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결전위기, 1962년의 역사적 경험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글을 시작하며
2. 북(조선)의 핵실험은 실험이 아니다
3. 1962년에 폭발한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결전위기
3-1) 쿠바혁명정부에 집중된 제국주의적대정책의 공세
3-2) 사회주의체제를 옥죄려는 핵미사일 포위망
3-3) 미증유의 핵전쟁위기 속에서
3-4) 제국주의전쟁광들의 전쟁공포증
3-5) 현대수정주의자들의 일탈과 굴복
3-6) 제국주의전쟁광들의 음모와 피살
4. 글을 맺으며
1. 글을 시작하며
남(한국)의 진보정치세력에게 북(조선)의 핵실험은 시사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사상적 기준이다. 북(조선)의 핵실험을 인식하는 사상적 기준에 따라 한(조선)민족의 자주성에 대한 견해, 북(조선)의 자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가 분별된다.
사회주의는 악이고, 북(조선)은 ‘악의 축’이라고 외쳐대는 제국주의전쟁광들이 파놓은 혼동과 착각의 함정에 빠지면, 사회주의국가가 실시한 핵실험을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인식하지 못하고 일단 거부감부터 느끼게 된다. 무분별한 거부감 속에 젖어드는 것은 반핵교조주의와 공상적 평화주의이다.
그러나 북(조선)의 핵실험을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그때 비로소 산이 산으로 물이 물로 보이는 정세인식의 정상시력을 되찾아 핵실험의 진실을 만날 수 있다.
비록 사회주의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더라도, 사회주의국가가 실시한 핵실험을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것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합리적 태도를 저버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북(조선)의 핵실험 이후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결전위기가 시나브로 한(조선)민족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면서,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결전위기가 폭발하였던 1962년의 역사적 경험을 되짚어본다.
2. 북(조선)의 핵실험은 실험이 아니다
현실이 말해주는 대로, 북(조선)의 자주적 사회주의를 증오하는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표출하는 집단적 광기가 세상을 뒤덮어 버린 듯하다.
북(조선)의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겠다는 반동적 적개심에 사로잡힌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절대로 조미 직접대화를 재개하지 않겠고, 6자회담의 틀 안에서 조미 직접대화가 이루어진다 해도 협상(negotiate)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논의(discuss)하는 것뿐이며, 6자회담이 재개되더라도 북(조선)에 대한 제재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것은 정치협상에 대한 거부이다.
부쉬정부의 억지와 소동이 오죽 심했으면 전직 대통령들인 지미 카터(Jimmy Carter), 빌 클린턴(William J. Clinton)까지 나서서 조미 직접대화를 권고하였고, 연방의회는 부쉬에게 대북(조선)정책 조정관을 임명하여 조미 직접대화를 재개하라고 촉구하였으며, 국제사회에서도 조미 직접대화의 필요성을 지적하였건만,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그 모든 권고, 촉구, 지적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직접대화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조미 직접대화를 거부하는 까닭은, 직접대화가 불가피하게 조미관계를 정상화하는 정치협상으로 진전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조미관계 정상화를 거부하는 까닭은, 조미관계를 정상화하는 궤도에 들어서는 순간, 북(조선)의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자기들의 제국주의적대정책이 무너져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들이 제국주의적대정책에 매달리는 한, 직접대화나 관계정상화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추진하는 제국주의적대정책은, ‘핵우산’을 증강하는 북침전쟁준비를 다그치는 가운데 노무현정부를 대량확산방지구상(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에 끌어들여 남북(북남)을 무력충돌위험으로 끌어가는 중이다.
대량확산방지구상에 발을 들여놓은 노무현정부가 만일 한(조선)반도 주변해역에 해상무력을 출동시켜 북(조선)의 화물선을 강제로 검색하는 경우, 남북(북남)의 해상무력이 우발적으로 충돌하여 교전에 들어갈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노무현정부를 대량확산방지구상에 끌어들임으로써 1999년 6월 15일과 2002년 6월 29일에 일어났던 서해교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무력충돌의 위기를 조성하려고 획책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전쟁광들의 강요에 굴복한 노무현정부가 대량확산방지구상에 끌려간 뒤에 남북(북남) 사이에서 우발적으로 무력충돌이 일어나면, 제국주의전쟁광들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무력침공을 개시할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남북(북남)의 우발적 무력충돌은 제국주의침략전쟁을 일으키는 도화선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려고 날뛰는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우선 지역분쟁부터 유발시킨 뒤에 무력침공을 도발하는 것은 저들의 오랜 전쟁관습이 아닌가.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우선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지역분쟁을 유발시킨 뒤에, 곧바로 무력개입에 나서 이라크침략전쟁을 도발하였던 역사적 경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백악관과 국방부의 밀실에서는 저들의 오랜 전쟁관습에 따라 남북(북남)의 우발적 무력충돌을 유발하는 음흉한 전쟁시나리오가 작성되고 있는지 모른다.
이처럼 제재압박과 전쟁위협을 계속 밀어붙이면, 북(조선)이 겁을 집어먹고 정치적으로 굴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제국주의전쟁광들이 하였다면, 그것은 상황을 너무나 오판한 것이다.
그러나 오판 이후 시간이 너무 지나서, 때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오판하여 대결의 길을 선택하였으니, 그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오판을 거두어들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조미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정치협상을 거부하고, 북(조선)의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려고 날뛰는 제국주의전쟁광들에게 정치협상 재개와 정치합의 이행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인다.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정치협상을 거부한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자명하다.
그들이 정치협상을 거부한 뒤로, 남아있는 가능성은 사회주의와 제국주의의 적대적 모순이 격화되어 미증유의 대폭발이 일어나는 것밖에 없다.
이것은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최후결전(Armageddon)이 불가피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최후결전이란 북(조선)이 사회주의반제혁명의 대공세를 밀고 나갈 결정적인 시기를 뜻한다.
또한 남(한국)에서 투쟁하는 진보정치세력의 시각으로 보면, 그 최후결전은 남(한국)에서 민주주의혁명의 대공세를 밀고 나갈 결정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북(조선)은 제국주의전쟁광들과 최후결전을 벌이는 ‘사생결단의 판가리싸움’을 준비해왔다는 점을 이미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그러한 의지표명을 한낱 수식어쯤으로 여기는 것은, 제국주의전쟁광들과 최후결전을 벌이는 사회주의반제혁명의 결정적 시기에 대비하여 50년이 넘도록 간고분투의 길을 헤쳐온 북(조선)의 역사적 경험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일 것이다.
2008년 11월에 실시될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만일 민주당이 공화당을 누르고 집권하면 조미 직접대화가 재개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북(조선)이 그때까지 제재압박을 견디며 기다릴 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그러한 전망은 빗나간 것이다.
‘핵문제’를 둘러싸고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이 거듭된 지난 13년 동안 제국주의전쟁광들은 북(조선)과 정치적으로 합의한 여러 공약들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그 책임을 북(조선)에게 뒤집어씌우는 파렴치하고 악의적인 행동을 취해왔으므로, 북(조선)은 미국의 정권교체에 기대할 수 없음을 절감하였을 것이고, 제국주의전쟁광들의 공약파기를 용인하면서까지 제국주의제재압박을 무작정 연장해야 할 아무런 요구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이라는 견지에서 북(조선)의 핵실험을 바라보면, 그것은 핵실험으로 보이지 않는다.
