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의 상상력을 촉발하는 ‘오래된 미래’ - 1894년 농민전쟁
박준성 / 노동자교육센터 운영위원, 역사학연구소
2014년은 1894년(갑오)농민전쟁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연초에는 올해가 갑오년이라고 ‘갑오’ 농민전쟁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100주년이라고 시끌벅적하던 1994년에 견주면 올해가 ‘갑오년’일까 싶을 정도로 잠잠하다.
역사를 ‘몇 주년’이라고 요란스럽게 기념하는 일도 마땅치는 않다. 평소에는 잊고 지냈던 역사를 면피용으로 한꺼번에 떠올리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다. 그런데 변혁의 꿈이 사라지니까 변혁의 역사도 외면당하는 것 같은 오늘의 현실을 놓고 보면 갑오년에라도 갑오년의 역사를 되새겼으면 하고 바란다.
1894년 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사업에서 내가 크게 꼽는 성과가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1994년 9월에 세운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이다.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녹두회관 앞에 세워졌다. 1893년 ‘동학혁명’을 모의하면서 만든 사발통문이 발견된 마을이다.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은 관 주도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와 뜻있는 지역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것이다. 여기 세워진 조형물들은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 있지 않다.
가운데 주탑은 '無名東學農民軍慰靈塔'이라고 이름을 새긴 받침대 위 네모난 화강암 판에 쓰러진 동료를 일으켜 감싸 안고 죽창 들고 외치는 농민군 모습을 얕게 파서 새겼다. 그림의 이미지는 80년대 민중판화와 걸개그림을 많이 따왔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이 본격화 되기 바로 전, 6월 9일 최루탄 맞아 피흘리며 쓰러진 이한열 학생을 일으켜 안은 동료가 전두환 정권을 향해 분노의 눈길로 바라보는 사진, 그것을 걸개그림으로 만들어 6월 항쟁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은 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내라’가 연상된다.
토막토막 따로 세운 1-2미터 크기의 32개 보조탑에는 ‘밥이 하늘이다’를 상징하는 밥그릇, 무명농민군의 얼굴, 농민들이 무기로 썼던 농기구를 새겼다. 화강암 돌기둥 위, 아래, 중간에 새긴 농민군 머리는 표정과 거칠기를 달리하여 삶과 죽음을 표현하였다.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은 주탑을 중심으로 보조탑들 사이사이에 공간을 둔 것은 그 사이로 가까이 다가가 돌아다니면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안아도 보고 손으로 쓰다듬어 보라고 그런 것이다. 멀리 밀어내어 쳐다보기만 하는 먼 역사가 아니라 조형물로 끌어 당겨 가까운 역사로 느낄 수 있게 한 배려이다.
그런데 주탑의 액자 틀 같은 직사각형 선이 답답하고, 보조탑 어느 기둥에도 농민전쟁에 참여했던 여성들과 어린이들의 모습은 없다. 모두 어른 남자 머리뿐이다. 남성중심, 어른 중심의 시각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농민전쟁 뿐 아니라 어떤 역사도 지도자들만이 싸워 이룬 것이 아니다. 어른 남성들만 참가한 것이 아니다. 이름이 없던 것이 아니라 이름은 있으되 역사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민중이 노동과 투쟁으로 이루어온 것이다.
1894년 농민전쟁은 이전에 일어났던 농민항쟁(민란)과 달리 전국에서 봉기한 농민군이 중앙정부의 정부군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였던 농민전쟁이었다. 1894년에 농민들은 “갑오세 갑오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보리”하는 구호를 외치며 투쟁에 참가하였다. 갑오(1894)년 투쟁에 참가하지 못하면 을미(1895)년에 적들에 의해 병신(1896)년에 모두가 망할 것이라는 뜻이다.
1월 고부농민봉기에서 시작해서 3월 제1차 농민전쟁에 참가한 농민군은 우리 역사상 밑으로부터 가장 많은 농민들이 참가한 농민연합부대였다. 농민군은 4월 말 전주성을 점령하고 5월부터 8월까지 지방행정에 직접 참가하거나 협조하는 ‘집강소 체제’를 경험하였다. 민족의 위기가 고조되면서 9월부터 다시 제2차 농민전쟁을 전개하여 그해 말까지 싸웠다. 공간으로 보아도 전라도, 충청도 뿐 아니라 강원도, 경상도, 황해도 지역에서도 싸웠다. 농민군은 1년여 동안 전국 곳곳에서 치열하게 싸웠으나 상대는 정부군뿐이 아니었다. 농민군을 진압하려는 일본군과 싸워야 했으며, 후방에서는 보수 양반층들이 만든 민보군의 반격을 받아야 했다.
농민들은 집강소를 통하여 ‘폐정개혁’을 추진하고 개화파 정권을 움직여 갑오개혁을 통하여 신분제를 법적으로 철폐시켰다. 세상을 몽땅 뒤집어엎지는 못했다. 밑으로부터 당시의 사회 모순과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으로는 낡고 썪은 봉건질서를 무너뜨리고 밖으로는 일본을 비롯한 침략 외세를 물리치려 한 반봉건․반침략 투쟁은 성공하지 못했다. 역사가 1894년에서 머물렀다면 농민들의 투쟁은 패배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역사에서 현실의 패배가 늘 역사의 실패는 아니다.
누구나 평등하게 잘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는 농민군의 꿈이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역사에서는 근현대 변혁 운동의 중요한 흐름 속에 자리를 잡고 이어져 왔다. 1894년 농민전쟁은 이후 전개된 1919년 3.1운동,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 1960년 4월혁명, 1979년 부마민중항쟁, 1980년 5.18민중항쟁, 1987년 6월항쟁과 7.8.9노동자투쟁의 출발지였다. 기댈 기둥이었고, 딛고 건너갈 징검다리였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척박한 자본의 땅에서 변혁의 상상력이 고갈되고, 변혁의 꿈이 점점 소멸되어가고 있다. 변혁적 실천의 토양이 메말라 가는 현실에서 1894년 농민전쟁을 비롯한 변혁운동의 역사는 여전히 메마른 땅을 적시는 변혁적 상상력의 저수지이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물을 주는 ‘오래된 미래’이다. “빵을 달라” “장미도 필요하다”는 구호만큼이나 1894년 농민군이 외쳤던 “밥이 하늘이다” “사람이 하늘이다”는 구호는 여전히 유효하다. 두 구호를 하나로 합치면 ‘세상을 바꾸자’가 될 것이다.
[아래 사진: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