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처럼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의 심화, 생산의 사회화와 사적 소유 사이의 모순의 심화 등의 혁명적인 객관적 조건과 노동자계급의 개량주의적 주체적 조건 사이의 모순이 심화된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으려면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선진노동자 집단의 형성과 이를 통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이데올로기의 대중화가 절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관련하여 좋은 글이라 생각되어
그런데요가
미래연대에서
퍼왔습니다.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
독일의 노동운동가 리프크네히트가 남긴 이 구절은 오랫동안 후대 노동운동가들의 활동에서 기본 지침이 되어왔다. 노동자계급이 해방될 수 있는 근본 조건에 관한 사상을 학습하는 것, 선전을 통해 노동해방이라는 대안을 노동자들에게 보급하는 것, 단일한 노동해방의 정신으로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을 조직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선진노동자들의 가장 기초적인 활동 내용이 되어야 할 것들이었다. 그래서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는 외침은 한국에서도 과거에 매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어용 한국노총조차 어떤 교육책자에서 이 문구를 제목으로 삼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오늘의 상황을 전반적으로 볼 때 리프크네히트의 외침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지워지고 있다. '조직하라'에 대해서는 아니더라도, 학습하고 선전하는 것에 대해서라면 마치 "그것은 투쟁하는 노동자가 할 일이 아니며 단지 한가한 사람들이나 할 일" 정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는 그 필요성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실제로는 이런저런 이유에서 뒤로, 사실상 기약 없이 미뤄지기도 한다. 만약 학습하고 선전하고 조직하는 과제에 대한 인식이 투쟁하는 노동자들 다수에게 분명하게 자리 잡은 상황이라면 지금 우리가 굳이 리프크네히트의 문구를 되새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노동자들이 학습과 선전과 조직이라는 분야에서 이미 충분히 많은 것들을 쟁취했다면, 이제 더 이상 거기에 머물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수준의 과제를 향해 과감하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 상황은 그렇지 않다.
잊혀져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잊혀지는 것들
학습하고 선전하고 조직하라는 리프크네히트의 외침이 점차 힘을 잃어가는 것은 선진노동자 운동의 쇠퇴와 연관되어 있다. 선진노동자들의 정치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80년대 후반기는 학습하고 선전하고 조직하는 기초적인 활동 역시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기였다. 과거에 선진노동자들은 비록 급진민주주의 정도의 정치에 영향 받고 민중주의적 한계에 갇혀 있었다 하더라도 부지런히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고자 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주위의 동료들에게 알리고 설득하려 분투했고,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동지들과의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활동은 정치적 조직화를 향한 발걸음의 일부였다. 오직 근시안적 단견을 가진 사람들만이 학습, 선전, 조직의 과제를 가볍게 건너뛰려고 했을 뿐이다. 요컨대 이 시기에 학습하고 선전하고 조직하는 것은 자본가들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 대중적 투쟁을 일궈내기 위한 가장 초보적인 활동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선진노동자들이 자신의 실천적 임무를 바라보는 방식과, 통상적인 노동조합운동의 간부들, 상근 서기들이 자신의 실천적 임무를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첫째로, 통상적인 노동조합 투쟁에서 1순위로 제기되는 것은 임금과 고용안정 등 경제적 요구다. 이번에 임금을 올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내 일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등이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반면 이 사회 전체를 휘감고 있는 자본가들의 지배체제에 대한 전체적 인식이나, 그것에 맞선 단호한 정치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노동조합 속에서 좀처럼 뿌리내리기 쉽지 않다. 둘째로, 노동조합운동은 대체로 현재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는 노동자들, 즉 조합원들만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조합원들의 부분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투쟁이 조직되는 경우란 사실 보기 힘들며, 종종 자기 사업장의 이익 또는 자기 부서의 이익이 공동의 이익보다 우선시된다. 즉 노동조합운동은 말 그대로 경제적 조합적 이해관계에 보다 강하게 이끌린다.