미국, 영국, 프랑스 같은 제국주의국가가 실시한 핵실험은 말 그대로 실험(test)이지만, 또한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제국주의와 대결하지 않는 나라가 실시한 핵실험 역시 실험이지만, 제국주의와 맞붙는 결전에 나선 북(조선)이 실시한 핵실험은 실험이 아니라 공세이다. 평범한 뜻으로 말하는 공세가 아니라, 핵몽둥이를 부르쥐고 한(조선)민족을 50년 동안이나 괴롭혀온 제국주의전쟁광들에게 직격탄을 날려버린 대공세(great offensive)이다.
그래서 나는 핵실험 대공세라고 표현한다.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북(조선)의 핵실험 대공세는 사회주의반제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공세임이 명백하다. 사회주의국가인 북(조선)이 핵실험이라는 거창한 사변을 사회주의반제혁명과 무관하게 일으킬 리는 절대로 없다.
북(조선)이 핵실험을 통해서 추구하는 사회주의반제혁명의 과업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사회주의반제혁명의 당면과업, 곧 반제국주의민족해방의 과업이다.
그것은 ‘한미동맹’이라는 위장명칭을 달아놓은 신식민주의체제를 통해 남(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지배, 수탈하고, ‘핵우산’이라는 이름의 위험천만한 제국주의전쟁체제를 가동하여 북(조선)의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과 정면으로 대결하여 그들을 굴복시킨다는 뜻에서,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반제국주의민족해방의 과업인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내가 이전에 발표한 글들에서 논하였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반제혁명은 조미 두 나라 외교관들이 회담장에서 벌이는 외교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반제혁명은 생사존망의 위기를 넘나드는 결전을 요구한다.
북(조선)이 핵실험 대공세를 통해서 사회주의반제혁명을 한층 더 진공적으로 밀고 나가기 시작하였으므로, 한(조선)반도의 정세는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최후결전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되었다.
핵실험 이전의 상황과 그 이후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핵실험이라는 혁명적 대공세를 개시한 북(조선)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도 북(조선)에게 양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현 정세는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최후결전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최후결전이 앞으로 1년 안에 일어날지, 혹은 3년 뒤에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정치적으로 굴복하지 않는 한 최후결전의 결정적 시기는 다가올 것이다.
최후결전이라는 말은 무력충돌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북(조선)의 핵무장과 미국의 ‘핵우산’이 충돌할 것이므로, 최후결전은 재래식 무력충돌이 아니라 비재래식 무력충돌, 곧 조미 두 나라가 핵교전을 주고받을 가능성까지 내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조미 핵교전의 폭발이란, 그 폭발이 실제로 일어나기까지 거치게 되는 복잡한 과정을 생략한 채 논하는 이론적 가능성이다.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최후결전이 핵전쟁위기로 전화될 수 있지만, 핵전쟁위기의 조성이 곧 핵교전의 폭발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핵교전 가능성을 파악하려면, 추상적 관념을 논하는 것보다 지난 냉전시기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결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역사적 경험을 분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3. 1962년에 폭발한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결전위기
1962년 10월 14일부터 30일까지 폭발하였던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결전위기를 흔히 쿠바 미사일위기라고 부른다.
하나의 역사적 경험에 대해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쿠바 미사일위기(Cuban Missile Crisis)라 부르고, 소련은 카리브해의 위기(Caribbean Crisis)라 부르고, 쿠바는 10월 위기(October Crisis)라 부른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부르는 대로 적는다.
쿠바혁명정부를 무너뜨리고 소련의 사회주의체제를 옥죄려는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제국주의적대정책과 제국주의핵공격력 증강을 광란적으로 밀고 나간 것이 쿠바 미사일위기가 발생한 원인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조선)반도에서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이 일어난 원인과 일맥상통한다. 44년 전에 일어났던 쿠바 미사일위기의 역사적 경험에 주목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된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결전위기는,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고 하였기 때문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결전위기가 폭발하게 된 근본원인은,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민주주의혁명의 전진과 사회주의적 발전을 가로막아 나섰다는데 있다.
당시 민주주의혁명의 세찬 물결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로 퍼져나가는 가운데, 라틴아메리카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혁명이 승리하여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운 쿠바는 라틴아메리카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혁명기지로 인식되었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이른바 ‘미국의 앞마당’이라 불러온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혁명이 확산되는 것을 결코 내버려둘 수 없었다.
3-1) 쿠바혁명정부에 집중된 제국주의적대정책의 공세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생 쿠바혁명정부를 무너뜨리려고 날뛰었다. 오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북(조선)의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려고 날뛰는 것처럼, 지난날에도 그들은 쿠바혁명정부를 봉쇄와 침공으로 무너뜨리려고 날뛰었다.
쿠바의 민주주의혁명이 승리한 직후인 1960년 3월 17일 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는 쿠바혁명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중앙정보국(CIA)의 비밀작전을 승인하였다. 그것이 ‘자파타 작전(Operation Zapata)’이다. 그 작전을 앞장서서 이끌었던 주동자는 당시 부통령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1913-1994)이었다. 중앙정보국은 쿠바에서 민주주의혁명을 반대하다가 도망쳐 나온 반동세력을 과테말라의 산악지대와 플로리다 남부지역으로 끌고 다니면서 쿠바를 침공하기 위한 군사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하였다.
1953년 이란의 민족주의자 모하메드 모싸데(Mohammed Mossadegh, 1882-1967)가 수상으로 집권한 민족주의정권을 그 정권이 세워진지 3년만에 ‘티피 어잭스 작전(Operation TP-AJAX)’으로 무너뜨리고, 1954년에는 과테말라의 사회주의자 하코보 아르벤즈(Jacobo Arbenz, 1913-1971)가 대통령으로 집권한 자주적 민주정권을 그 정권이 세워진지 3년만에 ‘피비 썩쎄스 작전(Operation PB-SUCCESS)’으로 무너뜨린 경험이 있는 중앙정보국은, 세워진 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는 쿠바혁명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고 타산하였다.
1960년 11월 8일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상대후보였던 리처드 닉슨을 근소한 표차로 이기고, 1961년 1월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어 백악관을 차지한 존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는 ‘자파타 작전’을 계속 밀어붙였다. 쿠바의 민주주의혁명을 파괴하려는 침공작전은 그로부터 석 달 뒤에 개시되었다.
1961년 4월 17일 쿠바 공군기로 위장한 미국군 폭격기 세 대가 쿠바공군기지와 수도 아바나(Havana)의 국제공항을 불시에 공습하는 것으로 쿠바침공작전에 불이 붙었다.
이것이 세계사에 ‘피그만 침공사건’으로 기록된 제국주의무력침공의 시작이다.
그러나 쿠바혁명정부는 미국군의 폭격을 예상하여 항공기를 미리 대피시켰으므로 공습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선제공습이 개시되는 것과 함께, 침공병력 1천511명은 2천400t급 수송함 네 척에 나누어 타고 쿠바 남부의 피그만(Bay of Pigs)에 상륙하였다. 원래 중앙정보국은 침공작전이 개시되면, 쿠바 안에서 날뛰던 반동세력이 내란을 일으켜 공조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혁명적 쿠바인민들은 혁명정부를 보위하기 위한 방어전에 나섰다. 그것만이 아니라, 나중에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쿠바혁명정부의 정보기관이 쿠바의 반동단체들에 침투시킨 공작원들은 거짓 정보를 중앙정보국에게 보고하여 전략적 판단을 교란하였고, 쿠바혁명정부는 무력침공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정보전(information warfare)에서 참패하였던 것이다.
