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청소년노동인권에 관심을 가지시나요?
이용석(부천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노랑’)
1. 들어가며
“왜 청소년에 관심을 가지시나요?”
“왜 청소년노동인권에 관심을 가지시나요?”
청소년노동인권 관련 교육을 시작할 때 참가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답변은 주로 ‘그냥’, ‘궁금해서’, ‘잘 모르니까’, ‘청소년이 미래의~~~’ 등이다. 정답이라 여겨지는 것을 찾아서 잘 말씀해 주신다. 오히려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인데 이런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것 같았다. 또한 강사는 알고 있지만 참여자는 모르는 어떤 특별하고 의미 있는 정답을 기대하기도 한다. 당연히 강사가 갖고 있는 정답은 없다.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지면 활동 자체가 매뉴얼화되거나 형식화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에 의문을 갖는 것.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한번 생각해보셨으면 좋겠다.
2. 청소년노동권이 아니라 청소년노동인권인 이유는?
노동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은 구체적 현장에서의 삶이기에 노동권 외에도 노동과 노동의 대상에 대한 감수성과 철학,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 차별받지 않을 권리, 위협받지 않을 권리 등 노동 현장에서 발생하는 인권의 문제까지도 생각한다. 즉, 노동 그 자체와 그 노동을 둘러싼 제반 조건이 인권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노동인권에 대한 정의는 아래의 내용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노동인권은 1)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을 수행함에 있어 차별 없이 당연히 누려야할 필수적인 권리 2) 노동인권교육은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현장에서 차별 없이 노동인권을 누리게 하기 위해 노동의 가치, 노동권, 노동조건에 대한 권리, 노동3권, 사회보장권, 프라이버시권, 경영참여권 등을 교육하여 노동의 신성함을 깨닫게 함과 동시에 노동현장에서 발생하는 노동인권에 대한 문제해결 능력을 키워 주는 것” 3) “인권교육의 일반적 원칙을 지켜내면서 학습자로 하여금 노동인권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노동인권의 기준과 내용에 대한 공유, 노동인권을 존중하는 태도와 감수성 배양, 노동인권을 옹호할 수 있는 권한 강화를 목표로 하는 교수-학습의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즉, 노동인권교육은 노동교육 중에서 노동의 가치와 태도, 노동과 관련된 인권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청소년 노동인권교육 개선방안 연구, 국회법제사법위원회, 하인호외 3인, 2004] |
3. 청소년노동인권의 현재와 필요성
△ 노동시장 진입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채용 차별(성, 연령, 외모 등에 따른 차별) △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원칙으로부터의 배제(저임금의 구조화) △ 작업장 감시와 프라이버시 문제(노동자에 대한 과도한 정보수집, CCTV 등 각종 감시 장치의 확산) △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 문제(고용, 임금, 승진, 교육 등 노동의 전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차별과 일상적 폭력, 성희롱) △ 단결권을 비롯한 노동3권으로부터의 배제 △ 안전하고 건강한 작업환경으로부터의 배제 등 |
위의 내용은 헬조선에서는 이제 익숙한, 노동 현실의 이야기이다. 아마도 위 내용의 출처가 「청소년 노동과 노동인권교육 실천」(하인호,『서울시교육청 노동인권 직무연수 자료』, 2015)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 땅의 비정규직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청소년’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비정규직의 문제가 아니라 ‘아르바이트생’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더군다나 일하는 청소년이 아니라 일하는 ‘학생’이 되면서, 학교밖청소년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그냥 알바로 취급된다. 생계를 이어가는 노동이 아니라 용돈이나 버는 알바 정도...
이러한 인식은 일하는 청소년을 노동자로 인정하고 이들이 처한 노동 환경을 인간다운 수준으로 만들기 위한 주체적 노력을 전체 노동운동의 부차적인 것으로 혹은 조직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연대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전제가 이미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가부장제 사회와 가족임금 체계 속에서 ‘아이들’은 자식으로만 존재하기에 같은 노동자로 연대의 대상은 아니며 더불어 남성가부장이 벌어 오는 임금 이외의 수입은 그냥 보조 수입으로나 취급받기 때문이다.
