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떨어지면서 봄이 깊어 가고 여름이 다가온다.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꽃잎이나 빗물에 쓸려 내려가는 꽃잎을 볼 때면 ‘5월의 노래’들과 노래에 담긴 ‘역사’들이 떠오른다. 연례행사처럼 떠올랐다 잊혀지기를 반복한다 해도, 1980년 5월 '광주'와 ‘5월의 노래’들은 떼어놓을 수 없는 내 청춘’의 일부였다.
"봄볕 내리는 날 뜨거운 바람 부는 날
붉은 꽃잎져 흩어지고 꽃향기 머무는 날
묘비 없는 죽음에 커다란 이름 드리오
여기 죽지 않은 목숨에 이 노래 드리오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오월의 노래>1)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젓 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오월의 노래>2)
가슴 막히게 불렀던 5월의 노래들을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통곡하며 터놓고 부른 적이 있다. 1986년 8월 혼자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무등산을 거쳐 찾은 망월동 무덤들 앞에서 였다. 한여름 땡볕 아래서 소주병을 앞에 놓고 잔도 없이 마시며 내가 아는 5월의 노래들을 몽땅 불렀다. 술과 눈물과 노래를 범벅해서 불렀다.
“저기 오네 젊은 넋들 들판 가로 질러 .....물러서지 않으리 사슬 끊고 전진하는 오월 오늘은 물러서지 않으리”......
일어서기 전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한 번 더 불렀다. 시도 때도 없이 ‘산자여 따르다’는 구절이 환청처럼 들리는 노래였다.
망월동을 찾았던 그해 1986년 5월20일에는 서울대 농대 원예학과 이동수 학생이 내가 근무하던 규장각에서 건너다보이던 학생회관 4층 옥상 난간에서 “파쇼의 선봉 전두환을 처단하라” “폭력경찰 물러가라” “미제국주의 물러가라” 어용교수 물러가라“고 외치며 불덩어리가 되어 떨어졌다.
그 전 1983년 11월 16일에는 규장각이 있던 중앙도서관 6층 난간에서 공과대학 도시공학과 4학년 황정하 학생이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려고 밧줄을 타고 5층 난간 아래로 내려오다가 15m 아래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끝내 숨졌다.
그보다 전 1981년 5월 27일에는 내 삶에 한 전환의 계기가 된 서울대 경제학과 4학년 김태훈 학생의 죽음이 있었다. 학생들이 침묵시위를 벌이던 그날 규장각에서 고도서 해제작업을 하던 국사학과 대학원생들 몇몇이 학교 직원 행세를 하면서 도서관 아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후 3시 무렵 도서관 꼭대기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바로 몇 십 미터 저쪽에서 ‘퍽’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무슨 물체가 떨어졌다. 도서관 6층에서 김태훈 학생이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외치고 몸을 던진 것이다.
정신없이 몇 걸음 달려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며 힘이 빠져 현관 기둥을 끌어안고 잠시 멍하니 서있었다. 학생들이 몰려들어 울부짖었다. 그 위로 전경들이 사과탄을 집어 던졌다. 아직 목숨이 붙어있을 지도 모르는 몸체 위에 최루탄 가스 분말이 하얗게 덮였다. 저들은 학생들을 쫓아버리고 쓰러진 김태훈의 육신을 빼앗아 갔다. 온 몸이 뻣뻣해질 것 같았다. 그 날 저녁 신림동 술집에서 몸부림치며 술병과 술잔을 얼마나 집어 던졌는지 모르겠다.
이런 놈의 세상에서 공부는 해 무엇에 쓰랴 싶어 운동하는 선배들을 찾아가 할 일을 찾았다. 선배들이나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이 달랬다. “세상을 바꾸려면 공부하는 사람도 필요하니 분통이 터지겠지만 꾹 참고 공부해. 나중에 공부 가지고도 할 일이 많을 거야”.
1980년대 내내 내가 낮 시간을 주로 보낸 곳은 규장각 도서관이었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는 옛 도서를 소개하는 해제 작업을 하면서, 1984년부터 1989년까지는 조교생활을 하면서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했다.
광주에서 ‘꽃잎처럼’ 스러져간 수많은 젊은 넋들과 가까이서 본 김태훈, 이동수의 죽음은 역사와 현실에 대해 한 눈 팔지 말고 더욱 긴장하라는 아픈 채찍이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전반은 대학원에서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젊은 청춘들의 죽음에 내 청춘을 견주어 보는, 가슴이 온통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방황의 날들이었다. 그뒤 현장을 찾아 노동자 민중의 역사를 강의하고 다니면서도, 부르주아지도 못되면서 공부가 무슨 맑지 않은 피를 담는 특권 같아 고통스러웠다. 막심 고리끼가 소설 <어머니>에서 썼던 “부르주아지의 피는 펌프로 품어내도 맑아지지 않는다”는 말을 읊고 다닐 때였다.
망월동에서 5월의 노래를 한없이 부르고 떠나면서 영령들께 다시 인사를 올렸다. ‘결코 안주하지 않으리라, 편안하게 살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 이시대의 문제와 모순과 과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려고 하면서 부정의 대상에서 주어지는 이익은 그대로 받고 기득권에 편입한다면 결코 아무것도 부정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결의를 다졌다.
1987년 12월 광주학살의 주역 전두환이 백담사에 유배되었고, 1995년 전두환 노태우가 감옥에 갔다. 그들이 저절로, 제 발로 감옥에 간 것이 아니었다. 1980년 20살이었던 사람들이 35살이 될 때까지, 25살이었던 사람들이 40살이 될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젊은 청춘 을 바쳐 민주화 운동에 나섰기 때문에 그나마 우리가 여기 이렇게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변절하고 맛이 갔다고 해서, 운동을 팔아 권력의 단맛을 향유했다고 해서, 숱한 죽음으로 써 온 민주주의의 역사가, 그 핏빛 역사에 무임승차한 자들이 비아냥 거려도 될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변혁의 꿈을 저버려서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