쿠바의 반동세력은 침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해병대 병력을 긴급히 파병하여 전세를 뒤집어줄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쿠바와 전면전을 벌이는 경우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한 케네디는 해병대를 파병하지 못하였다.
치열한 전투는 4월 21일까지 계속되었다. 쿠바에 들이닥친 침공무력은 혁명적 쿠바인민의 지원을 받은 쿠바혁명군(Cuban Revolutionary Armed Forces, FAR)의 반격으로 완전히 궤멸되었다. 침공병력 가운데 104명이 죽고, 1천209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쿠바혁명군 사상자는 2천여 명이었다. 포로들 가운데 몇몇 주범은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나머지는 30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때부터 쿠바는 ‘국방의 날’을 정하고 전체 인민이 참가하는 군사훈련을 해마다 실시해오고 있다.
쿠바혁명정부는 방어전을 승리로 결속한 뒤 스무 달 동안 미국과 협상한 끝에 1962년 12월 21일 5천300만 달러에 이르는 식량과 의약품을 받는 조건으로 포로들을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12월 29일 케네디는 플로리다 팜비치(Palm Beach)에 가서 송환포로들을 만났다.
쿠바침공작전을 지휘하였던 중앙정보국 국장 앨런 덜레스(Allen W. Dulles, 1893-1969), 부국장 찰스 케이블(Charles Cabell, 1903-1971), 작전국장 리처드 비쓸 2세 (Richard M. Bissell, Jr., 1910-1994)는 쿠바침공작전의 실패에 책임을 지고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반면에, 쿠바인민들은 더욱 단결하여 쿠바혁명정부의 사회주의정책을 지지, 옹호하게 되었고, 쿠바 민주주의혁명의 사회주의적 전진은 라틴아메리카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신심과 열망을 안겨주었다. 쿠바혁명정부는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승리하였고,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참패하였다.
1961년 5월 1일,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의장은 세계노동절에 행한 연설에서 쿠바가 사회주의공화국임을 선포하였고, 곧이어 쿠바혁명정부는 미국에게 관계를 정상화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쿠바침공작전의 참패로 앙심을 품은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그 제안을 거부하였다. 그들에게는 쿠바혁명정부를 무너뜨리려는 반동적 적개심만 끓어올랐다.
케네디는 합동참모본부에게 쿠바침공작전의 참패를 만회하기 위한 새로운 침공작전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61년 7월 26일 미국 중앙정보국이 쿠바혁명정부 수뇌부를 암살하려는 기도가 실패로 돌아갔는데, 나중에 기밀해제된 자료에 따르면, 저들의 암살기도가 성공하는 경우,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쿠바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하려고 계획하였다고 한다.
저들의 새로운 무력침공작전은 두 갈래로 작성되었다.
첫째, 쿠바의 반미테러조직으로 위장한 미국의 특수전 병력이 미국의 대도시에서 여객기를 공중납치하여 관타나모만(Guantanamo Bay)의 미국 해군기지를 파괴한 다음, 쿠바혁명정부가 테러공격을 가한 것처럼 조작하여 군사적 보복을 선동하고, 곧바로 쿠바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한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이 쿠바와 인접국 사이에서 무력충돌을 유발시키고 지역분쟁을 해결한다는 구실로 쿠바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언론인 제임스 뱀포드(James Bamford)가 2001년에 펴낸 책 『비밀의 동체(Body of Secrets)』, 그리고 래마 월드론(Lamar Waldron)이 2005년에 펴낸 책 『마지막 희생(Ultimate Sacrifice)』에 따르면, 당시 미국군 합동참모본부 의장 라이먼 렘니처(Lyman L. Lemnitzer, 1899-1988)가 승인한 쿠바침공작전은 ’놀스우즈 작전(Operation Northwoods)‘이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군부의 ‘놀스우즈 작전’을 승인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중앙정보국에게 지시를 내려 별도의 침공작전을 계획하였다.
1961년 8월 17일 미주기구(OAS) 정상회담이 열린 우르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Punta del Este)에서 쿠바혁명정부를 대표하여 회담에 참석한 라틴아메리카의 전설적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는 케네디의 특별보좌관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쿠바가 소련과 맺은 동맹을 포기하고, 쿠바혁명정부가 무상몰수하여 국유화한 미국 자산을 변상하며, 라틴아메리카혁명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는 문제를 검토할 터이니, 그에 상응하여 미국은 쿠바혁명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제국주의적대정책을 포기하라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침공야욕에 사로잡힌 전쟁광신자들은 게바라의 제안을 걷어차버렸다.
1961년 11월 30일 케네디는 법무부 장관인 자기 동생 로벗 케네디(Robert F. Kennedy, 1925-1968)가 정치적으로 지도하고, 중앙정보국에 배속된 현역 육군준장 에드워드 랜스데일(Edward G. Lansdale, 1908-1987)이 지휘하는 침공작전을 승인하였다. 그 작전이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이다.
1962년 3월 14일 미국 육군참모총장 맥스웰 테일러(Maxwell D. Taylor, 1901-1987)가 ‘몽구스 작전’의 실행계획을 확정하고, 이틀 뒤에 케네디에게 보고하였다. 그 실행계획의 주요내용은 쿠바의 반동세력을 앞세워 내란을 일으킨 뒤에, 혼란을 틈타서 미국군이 전면적인 무력침공(full scale invasion)을 가해 쿠바혁명정부를 무너뜨린다는 것이었다.
1962년 5월 8일부터 18일까지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쿠바혁명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침공작전연습에 열을 올렸다. 침공작전연습은 마지막 날인 5월 18일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발사하는 이른바 ‘채찍질 작전(Operation Whip Lash)’을 연습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1962년 9월 하순 미국 전술공군사령부(TAC)는 쿠바에 대한 지상군 침공작전에 앞서 기습적인 공중타격의 실행계획을 준비하는 실무단을 내왔다. 9월 20일에는 미국 연방상원이 쿠바에 대한 무력사용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연방하원은 쿠바와 교역하는 제3국에게 미국의 경제원조를 중단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쿠바에 대한 제국주의무력침공이 모든 준비를 마쳤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1962년 10월 1일 미국 국방장관 로벗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는 대서양군사령부 사령관 해군제독 로벗 데니슨(Robert L. Dennison, 1901-1980)에게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작전을 준비하도록 명령하였다. 그에 따라 대서양군사령부 예하 공군력과 해군력은 해상봉쇄작전을 개시할 출동태세에 돌입하였다.
이처럼 쿠바혁명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침공작전계획을 세워놓고 실전연습까지 실시하도록 명령을 내렸으면서도 케네디는 1962년 8월 29일 백악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나는 지금 쿠바를 침공하려고 하지 않는다(I'm not for invading Cuba at this time.)”는 거짓말을 얼굴빛 하나 달라지지 않고 늘어놓았다.
오늘 부쉬가 북(조선)의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북침전쟁계획을 세워놓고 실전연습까지 실시하면서도, 언론 앞에서는 미국이 북(조선)을 침공하거나 공격할 의도가 없다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과 40여 년 전 케네디가 거짓말을 늘어놓았던 것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세상을 거짓말로 속이려는 추악한 사기극과 반동적 기만전술은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에게 아주 오래된 전통으로 굳어져있다.