그 결과, 정치운동과 만나지 못한 일반적인 노동조합운동에서는 노동자의 사상에 대해 학습하고 선전하며 정치를 중심으로 조직해야 할 필요가 크게 느껴질 수 없다. '실태조사'를 통해 임금과 고용에 대한 불만을 수렴하고, 교섭 요구로 정식화하여 사장과 협상하는 것이 노동조합에서의 주요한 활동인 한 그렇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기서 학습하고 선전하는 것은 주로 동종업계의 임금수준이 얼마나 되는가, 노동조합 실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사장과 교섭하는 데에서 유념해야 할 노동법 조항들은 어떤 것인가 등으로 집중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여기서 조직되는 '단결과 투쟁' 또한 임금과 고용에 관한 요구를 중심으로 조합원 범위 내에서 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선진노동자 운동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선진노동자들은 임금과 고용을 둘러싼 투쟁을 결코 경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진노동자라면 임금과 고용을 둘러싼 경제적 투쟁에서도 최선두에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투쟁 속에서 동료 노동자들의 단결력과 투쟁의식을 드높이기 위해 분투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선진노동자들은 임금과 고용을 둘러싼 투쟁만으로는 노동자들이 결코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자본가들은 특정한 업체의 공장이나 매장, 사무실에서만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모든 공장, 매장, 사무실에서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가능케 하는 공장과 기계에 대한 자본가들의 배타적 소유권은 가진 자들의 법으로 보호받고 있다. 더욱이 그들의 대변자인 정부가 앞장서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탄압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통상적인 노동조합 투쟁들이 그런 것처럼 단지 특정 기업의 자본가만을 상대로 한 투쟁을 통해서는 노동자들이 근본적인 승리를 쟁취할 수 없다. 하나로 연합한 자본가들의 지배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야 역시 한 사업장에서의 임금과 고용이라는 경제적 조합적 수준을 뛰어넘어 정치적 전망과 투쟁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과거의 선진노동자 운동은, 비록 일정한 한계는 있었지만 노동조합 차원에 국한되지 않은 정치적 운동으로 과감하게 나아갔다.
이에 따라 선진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만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이윤의 비밀을 탐구하고 착취를 폐지할 수 있는 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고용안정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경제의 무정부적 혼란과 낭비를 종식시키고 합리적이며 계획적인 생산을 가능케 할 방법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이러한 의식을 갖고 있던 선진노동자들은 주위 동료들을 조직하는 데서도 단지 임금과 고용에 대한 불만을 중심으로 조직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중심으로, 즉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진정으로 끝장낼 수 있는 목표와 방법을 중심으로 조직하려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노동해방이라는 대의로 집약되는 새로운 세계관과 정치적 전망을 우선은 소수의 의식적인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점차 많은 수의 노동자들에게 정확히 알려주는 선전활동이 반드시 필요했다. 또한 이것이 가능하려면 우선 선진노동자들 자신이 새로운 세계관과 정치적 전망으로 확고히 무장해야만 했다. 책을 읽고 토론하는 방식으로든, 직접적인 투쟁 경험과 그 교훈을 의식적으로 소화하는 방식으로든 노동해방 사상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져야 했다(학습이란 절대로 책을 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선진노동자들은 그러한 과제에 충실했다. 다양한 경로로 노동자의 사상을 학습하고, 주위 동료들에게 선전하며, 그 정신으로 조직했다. 한국의 경우에도 비록 철저한 노동해방 정치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선진노동자들이 정치적 학습과 선전, 조직화 활동을 게을리 했다면 그만큼 노동운동의 등장과 진출은 늦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등장한지 불과 얼마 되지도 않아 이러한 흐름은 취약해지고 말았다. 구 소련을 포함한 동구권 국가들의 붕괴가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선진노동자들은 소련이나 동독 등이 지금의 중국이나 북한과 마찬가지로 전혀 노동해방 사회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선진노동자들은 구 소련 등의 붕괴를 바라보며 이제 모든 희망은 사라져버렸다고 믿었다. 기운이 빠진 이들은 덩달아 노동해방이라는 정치적 전망 또한 내던져버렸다. 극소수를 제외한 선진노동자들의 다수가 점차 "노동해방운동은 실패했다. 그것은 한낱 꿈에 불과했다"는 그릇된 믿음에 이끌려갔다.
노동해방이라는 정치적 전망을 상실하자, 이제 그 자리에는 이른바 '실리적'이고 '현실적'인 관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독립적인 선진노동자 정치운동은 해체되면서 노동자들의 대중적 운동은 통상적인 노동조합운동으로, 즉 오직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조합원들의 당장의 이익만을 좇는 조합주의 운동으로 귀결되어갔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경제위기와 맞물리면서 노동조합운동에서는 대중의 자생적 투쟁을 가로막고 타협과 굴종의 길로 유도하는 노조관료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노동해방운동이 실패했다는 '역사적 오해'에 의해 무장해제당한 선진노동자들은 노동조합운동의 개량주의화 경향에 강하게 저항할 수 없었다. 다른 대안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제 노동자대중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할 필요성도, 그것을 위해 노동해방 사상을 학습하고 선전할 필요성도 사라져버렸다.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는 말은 과거의 문구가 되었으며, 일종의 골동품 정도로 전락해버렸다.
