 병문안을 갈 때는 제가 1차 입원을 해 있을 때라 못가 뵙고
퇴원해서 찾아뵈려고 할 때는 선생님이 병원에 가셔서...
끝내 못 뵙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위로하고 다독그리며
명상을 통해서 용기를 얻고 시간을 차지하라'는 말씀 명심하려고 합니다.

투병의 과정은 그동안 좋아하던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끊고
천천히 기억 속에 묻어 두었다가 때때로 과거를 뒤적여 그리워 하면서
차츰차츰 새로운 것들과 익숙해지는 시간인 것같습니다.
그리고 끊을 수 없고 끊어서도 안되는 더 많은 것들과
새로운 것들을 인사시켜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아니 언제까지가 끝이고 그때부터 다시 시작이 아니라
끊어서는 안되는 것들과 새로운 것들을 섞어 살아가는
지금 여기 이 시간들이 바로 일상이고 삶이고 투쟁입니다.

지난 일요일에는 집에서 가까운 검단산에 갔습니다.
몸 상태를 아직 가늠할 수 없어
예전 같으면 쉬지 않고 한걸음에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던 산을
지팡이 두 개를 짚고 평소보다 천천히 걸어 넘었습니다.
숨 한번 몰아쉬지 않고 3시간 동안 크게 힘들지 않게 넘었습니다.
매일 옆 동산을 한 시간 이상씩 걷는 운동 효과가 큰 것같습니다.
3월 14일(일)에는 역사와 산에서 가는 충청도 금수산행에 가려고 합니다.
아직 무박 2일은 부담스럽지만 이번 산행은 당일 산행인데다
걷는 시간이 5시간 남짓 밖에 안돼서 갈만 하겠습니다.
간에 부담이 안될 정도의 속도와 잠자리가 문제이지
무리하지 않게 쉬엄쉬엄 가면 어느 산도 괜찮을 것같습니다.
금수산 잘 갔다오면 무등산도 잘 갈 수 있겠지요.
결별할 수 없는 많은 것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역사'와 '산'이고, 꿈이고 희망이고 해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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