3-2) 사회주의체제를 옥죄려는 핵미사일 포위망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소련을 겨냥한 제국주의핵공격력을 증강하면서 압박하였다. 오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북(조선)의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제국주의핵공격력을 계속 증강하면서 압박하는 것처럼, 당시에는 소련에 대해서 그러하였다.
1962년 4월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소련의 인접국인 터기에 중거리 이동식 미사일(IRBM) 15기를 작전배치하였다. 주피터(PGM-19 Jupiter)라는 이름을 가진 그 미사일에는 히로시마 상공에서 폭발하였던 핵폭탄의 파괴력보다 97배나 강한 폭발력을 가진, 1.45 메가톤급 핵탄두가 장착되어 있었다. 그 미사일은 케네디가 발사명령만 내리면 불을 뿜고 날아가 소련인민 100만 명을 한꺼번에 몰살시킬 수 있는 전략핵미사일이었다.
1962년 4월 하순, 흑해 크리미아반도(Crimean Peninsula)에서 휴가를 즐기던 소련공산당 서기장 후르시쵸프(Nikita S. Khurshchev, 1894-1971)는 수평선 넘어 터기의 미국군기지에 배치된 핵미사일들이 소련을 노리고 있음을 생각하였다. 당시 소련이 보유한 미사일 가운데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겨우 10-15 기밖에 되지 않았던 것에 비해서, 미국은 소련의 인접국들에 수많은 핵미사일기지를 건설하면서 사방에서 악착스럽게 핵미사일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터키만이 아니라 남(한국), 일본, 대만, 이탈리아에 핵미사일기지를 배치하였던 것이다. 사회주의체제를 겨냥한 제국주의핵공격력을 흔히 ‘핵우산’이라 부른다.
흑해의 수평선을 응시하던 후르시쵸프는 미국 플로리다 키웨스트(Key West)에서 9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쿠바에 소련의 핵미사일을 배치함으로써 미국의 핵미사일 포위망에 파열구를 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모스크바로 돌아간 후르시쵸프는 소련공산당 지도자들과 소련군 고위지휘관들과 쿠바에 미사일기지를 건설하는 방안을 토의한 끝에, 쿠바혁명정부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추진한다는 결정을 보았다. 제국주의전쟁광들의 무력침공이 임박하였음을 직감한 쿠바혁명정부는 쿠바 영토에 소련의 핵미사일기지를 건설하려는 소련의 제안에 동의를 표시하였다.
그리하여 1962년 9월 8일과 15일 소련 화물선들이 쿠바항구에 도착하였다. 그 화물선들에는 쿠바에 배치할 준중거리미사일(MRBM)이 실려있었다. 소련이 쿠바에 배치하려는 준중거리미사일은 미국 남부의 도시들을 사정권에 둘 수 있었다. 소련은 준중거리미사일에 전술핵탄두 약 100 기를 장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기지를 건설하려는 근본목적이 쿠바혁명정부를 제국주의무력침공으로부터 보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련을 옥죄려는 미국의 핵미사일 포위망에 파열구를 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소련은 자국의 안보이익에 따라 행동하였으므로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이 격화된 결정적 순간에 쿠바혁명정부에 대한 국제주의보위공약을 저버리게 된다.
1962년 8월 26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체 게바라가 후르시쵸프에게 쿠바에 미사일기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라고 요구하였을 때, 후르시쵸프는 그 요구를 거부하였다. 쿠바에 미사일기지를 건설하는 문제에 대해서 체 게바라는 후르시쵸프에게 당당할 것을 주문하였으나, 후르시쵸프는 체 게바라의 주문을 외면할 만큼 비겁하였다.
쿠바 상공에 정찰기를 띄워놓고 집중적으로 감시, 정찰하는 미국이 쿠바 각지에서 시작된 미사일기지 건설공사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케네디의 입에서 마침내 도발적인 위협발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쿠바에 공격무기가 배치되는 것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겠다고 협박하면서, 미국이 관타나모만에 해군기지를 배치한 것이 말해주듯, 쿠바 영토에 외국군을 배치하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이처럼 쿠바의 자주권을 부정하면서 쿠바혁명정부를 모독하고 협박하는 폭언과 악담을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내뱉고 있었다.
3-3) 미증유의 핵전쟁위기 속에서
1959년 후르시쵸프는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회의장소로 사용해온 워싱턴 부근 메릴랜드주의 캠프 데이빗(Camp David)을 찾아가 아이젠하워와 밀담을 즐겼다. 불과 여섯 해 전에 한국(조선)전쟁에서 교전하였던 사회주의 소련과 제국주의 미국은, 놀랍게도 자기들이 언제 적대관계에 있었느냐는 듯이 급속도로 친숙해지고 있었다.
그러한 정세변화가 일어난 까닭은, 소련공산당 지도부가 사회주의반제혁명에서 일탈하고 현대수정주의에 중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이 타계한 뒤, 라브렌티 베리야(Lavrenty P. Beria, 1899-1953)가 ‘둥글둥글하게 생긴 바보(moon-faced idiot)’라고 멸시하던 흐르시쵸프는 베리야와 맞붙은 권력투쟁에서 이겨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후르시쵸프는 사회주의반제혁명에서 일탈하고 제국주의전쟁광들과 평화적으로 공존하려고 하였다. 사회주의운동사에서는 그것을 현대수정주의의 평화공존정책이라 부른다.
소련공산당의 평화공존정책은 사회주의반제혁명에서 일탈하고, 제국주의와의 평화적 공존, 평화적 경쟁, 평화적 협력을 추구하는 현대수정주의노선의 직접적 산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사회주의반제혁명에서 일탈하고 제국주의전쟁광들과 평화적으로 공존하려던 모스크바의 현대수정주의자들이 어떻게 해서 제국주의와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었을까?
제국주의와의 평화공존을 외쳐대던 모스크바의 현대수정주의자들이 역설적으로 제국주의와 대결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소련의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가해오는 전쟁위험이 너무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962년 9월 미일동맹군은 미국 태평양군사령관의 지휘에 따라 ‘높은 언덕-2(High Hill-II)'라는 이름의 핵전쟁훈련을 실시하였다.
쿠바 미사일위기는 소련의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려고 덤벼든 제국주의전쟁광들과 평화적으로 공존하겠다는 현대수정주의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1962년 10월 14일. 세계사는 이날 쿠바 미사일위기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소련의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에 의해서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은 결국 가장 위태로운 지경으로 다가서고 말았다.
그날, 백악관 집무실에 있는 케네디의 책상 위에는 이틀 전에 쿠바 상공을 정찰하였던 미국군 정찰기 유(U)-2가 촬영해온 첩보자료를 분석한 정보보고서가 놓여있었다.
그 보고서에는 소련이 쿠바 곳곳에서 미사일기지를 세우고 있다는 사실이 적혀있었다.