청소년노동인권은 일하는 청소년이 이미 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미 존재하는 노동자로서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청소년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비청소년들이 인정하든 말든 상관없다. 이미 있으니까. 청소년노동인권은 불쌍한 청소년노동자를 지켜주거나 도와주자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청소년노동자-일하는 청소년을 ‘제대로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지, 내가 몸담고 있는 공간 속에 있는 그들과는 어떻게 연대할 것인지를 고민하자는 것이다.
4.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을 바라보는 시각과 문제 의식
청소년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 노동권이 보장되는 일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인권교육이 노동자와 사용자 모두에게 꼭 필요하다. 노동인권교육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청소년들은 사용자나 업주에 의해 싼값에 노동력을 착취당하기 일쑤이고 불합리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른 채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노동인권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한다면 지금의 참혹한 노동 현실이 반복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청소년 때부터의 노동인권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위의 책, 하인호,『서울시교육청 노동인권 직무연수 자료』, 2015)
2014년부터 각 지역(대부분 광역시도 단위로)에서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이 활성화되었다. 2015년에는 숫자로 집계되는,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이 진행된 학급수가 갑자기 늘어나고, ‘청소년노동인권 강사 양성 과정’이 유행(?)처럼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는 형상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청소년노동인권에 대한 ‘교육’(학교 교육이든 강사 교육이든)이 들불처럼 퍼져 나간 것이다. 급기야 정부에서조차 2015년에 ‘제2차 청소년보호종합대책’에서 청소년의 근로권익 보호기반 마련을 전략 목표로 제시하였다.(청소년을 보호하겠다는 내용이니 청소년노동인권과는 한참 멀다) 교육과정에도 청소년근로교육을 하도록 내용을 추가하겠다고 했다. 물론 그동안 많은 분들의 실천이 있었기에 여기까지라도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10년이 넘어가고 있는 청소년노동인권 활동이 매우 소중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봐야 할 점은 지금 청소년노동인권이 실천 단체나 정부에서나 ‘교육하기’라는 틀 내에서 갇혀 있는 모습이라는 점이다. 청소년은 누구이며, 노동은 무엇이고, 인권은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한 변혁적 접근과 구체적 논의는 실종된 채, 0000교육처럼 청소년노동인권 교육만 남아 있는 모습이다. 청소년노동인권을 ‘운동’으로 바라보지 않고 ‘교육’으로만 바라보게 되면 십중팔구는 노동권만 교육하게 된다. 청소년이 노동권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을 들여다 보자. 1년에 한번 정도, 한번 교육에 2시간, 한 명의 강사가 30여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교육을 한다. 1년에 2시간 교육으로 청소년노동인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또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에게 일률적으로 노동권을 수업하는 것이 필요한가? 현장실습을 앞둔 전문계고 3학년이나 수능을 마치고 곧 사회로 나가게 될 일반계고 3학년에게는 노동권에 대한 구체적인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고1,2학년에게도 마찬가지일까? 중학생은? 이번에는 강사를 양성하기 위한 과정을 보자. 보통 3회~5회 정도의 과정을 진행한다. 처음 청소년노동인권을 만나는 이 과정에서 청소년에 대한 감수성, 노동에 대한 감수성,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다른 이들을 가르칠 만큼 획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노동권을 교육한다면서 막상 피교육자인 청소년에게는 “야!”, “너” 등의 반말부터 들이대는 강사가 허다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 대해 대안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은 청소년노동인권 운동을 하는 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왜 교육하려 하는가? 청소년노동인권 ‘운동’에 주목할 것인가? ‘교육’에 주목할 것인가? 운동이라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이며, 교육이라면 대상은 누구이며 내용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5. 청소년노동인권에 대해 노동운동이 주목하고 연대해야 하는 이유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은 청소년노동인권 운동의 하위 항목 중 하나일 뿐이다. 즉 노동 관련 교육이 노동운동의 하위 항목 중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에 대한 주목보다는 청소년노동인권 운동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노동운동이 주목하고 연대’한다는 것은 비청소년남성 노동운동 중심의 관점이다. 일하는 청소년이 노동자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청소년노동인권 운동이 노동운동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질문이 정확해야 한다. “노동조합 운동이 청소년노동인권 운동에 대해 무엇을 주목하고 어떻게 연대해야 할 것인가?”
