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위대한 사진작가 크리스티앙 살가두의 다큐멘터리 작품과 혼동하면 안된다. 이 영화는 “빨갱이 선전영화”이고, 또 아주 오래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지의 소금》은 보통 노동영화와 아주 다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특징과 배경에서 탄생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대지의 소금》은 1954년 헐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올라 생계와 직업이 봉쇄된 영화인들과 노동자들의 저항이자 절규였다. 그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영화 프로필
《대지의 소금》(Salt of the Earth: 1954년)
감독: 허버트 바이버먼(Herbert J. Biberman)
제작: 폴 재리코( Paul Jarrico)
각본: 마이클 윌슨(Michael Wilson)
출연: 로사우라 레부엘타스(Rosaura Revueltas: 여주인공), 윌 기어(Will Geer: 보안관), 데이빗 울프(David Wolfe), 머빈 윌리엄스(Mervin Williams), 데이빗 사비스(David Sarvis), 에르네스토 벨라스케스(Ernesto Velázquez), 후안 차콘(Juan Chacón: 남주인공), 헨리에타 윌리엄스(Henrietta Williams)
음악: 솔 캐플런 (Sol Kaplan)
촬영: 스탤리 메러디스(Stanley Meredith), 레너드 스타크(Leonard Stark)
편집: 조앤 레어드(Joan Laird), 에드 스피겔(Ed Spiegel)
배포: 독립프로덕션 (Independent Productions)
출시일자: 1954년 3월 14일 (뉴욕)
상영시간: 94분
언어: 영어, 스페인어
예산: 250,000달러
헐리우드 블랙리스트 영화인이 만든 영화
헐리우드는 빨갱이(공산당)을 때려잡는 광풍의 정치재판 맥카시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동료를 밀고한 자들은 헐리우드에서 살아날을 수 있었지만, 동료를 배신할 수 없거나 양심을 지키고자 하거나 확고한 신념을 포기할 수 없었던 좌파 극작가와 감독들은 그렇지 못했다.
매카시즘의 정치적 탄압으로 인한 대표적인 희생자들이 이른바 헐리우드 10인(Hollywood Ten)이며, 이 블랙리스트로 인해 이들의 삶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파산했다. 허버트 바이브먼(Herbert J. Biberman: 시나리오 작가 겸 감독), 레스터 코울(Lester Cole: 시나리오 작가), 에드워드 드미트리크(Edward Dmytryk: 감독), 링 라드너 2세(Ring Lardner Jr.: 시나리오 작가), John Howard Lawson(시나리오 작가), 앨버트 몰츠(Albert Maltz: 시나리오 작가), 새뮤얼 오니츠(Samuel Ornitz: 시나리오 작가), 애드리언 스코트(Adrian Scott: 제작자 겸 시나리오 작가), 돌튼 트럼보(Dalton Trumbo: 시나리오 작가), 앨바 베시(Alvah Bessie: 시나리오 작가) 등 10인은 헐리우드에서 영원히 추방당했다. (이 가운데 유명한 《스파르타쿠스》(1960년)의 각본을 썼던 돌튼 트럼보의 인생역정을 다룬 영화 《트럼보》(Trumbo: 2015년)는 헐리우드 블랙리스트를 다룬다.)
1954년 이 가운데 3인이 뭉쳐 《대지의 소금》이란 영화를 만들어냈다. 마이클 윌슨이 각본을 쓰고, 허버트 바이버먼이 감독했고, 폴 재리코가 제작을 맡았다. 이들은 모두 하원 반미위원회에서 공산주의운동과 관련한 증언을 거부했고, 의회 경멸혐의로 징역형을 받았다. (각본을 담당한 마이클 윌슨은 생존을 위해 가명으로 대본을 썼고, 나중에 《콰이강의 다리》(1957년)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다.)
진부하지만 전혀 진부하지 않은 줄거리
영화의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전혀 어렵지도 않고 철학적이지 않다. 이 영화는 1951년 뉴멕시코주 그랜트 카운티의 아연광산에서 일어난 실제 파업을 재현했다. 영화에서 그랜티 카운티는 징크타운(아연도시)으로, 제국아연회사(Empire Zinc Company)이란 실제 회사는 “델라웨어 아연”(Delaware Zinc)으로 이름만 살짝 바뀌었다.
아연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은 멕시코계 이주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장시간 저임금의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백인 광부들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처우개선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면서 파업에 들어갔지만, 회사는 요지부동, 어떤 협상도 거부한다.
여주인공 에스페란사 킨테로(Rosaura Revueltas)는 광부의 아내,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 남편은 라몬 킨테로(Juan Chacón), 광산노조 노동조합원이다. 파업 노동자를 배신한 조합원에게 폭행을 가했다가 감옥에 갇힌다. 라몬이 감옥에 간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 라몬은 감옥에서 풀려나지만 파업의 전망을 둘러싸고 부부싸움이 벌어진다. 에스페란사는 감옥에 갇힌 남편을 아무 쓸모없다고 투정을 부리지만, 라몬은 파업이 지금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것이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훈계한다.