백악관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한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쿠바의 미사일기지 건설현장을 외과수술식 타격(surgical strike)으로 파괴하는 것부터 전면적 침략전쟁을 도발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무력침공방안을 놓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자리에서 법무부 장관 로벗 케네디가 “도죠(東條英機, 1884-1948)가 진주만 공격을 준비할 때 무엇을 느꼈는지 이제 알겠다”고 뇌까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62년 10월 16일 미국의 유도무기 및 우주항행 정보위원회(GMAIC)는 쿠바에서 공사 중인 미사일기지들에는 아직 핵탄두가 배치되지 않았다는 정보보고를 제출하였고, 10월 19일 케네디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는 경우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10월 18일 케네디는 백악관을 방문한 소련외무상 안드레이 그로미코(Andrei A. Gromyko, 1909-1989)와 회담하면서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로미코는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음을 부인하였다.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는 것을 부인하는 소련의 태도에 노여움을 느낀 케네디는 10월 20일 쿠바를 봉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카리브해에 떠있는 조그만 섬 쿠바에 배 한 척도, 항공기 한 대도 들고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는 그야말로 전면적 차단(full quarantine)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튿날인 10월 21일 미국의 배후조종을 받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에 협력하지 않는 모든 선박들이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검색명령을 받게 될 것이며, 검색명령에 불응하는 선박에는 발포할 것이라는 협박선언을 내놓았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막 뒤에서 정치공작을 벌여 북(조선)에게 집단적 제재를 가하는 결의안을 채택해놓고, 이른바 확산방지구상(PSI)을 통해 집단적인 해상봉쇄를 강행하려고 날뛰는 오늘의 현실은, 40여 년 전 그들의 선배들이 쿠바혁명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자행하였던 집단적 해상봉쇄와 어쩌면 그렇게도 흡사한가.
1962년 10월 22일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경계태세돌입명령(DEFCON-3)’을 발동하였다. 그에 따라 전 세계에 배치된 미국군은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제국주의무력침공에 가장 먼저 동원되는 것은 공중무력이므로, 여러 대의 비(B)-52 전략폭격기, 183대의 비(B)-47 전략폭격기, 161대의 각종 군용기가 발진태세에 들어갔다.
전략폭격기 폭탄창에는 쿠바인민을 몰살시킬 핵폭탄이 가득 실려있었다.
쿠바에서 가까운 섬 푸에토리코(Puerto Rico)에 있는 미국군 미사일기지도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미국군 지상군 5개 사단과 해군군함 183척도 출동준비를 갖추었다.
스페인에게 정복된 이후 수백 년 동안 착취와 억압으로 짓눌려오던 라틴아메리카에 역사상 처음으로 세워진 자주적 민주정부를 무력침공으로 파괴하려는 위기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쿠바혁명은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최후의 결사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제국주의전쟁광들이 ‘경계태세돌입명령’을 발동하던 날, 쿠바혁명정부는 전군, 전민에게 결사전을 벌이기 위한 전투동원태세를 명령하였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10월 23일부터 일부러 저공으로 비행하는 정찰기를 쿠바 영공에 들이밀면서 쿠바혁명군이 먼저 정찰기를 공격해오기를 유도하였다. 그러한 도발유도비행으로 쿠바 영공을 침범한 사건은 11월 15일까지 158차례나 거듭되었다.
케네디는 광란적인 무력침공준비를 끝마친 10월 23일, 후르시쵸프에게 보낸 개인편지에서 쿠바에 건설 중인 미사일기지를 철수하라는 일방적인 요구를 들이대었다.
후르시쵸프가 케네디의 개인편지를 최후통첩으로 여기고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었던 10월 24일 제국주의전쟁광들은 ‘경계태세돌입명령(DEFCON-3)’을 ‘전투태세돌입명령(DEFCON-2)’으로 한 단계 높였다.
미국의 제국주의전쟁사에서 ‘전투태세돌입명령’을 발동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미국은 ‘전투태세돌입명령’을 발동한 적이 없다.
1976년 8월 판문점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경계태세돌입명령’을 발동하였다.
그러한 일련의 행동은 소련군의 전의를 꺾어보려는 의도적인 무력위협이 분명하였다.
10월 25일 미국 해군 항공모함 에쎅스호(USS Essex)와 구축함 기어링호(USS Gearing)가 쿠바를 향해 다가오는 소련 유조선을 가로막기 위해서 출동하였다. 그러나 소련 유조선은 정해진 항로에 따라 쿠바를 향해 항해를 계속하였다.
10월 26일 백악관 밀실에서 무력침공음모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작전회의를 주재한 케네디는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만으로는 소련이 미사일을 철수하지 않을 것이므로 더 강한 무력위협을 들이대야 한다고 말하면서, 하루에 두 차례씩 쿠바 영공을 침범해오던 저공침투비행을 두 시간마다 한 차례씩 침범하라고 명령하고, 쿠바침공 이후 새로운 정부를 세울 준비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였다. 그에 따라, 미국 공군지휘부는 쿠바 공습명령이 떨어지면 일차적으로 폭격할 1천190개의 폭격대상을 선정하였다.
피델 카스트로 의장은 쿠바혁명군에게 쿠바 영공을 침범하는 적기를 격추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놀란 쿠바 주재 소련대사는 격추명령을 철회해줄 것을 긴급히 요청하였으나, 카스트로 의장은 제국주의무력침공이 임박하였으므로 자기의 조국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였다.
10월 27일 격추명령을 받은 쿠바혁명군은 지대공미사일을 발사하여 유(U)-2기 한 대를 격추하였다.
미국 정찰기 유(U)-2기는 공습목표물에 대한 정찰비행을 하기 위해서 쿠바 영공을 계속 침범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군과의 전면전을 두려워한 쿠바 주둔 소련군은 지대공미사일에서 축전지를 떼어내 미사일이 발사되지 못하도록 저지하였다.
지대공미사일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쿠바혁명군은 37mm 대공화기와 개인화기로 미국군의 저공정찰기를 공격하였고, 피격 당한 정찰기는 추락을 간신히 면한 채 달아났다.
이처럼 제국주의전쟁위협이 극에 이른 조건에서 쿠바혁명군이 정찰기를 격추시킨 것은, 결사전의 각오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3-4) 제국주의전쟁광들의 전쟁공포증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0월 27일, 쿠바혁명군이 지대공미사일로 유(U)-2를 격추하였다는 전황보고를 받고 미국군 합동참보본부는 격노하였고,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백악관으로 달려가서 케네디에게 공격명령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케네디는 무력침공에 관한 최종결정을 뒤로 미루었다.
그처럼 급박한 순간에, 케네디가 쿠바 공격명령을 선뜻 내리지 못하고 뒤로 미룬 까닭은,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전쟁공포증이 그의 뒷덜미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명백하게도, 그는 쿠바와 전면전을 벌일 경우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워싱턴이 소련의 핵공격으로 파괴되지나 않을까 하는 전쟁공포증을 느끼고 있었다.
핵무기를 휘두르며 침략전쟁에 광분하는 제국주의전쟁광들에게는 전쟁공포증 같은 것이 없을 것 같지만, 그런 선입관과 달리 그들이 전쟁공포증에 사로잡혔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쟁상대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무력을 가졌으면서도 자기들이 쉽사리 이길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전쟁을 두려워하는 전쟁공포증, 바로 이것이 제국주의전쟁광들의 공격심리를 마비시키는 결정적인 약점이다. 그러한 약점을 가졌기에 그들은 핵전쟁위협으로 난동을 벌이지만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에서는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
당시 미국은 2만7천100 기의 핵무기를 보유하였고, 소련은 3천100 기의 핵무기를 보유하였다. 핵무기 보유량을 보면, 미국이 소련보다 8.7배나 많은 핵무기를 갖고 있었지만 그러한 수량적 격차는 전쟁승패를 결정하는 데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만일 소련이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실어 발사한 핵탄두가 단 한 발이라도 제국주의전쟁광들의 머리 위에서 폭발한다면 그들 자신부터 소멸 당할 판이었다. 전쟁을 눈앞에 둔 순간에 구차하게, 그리고 비열하게 자기 목숨부터 생각하는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전쟁공포증에 사로잡히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쿠바혁명군과 혁명적 쿠바인민에게는 그러한 전쟁공포증이 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전사에게서는 적탄이 빗발치는 전선에 온몸을 던지는 무한대의 용맹과 투지가 용솟음치나니, 혁명의 총을 억세게 틀어쥔 쿠바혁명군과 혁명적 쿠바인민의 심장에는 제국주의전쟁광들의 무력침공에 맞서 쿠바 땅에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려는 비장한 각오가 어려있었다.