일단, 청소년노동과 청소년노동자는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노동조합 운동이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출발이다. 특히, 나이에 억눌리고 학업에 억눌리고 자식으로만 위치 지워지며 비정규직 알바로 취급되는 ‘밑바닥 노동’의 노동자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연대’의 정의와 방식에 대한 전환도 필요하다. 지금껏 우리가 사용하는 ‘연대’는 A라는 단체(개인)와 B라는 단체(개인) 사이에 공유할 수 있는 투쟁이나 의제를 가지고 어깨 걸고 나가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이러한 연대도 물리적, 정서적, 실질적으로 매우 도움이 되니까. 하지만 연대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보자. A라는 단체 안에 청소년이 있는가? 있으면 그들과 진정 함께 하고 있는가? 그들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구성원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어려서 혹은 성별이 달라서 등의 이유로 어떤 형태로든 배제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B라는 단체에는 청소년이 없다면? 왜 청소년이 없는가? 그럼 청소년이 없이 비청소년끼리 모여서 청소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요컨대, 기존의 연대라는 의미에서 ‘내가 하고 있는 운동’, ‘내가 참여하고 있는 조직 운동’, ‘내가 살고 있는 공간’ 안의 청소년을 그리고 그 청소년의 문제를 나의 운동, 나의 조직, 나의 공간 문제로 생각하고 함께 풀어가는 것으로 확장하자는 것이다.
외부를 향하는 연대와 내부를 향하는 연대가 만나야 한다. 예컨대, 주변의 청소년노동자와도 연대하고 당신의 아들이나 딸, 당신의 조카와도 연대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6. 앞으로의 과제
그들을 만나자. 청소년이 궁금하면 청소년에게 물어보자. 청소년노동이 궁금하면 청소년노동자에게 물어보자. 당사자들에게 묻지 않고서 당사자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청소년을 같은 시민이 아닌 그저 대상으로 바라볼 뿐이다. 마치 흑인 문제를 흑인에게 묻지 않고 백인들끼리 모여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노동조합 운동에서 청소년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자. 비청소년들도 예외없이 청소년이라는 시기를 보냈다. 그런데 비청소년이 된 지금은 청소년에 대해 모르겠다고 한다. 청소년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야 청소년의 노동과 그들의 인권이 보인다. 감수성 없이 또는 감수성을 높이려는 노력 없이 청소년을 만나봐야 소위 꼰대가 될 뿐이다.
노동조합이 청소년노동인권을 교육할 강사를 양성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노동조합이 노동에 대한 감성만 높이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장애, 청소년, 성평등 등에 대한 감수성도 높여야 한다. 왜냐면 이들이 노동조합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수성을 높여서 노동조합 내의 여성, 청소년, 장애, 성소수자를 배제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연대일 것이다. 청소년노동인권에 대한 교육을 노동조합원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그 내용은 청소년노동인권 관련 단체나 네트워크에 요청하면 된다. 물론 노동조합원 개인이 강사로서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실천하려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 차원의 사업으로 강사를 양성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은 분명히 한계를 드러냈다. 운동을 상실한 교육은 그 방향을 잃어버릴 뿐이다. 청소년노동인권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던 노동과 노동자를 주체로 호명하려는 운동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다시 질문하며 부족한 글을 마치려고 한다.
“왜 청소년노동인권에 관심을 가지세요??”
*본 교육지 길에 올라오는 글은 노동자교육센터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