후퇴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 학습하고 선전하고 조직해야 할 과제에 대한 인식이 희미해져간 과정은 거꾸로 선진노동자 운동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었다. 일부의 진지한 동지들은 현장 활동에 더 매진하는 방식으로 활로를 개척하려 했다. 그러나 일상적인 현장 활동과 현장투쟁 자체가 노동해방 정치의 공백을 대신 채워주지는 못했다. 게다가 노동해방 정치의 공백은 오랜 기간 계속 공백으로 남아 있을 수도 없으며, 반드시 '다른 정치'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투박한' 노동해방 정치 대신 '세련된' 개량주의, 조합주의 정치가 선진노동자들을 장악해나갔다. 한때 노동자투쟁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이들이 하나 둘씩 출세주의에 물든 노동관료가 되어갔다. 노동자의 대의를 좇는 것은 공허한 일이며, 당장의 눈앞의 이익을 좇는 것이 가장 뛰어난 현실감각의 표현인 것처럼 간주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이처럼 명확한 정치가 결여된 상태에서 이른바 '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것으로는 이런 흐름을 막아내는 데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노동해방의 사상은 한마디로 '죽은 개' 취급을 당했다. 결국 한국노동운동에서 의식적인 선진노동자 운동은 사실상 거의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이런 퇴보 흐름에 사로잡히지 않은 노동자계급의 젊은 층이 등장해 새로운 가능성을 던져 주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기존 노동조합의 젊은 전투적 노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80년대 말의 정치운동으로부터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구 소련 등의 몰락으로부터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 이들은 전적으로 새롭게 노동운동의 물줄기를 형성해나갈 수 있는 풍부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물론 전투성 자체만으로는 근본적인 노동해방 정치를 바로 획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전투적이고 비타협적인 성격은 이 나라 노동운동이 새로운 전진의 길을 뚫을 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새롭게 투쟁에 뛰어든 젊은 노동자들 역시 기존 노동운동의 역사가 창출해놓은 지반, 즉 민주노조운동의 쇠퇴가 가하는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기존의 노쇠한 조합주의 지도자들이 노동조합에서 결정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이들이 노동조합과 현장조직 등에서 젊은 노동자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젊은 노동자들은 노동해방을 향한 전망을 세우고 전진하기보다는 조합주의적인 압력 앞에 노출되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당장 노동조합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열악한 객관적 조건이 이들로 하여금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시야를 갖는 것을 방해했다. '당장의 절박한 투쟁'에서 물러설 수 없다는 점이 다른 모든 측면들보다 지나치게 우선시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전투성은 일단 경제적, 조합적 차원에서의 전투성으로 그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일부 '운동가들'이 그러한 경향을 부추기기도 했다. 이들은 비정규직 투쟁들이 체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불신하면서,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이익보다 당장의 부분적 이익을 얻어내는 것에 비정규직 투쟁을 묶어두는 경향을 보였다. 결국 조직된 노동조합의 젊은 전투적 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 투쟁들에서도 아직까지는 극소수의 노동자들만이 노동해방을 향한 근본적 지향을 선택하고 있다. 그 결과 과거의 패배주의적 정서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젊은 노동자층의 등장이 전체 노동운동에 진취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의 실현 또한 계속 지체되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우리가 한국노동운동의 쇠퇴를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면, 또한 수시로 위기를 거듭하며 노동대중의 삶을 파산상태로 내모는 이 체제를 숙명처럼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반드시 낡은 조합주의 운동과는 다른 새로운 노동운동을 건설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선진노동자들의 선도적인 노력을 통해 새로운 노동운동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고자 한다면 이제 다시 한 번 리프크네히트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되새겨야 한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하더라도 그의 가르침은 낡지 않았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당면한 과제를 파악하며, 그것을 주위의 동료들에게 널리 알리고, 함께 싸워나가자고 조직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진취적 활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질 때에만 우리는 새로운 전진을 위한 길을 열어나갈 수 있다. 리프크네히트는 지금도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