제국주의침략군에 비해서 비록 무장력은 빈약하더라도, 자기의 사회주의조국을 자기 생명보다 더 아끼고 사랑하는 뜨거운 심장, 그리하여 혁명이 요구할 때 목숨을 바치는 것을 최상의 영예로 믿는 항전의지, 바로 이것이 사회주의혁명무력을 무비의 영웅적 전투로 힘있게 떠밀어주는 결정적인 강점이다. 그러한 강점을 가졌기에 그들은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에서 최후승리를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스물 여섯 살 나던 해, 해군 어뢰정을 타고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였던 케네디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1943년 8월 2일 솔로몬제도(Solomon Islands) 앞바다에 나타난 일본 해군 구축함과 맞붙은 해상전투에서 전쟁이 무엇인지를 체험하였던 그는 쿠바혁명군이 가진 강점이 무엇인지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겉으로는 핵공갈을 내지르면서 방대한 침공무력을 쿠바 앞바다에 집결시키고 전쟁위협에 날뛰었지만, 뒤에서는 비밀협상에 매달리면서 전면전을 피할 궁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밀협상이란 소련이 쿠바에 배치한 미사일을 철수하는 것에 상응하여 미국은 터키에 배치한 미사일을 철수하는 정치적 타협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기밀해제된 자료에 따르면, 미국 국무장관 딘 러스크(D. Dean Rusk, 1909-1994)는 1962년 10월 24일자 비밀전문에서 미국이 터키에 배치한 미사일을 철수할 것임을 터키주재 미국대사에게 통보하였다. 이것은 ‘경계태세돌입명령’을 ‘전투태세돌입명령’으로 한 단계 높이면서 전쟁위협을 극대화하였던 10월 24일 이전에, 벌써 제국주의전쟁광들은 미사일 상호철수라는 방식으로 전면전을 피하려는 정치적 결정을 내렸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결전위기에 어떻게 대처하였는지를 알아보려면, 전쟁위기가 최고조에 이른 10월 27일에 드러난 케네디의 행적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기밀해제된 자료들을 뒤져보면, 두 가지 행적이 돋보인다.
첫째, 10월 27일 케네디는 공격명령을 내려달라는 합동참모본부의 요청에 대한 최종결정을 뒤로 미루고 나서, 자기 동생 로벗 케네디를 앞세워 비밀협상을 벌였다.
로벗 케네디는 워싱턴주재 소련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Anatoly F. Dobrynin)을 법무부에 있는 자기 집무실로 불러들여 쿠바에 배치한 미사일을 철수하겠다는 의사를 내일까지 밝히라고 요구하면서,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미국이 그 미사일을 제거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그와 더불어, 그는 소련이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 미국은 쿠바에 대한 불가침을 공약하고, 터키에서 미사일을 철수하겠다는 정치적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날 비밀협상에서는 소련의 미사일 철수와 미국의 미사일 철수를 맞바꾸는 정치적 타협이 일종의 밀약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비밀협상에서 로벗 케네디가 정작 신경을 날카롭게 쓰면서 강조한 것은 미사일 상호철수라는 타협안 그 자체가 아니라, 터키에서 미사일을 철수하려는 케네디의 결정을 절대비밀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케네디는 소련과 밀약형태로 합의한 정치적 타협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는 미국이 터키에서 미사일을 철수하는 것은 숨기고, 소련이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는 것만 언론이 대서특필하도록 하여 소련이 항복하고 미국이 승리했다는 식으로 여론을 조작하라고 지시하고, 자기 심복을 내세워 거짓정보를 언론에 흘려주었다.
만일 소련의 미사일 철수와 미국의 미사일 철수를 맞바꾸는 밀약형태로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소련의 정치적 항복을 받아낸 제국주의전쟁광들의 ‘강대한 신화’가 손상될 것으로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1992년 10월 미국 중앙정보국 본부에서 열린 ‘쿠바 미사일위기에 관한 토론회’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전쟁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10월 27일 케네디는 어떤 여배우와 전화통화로 밀애를 나누었으며, 네바다주 라스베가스(Las Vegas)에 있는 자신의 친척인 영화배우와 전화통화를 하였다. 케네디와 여배우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1962)의 내연관계는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먼로가 자기 집에서 시체로 발견된 때가 1962년 8월 5일이었으므로, 10월 27일 케네디는 또 다른 여배우와 내연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케네디의 사생활에 관한 정보가 아니다.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결전위기가 폭발한 때 그가 어떤 정신상태에 있었는지를 뚜렷이 드러내주는 자료이다.
자본주의언론시장에서 떠도는 말로 ‘도덕적 해이’라고 부르는 부패와 타락은,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에서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사상적으로 패배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결전은 불과 불이 부딪치는 치열한 무력전으로 전화되기 이전에 우선 사상 대 사상이 부딪치는 치열한 사상전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결전이 가지는 특성은 그것이 사상의 대결, 곧 사상전이라는 데 있다.
사회주의반제혁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사회주의의 대결을 군사모험주의(military adventurism)라고 왜곡하지만,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사상전, 투지전, 담력전이다.
쿠바혁명의 결사전을 각오한 피델 카스트로가 최후결전을 진두에서 지휘하면서 혁명군사령부의 작전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을 때, 여배우와 밀애를 나누었던 케네디가 보여준 너무도 극적인 대조는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결전위기 속에서 맞붙은 사상전에서 누가 승리하였는가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최후결전에서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이 사상전에서 패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전쟁광들이 떠드는 군사개념에는 사상전이라는 말 자체가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기껏해야 심리전(psychological warfare)이라는 군사개념만 알고 있을 뿐이다.
자기의 사회주의조국을 위해 기꺼이 피를 흘리려는 결사전의 각오는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이기주의(egoism)라는 낡은 사상의 껍데기를 깨버린 전사들을 집단주의(collectivism)라는 새로운 정신세계로 이끌어준다.
그 정신세계에서 사회주의혁명무력은 사회주의와 그 미래를 지키는 사상의 무기를 움켜쥐는 것이다. 사회주의혁명무력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점에서, 사상의 무기는 핵무기의 위력보다 더 강하다.
사회주의10월혁명의 붉은 기가 내려질 때, 소련군에게는 수 천 기의 핵무기와 방대한 첨단무력이 있었지만, 정작 그들에게 절대로 없어서는 아니 될 사상의 무기는 없었다.
사상의 무기가 없었던 소련군이 총 한 방 쏘아보지 못한 채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를 맥없이 지켜보았던 것은, 그들이 더 이상 사회주의혁명무력이 아니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사회주의체제는 핵억지력(nuclear deterrence)으로만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5) 현대수정주의자들의 일탈과 굴복
사회주의반제혁명에서 일탈한 뒤에 제국주의와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현대수정주의의 환상에 중독이 되어버린 후르시쵸프는 사회주의반제혁명이 창조하는 새로운 정신세계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최후결전이 다가온 사회주의반제혁명의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마저도 알지 못하였다. 전의를 상실한 그의 눈에는 제국주의전쟁광들이 핵무기를 휘두르는 난동소리만이 들렸을 뿐이다.
케네디와 똑같이 그도 역시 전쟁공포증에 빠져있었다.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려던 그의 시도는 제국주의와 최후결전을 벌이려는 사회주의반제혁명의 무력전개가 아니었고,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조여오는 핵미사일 포위망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광란적인 핵전쟁위협으로 나왔을 때, 사회주의반제혁명에서 일탈하고 현대수정주의 중독증에 걸린 소련공산당 지도부가 취한 대응행동은 두 가지였다.
첫째, 소련은 제국주의전쟁광들과 수소폭탄 폭발실험으로 경쟁하였다.
10월 22일과 28일, 그리고 11월 11일 세 차례에 걸쳐 소련은 카자흐스탄에서 가까운 카푸스틴 야르(Kapustin Yar)의 미사일발사장에서 각각 300kt급 수소폭탄을 실은 미사일을 발사하여 고고도 상공에서 폭발시키는 실험을 강행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제국주의전쟁광들의 광란적 무력시위에 대응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보다 앞서 제국주의전쟁광들은 10월 18일 하와이에서 남서쪽으로 1천153km 떨어진 존스톤 섬(Johnston Island)의 고고도 상공에서 수소폭탄 폭발실험을 강행하였고, 10월 20일과 26일에는 전술핵탄두를 장착한 중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는 핵미사일타격연습을 하였으며, 10월 27일과 30일에는 비(B)-52 전략폭격기에서 800kt급 수소폭탄과 8.3메가톤급 수소폭탄을 각각 투하, 폭발하는 실험을 하였으며, 11월 11일에는 전술핵탄두를 장착한 중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는 핵미사일타격연습을 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전쟁광들의 광란적인 수소폭탄 폭발실험과 핵미사일타격연습에 맞서 소련이 수소폭탄 폭발실험으로 대응한 것은 사회주의반제혁명과 무관한 일이었다.
사회주의반제혁명은 제국주의와 무력경쟁을 벌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소련의 경쟁적 수소폭탄 폭발실험은 제국주의전쟁광들과 대결하기는커녕 지구환경이나 더럽힌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사회주의반제혁명에서 일탈한 경우, 수소폭탄 폭발실험이 아니라 그보다 더 강한 무력시위를 벌인다고 해도 그러한 무력시위로는 사회주의체제를 보위하지 못한다.
현대수정주의자들의 핵무기는 사회주의체제를 보위해주는 사회주의억지력을 갖지 못한 비재래식 무기였을 뿐이다.
소련과 달리, 오늘 북(조선)이 사회주의반제혁명의 길에서 핵무장을 선택한 목적은 제국주의전쟁광들과 핵무장 경쟁에 나서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북(조선)의 핵무장은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에서 사회주의반제혁명의 공세를 밀고 나가는 물리적 수단이다. 사회주의반제혁명의 핵무장을 현대수정주의의 핵무장과 동일시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둘째, 후르시쵸프는 결사전을 각오하고 최후결전에 나선 쿠바의 반제투쟁을 외면한 채 엉뚱하게도 케네디에게 편지를 쓰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최후결전이 다가오는 시각, 전쟁공포증에 시달리던 현대수정주의자는 크레믈린 집무실에서 편지쓰기에 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10월 23일, 24일, 26일에 각각 케네디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10월 26일에 후르시쵸프는 다른 정치적 요구는 모두 거두어들인 채, 미국의 불가침공약만 요구하는 긴 편지를 써서 케네디에게 보냈다.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정치적 합의문서마저도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판인데 공식문서가 아니라 그냥 말 몇 마디로 제국주의전쟁광들의 불가침공약을 받아내려 한 것은 명백한 정치적 굴복이었다.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결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10월 27일 후르시쵸프는 소련군 작전실이 아니라 라디오방송실에 있었다. 그는 모스크바 라디오방송(Radio Moscow)을 통해 미국이 터기에 배치한 미사일을 철수하면 소련은 쿠바에 배치한 미사일을 철수할 것이며, 쌍방이 각기 미사일을 철수한 뒤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현장검증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성명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알고 있었다. 후르시쵸프에게는 카스트로가 가진 항전의지가 처음부터 없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터키에 배치한 미국군 미사일을 철수하라는 후르시쵸프의 요구를 무시하고, 다음과 같이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발표문을 내놓았다.
첫째, 소련이 쿠바에 배치한 미사일을 유엔의 사찰과 감독을 받으며 철수하기로 동의한 것으로 이해하며, 쿠바에 더 이상 미사일을 배치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이해한다.
둘째, 미국은 현재 시행 중인 쿠바 차단조치의 즉각적인 해제와 쿠바에 대한 불가침 보장을 이행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유엔을 통하여 취하기로 동의한다.
케네디는 터키에 배치한 미사일을 철수하라는 후르시쵸프의 요구를 무시하는 것처럼 큰소리를 쳤으나, 위에서 지적한 대로 자기 동생 로벗 케네디를 앞세운 비밀협상을 통해서 미사일 상호철수라는 밀약형태의 정치적 타협에 이미 동의한 바 있었다. 제국주의전쟁광들의 공식발언에서는 허장성세를 덜어내야 진실이 드러나는 법이다.
10월 28일 제국주의전쟁광들의 허장성세를 꿰뚫어보지 못한 채 전쟁공포증에 떨고 있었던 후르시쵸프는 모스크바 라디오방송을 통해 “소련정부는 쿠바에서 미사일기지 건설공사를 중단하고, 그와 더불어 미국이 공격적이라고 지적한 무기들을 해체하여 소련으로 철수하라는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고 발표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항복선언을 방송한 것이나 다르지 않았다.
제국주의전쟁광들에게 무릎을 꿇은 항복선언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를 충격과 경악에 몰아넣었던 그날, 쿠바에 건설 중이던 미사일기지들은 오후 다섯 시부터 재빨리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쿠바에 배치한 미사일을 철수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 전에 자기들의 철수결정을 쿠바혁명정부에게 알려주지도 않았다.
이것은 반제국주의민족해방의 기치를 들고 싸우는 쿠바혁명에 대한 정치적 배신이었다.
1962년 10월 28일, 그 날은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구도에서 사회주의진영의 한 축이 소리없이 무너지기 시작한 비극적인 날로 세계사회주의운동사에 기록되었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사회주의반제혁명에서 일탈한 모스크바의 현대수정주의자들에게 다가올 비극적 종말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로부터 29년이 흐른 뒤, 사회주의소비에트연방공화국(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은 1917년에 치켜들었던 사회주의10월혁명의 붉은 기를 스스로 내림으로써 1922년부터 존속해온 자기 존재를 영원히 끝마치게 된다.
1991년에 소련이 무너진 것은 1962년에 시작된 현대수정주의의 거듭된 일탈이 이어져 마지막으로 가닿은 역사적 귀결이었다. 사회주의반제혁명에서 일탈하고 현대수정주의 중독증에 걸린 소련이 무너지는 것은 소련이 가진 핵무기로도 막지 못했다.
모스크바의 현대수정주의자들이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하던 날, 쿠바혁명정부는 미국에게 무력봉쇄와 경제봉쇄를 해제할 것, 내란공작과 비밀공작을 중지할 것, 공중타격기도를 중지할 것, 영공을 침범하는 정찰비행을 중지할 것, 관타나모 해군기지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결사전을 각오하고 혁명의 총을 움켜쥐었던 쿠바혁명군과 혁명적 쿠바인민의 항전의지도 모스크바의 현대수정주의자들이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에게 굴복하여 사회주의진영의 한 축을 무너뜨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3-6) 제국주의전쟁광들의 음모와 피살
1962년 11월 8일부터 10일까지 모스크바의 현대수정주의자들은 쿠바에 배치한 미사일을 철수하였다. 그러나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공약을 저버리고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를 즉각 중단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소련이 쿠바에 배치한 일루신(Ilyushin)-28 폭격기도 철수하라는 추가요구를 들고 나왔다. 야수적 본성을 가진 제국주의전쟁광들에게 공약파기와 추가요구는 그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범죄행위이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현대수정주의자들이 무릎을 꿇었다고 해서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소련에 대한 제국주의적대정책을 자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터키에 배치한 핵미사일을 슬그머니 철수하는 대신, 전략핵미사일을 탑재한 핵잠수함들을 흑해에 전진배치하였다. 그로써 모스크바의 현대수정주의자들이 핵미사일 포위망에 파열구를 내보려던 계획은 완전히 파탄되었을 뿐 아니라, 미국의 핵잠수함들이 흑해에 전진배치됨으로써 핵미사일 포위망은 되레 더 위험천만하게 소련의 사회주의체제를 옥죄게 되었다.
1962년의 역사적 경험은,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에서 사회주의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 그것은 곧 패배의 길로 들어서는 것임을 가르쳐주었다.
비타협적이고 진공적인 투쟁만이 제국주의와의 대결을 승리로 이끈다는 말은, 제국주의와의 결전을 눈앞에 둔 한(조선)민족의 자주역량에게 그래서 더 절실한 울림으로 들려온다.
또한 모스크바의 현대수정주의자들이 무릎을 꿇었다고 해서,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쿠바를 노리는 제국주의침공야욕을 자제한 것은 아니었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쿠바혁명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침공계획에 여전히 광적으로 집착하였다.
케네디는 중앙정보국을 앞세워 제국주의무력침공을 도발하려는 새로운 음모를 꾸몄다. 1963년 6월 28일부터 중앙정보국이 내란도발과 무력침공을 연계하여 계획한 전복음모의 작전명은 ‘앰월드(AMWORLD)’였다.
내란도발과 무력침공을 연계한 작전으로 쿠바혁명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전복음모는, 오늘 ‘우발사태’를 도발하여 북(조선)의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제국주의전쟁광들의 전복음모와 일맥상통한다.
이른바 ‘개념계획 5029(CONPLAN 5029)’에 따르면, 태평양군사령부 예하 특수작전사령부(Special Operations Command, Pacific/SOCPAC) 병력이 북(조선)에 잠입하여 내란으로 위장한 특수전을 도발하고 남북(북남)의 무력충돌을 유발하는 이른바 ‘우발사태’를 일으킴으로써 북(조선)의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태평양군사령부 예하 특수작전사령부는 경상북도 대구에 제160 특수작전공수연대(160th Special Operations Airborne Regiment)를 배치해두고 있으며, 2005년 6월 4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한미 국방장관회담에서는 ‘개념계획 5029’를 보완, 발전시켜나가자고 합의한 바 있다.
놀랍게도,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쿠바혁명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내란음모에 마피아(Mafia)조직을 끌어들였다.
원래 미국의 마피아조직이 비밀거래를 해오던 대상은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뒤 쿠바의 제당산업을 장악한 군부출신의 극악한 독재자 풀겐씨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y Zaldivar, 1901-1973)를 우두머리로 하는 부패한 반동정권이었다.
민주주의혁명이 승리하기 이전, 쿠바는 미국으로 설탕원료를 밀수하여 막대한 이익을 거머쥐었던 마피아조직의 범죄온상이었다. 쿠바에서 민주주의혁명이 승리하여 제당산업을 비롯한 중요산업이 국유화되는 바람에 비밀거래선이 끊어지자, 마피아조직은 쿠바혁명정부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갖게 되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이 이것을 놓칠 리 없었다. 제국주의전쟁광들과 마피아조직은 쿠바혁명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결탁, 공모하였다.
제국주의전쟁광들의 계획에 따르면, 중앙정보국 요원들로부터 집중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수천 명의 마피아 깡패들이 쿠바에 잠입한 뒤 1963년 12월 1일에 내란을 일으키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결탁공모과정에 끌어들였던 마피아 두목 세 사람이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것 때문에 케네디 형제는 전복책동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고심하였다.
마피아조직과 결탁, 공모한 것을 영원히 비밀로 묻어버리고 싶었던 케네디 형제는 마피아 두목 세 사람을 사전에 은밀히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제거음모를 눈치챈 마피아 두목들은 쿠바에서 내란을 일으키기로 예정된 날로부터 9일 전인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달라스를 순방하던 케네디를 저격, 암살하였다. 그의 동생 로벗 케네디 역시 1968년 6월 6일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직후 마피아의 총격으로 피살되었다.
4. 글을 맺으며
모스크바의 현대수정주의자들이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에게 무릎을 꿇은 때로부터 어언 44년의 긴 세월이 흘렀고, 소련이 자기 존재를 끝마친 때로부터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도, 그들에게 무릎을 꿇었던 모스크바의 현대수정주의자들도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는 암살되었고, 1964년 10월 16일 후르시쵸프는 당직을 박탈당하고 당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제국주의전쟁광들의 경제봉쇄와 전쟁위협은 상기도 계속되고 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사회주의진영이 무너진 뒤에 지구 위에 남아있는 몇몇 사회주의체제마저 무너뜨리려는 봉쇄와 제재의 만행은 극에 이른 듯하다.
그러나 사회주의반제혁명에서 일탈한 소련이 망하고, 몇몇 사회주의체제가 자본주의체제로 역행의 발길을 돌렸어도, 자주적 사회주의는 반동의 드센 광풍이 몰아치는 시련의 고비를 넘고 또 넘으며 사회주의반제혁명의 길을 헤쳐 전진하고 있다.
오늘 북(조선)과 쿠바에 펼쳐진 사회주의체제의 현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자주적 사회주의가 전진하는 사회주의반제혁명의 길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반제국주의민족해방과 반자본주의계급해방의 기치를 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전진하는 민주주의혁명의 길에 변함없이 잇닿아있다.
세계사회주의운동사가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사회주의반제혁명에서 일탈하였던 현대수정주의자들은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에서 패하여 결국 몰락하고 말았으나 반제혁명의 결사전에 나섰던 쿠바의 혁명역량은 건재한다는 점이다.
소련의 붕괴경험이 말해주는 것처럼, 사회주의반제혁명에서의 일탈은 사회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복귀로 귀결된다.
또한 중국과 베트남의 경험에서 실증된 것처럼, 사회주의반제혁명의 포기는 사회주의의 변질과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북(조선)과 쿠바의 현실이 입증하는 것처럼, 사회주의반제혁명은 자주적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길이다.
1962년의 역사적 경험은 그 진리를 밝혀주었다. (2006년 11월 9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