그러나 파업에 길어지면서 노동자와 가족들은 치쳐간다. 이 틈을 노리고 회사측은 당시 악명높은 노동악업, 즉 태프트-하틀리법을 이용해 법원의 노조활동 금지명령을 받아낸다. 광산 입구에 피켓라인을 세우면 곧 바로 체포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파업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동조합 총회가 소집되고, 여성들이 나섰다. 광부의 아내들이 피켓라인을 지키겠다고 주장하지만, 남성들의 반응은 떨떠름하다. 아내에게 파업을 자리를 내주는 게 마땅치 않고, 어떤 위험이 닥칠지도 몰라 위험하기도 하다. 또 남편이 조합원이지 부인이 조합원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는 만큼, 결국 여성들이 남편을 대신에 파업의 전면에 나선다. 자존심이 상한 라몬은 에스페란사의 파업을 참여를 금지시키지만, 에스페란사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 그녀는 아이를 안고 피켓 라인에 선다.
회사측과 유착한 보안관은 여성들을 체포하고, 에스페란사도 감옥에 갇힌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라몬은 희망이 없는 파업에 절망한다. 그러나 에스페란사는 노동조합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고 쏘아붙인다. 또 왜 결혼에서 자신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지 묻는다. 이번에도 부부는 싸우고 따로 잔다.
다음 날 회사측은 더 악날한 공세에 나선다. 라몬과 에스페란사를 집에게 강제퇴거 시키려고 시도한다. 이 소식을 듣고 동료 노동자와 친구들을 달려와 강제퇴거를 저지한다. 작은 승리지만, 라몬은 에스페란사에게 함께 싸울 수 있다고 말한다. 얼마 뒤 회사 측은 패배를 인정하고 협상에 나설 계획임을 밝히면서 광산 노동자들의 장기파업은 노동자와 지역 공동체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노동자와 가족, 여성이 주도한 이 광산파업은 노동자와 지역 공동체에게 노동조합의 의미와 단결의 힘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해피 엔딩이고, 진부하고 상투적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태어난 시기가 바로 1950년대 반공주의 광풍과 핵전쟁의 히스테리가 미대륙을 휩쓸던 시기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제작 스토리 - 노동자들이 만든 영화
《대지의 소금》을 만든 또 다른 주체는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이다. 국제광산금속제련 노동조합(International Union of Mine, Mill, and Smelter Workers)은 이 영화의 제작을 지원했다. 미국 서부의 주요 광산과 관련 제조업에 기반을 둔 이 좌파 노조는 1935년 전투적 좌파노총인 산별노조회의(CIO)를 건설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지도부가 노조 내부의 공산당계 숙청을 거부하자, CIO에서 제명당하는 황당한 운명을 겪었다.
허버트 바이버먼 감독은 1947년 미하원 반미위원회에서 증언을 거부한 혐의로 텍사카드 연방교도소에서 6개월 징역을 살았다. 출소 후 그는 폴 재리코, 윌 기어, 마이클 윌슨 등과 함께 이 영화의 제작에 나섰다.
정치적 탄압과 사회적 고립,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제작진은 전문배우를 5명 밖에 고용할 수 없었다. 나머지는 그랜트 카운티의 지역주민이나 광산노조 890지부의 조합원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파업에 참여했다. 남자 주인공 후안 차콘(라몬 킨테로 역)은 실제로 노조 지부장이었다. 감독이 그가 주인공을 맡기에 너무 점잖아서 고민했지만, 여주인공 레부엘타스의 압력 때문에 그를 남주인공으로 발탁했다.
개봉 후에도 이어지는 탄압과 고립
영화가 뉴멕시코에서 제작되는 동안에도 업계의 언론은 이 영화가 공산주의자들의 전복음모라고 비난했다. 극우 반공주의 자경단원은 세트장에 총격을 가했고, 때로 정체불명의 소형 비행기가 촬영장 위로 비행했다. 갖가지 위협 속에 비밀리에 편집을 마쳐야 했고, 필름처리 업체는 작업을 하지 말라는 압박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이 영화는 개봉 후에도 고난이 계속됐다. 미국 하원은 이 영화가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영화라고 비난했고, 연방수사국(FBI)은 이 영화의 재정을 조사했다. 극우 반공단체인 재향군인회는 전국적 보이코트를 호소했다. 영화상영을 담당하는 상영 노동자들은 이 영화를 상영하지 말라는 노동조합 지도부의 지침을 받았다. 그 결과 뉴욕에서 개봉했지만, 10년 동안 겨우 12개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었다.
헐리우드 큰손들은 이 영화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대표적 영화잡지인 《헐리우드 리포터》는 이 영화가 크렘린의 직접 명령에 따라 제작됐다는 근거없는 비난을 퍼부었다.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좌파 특유의 단순무지한 “도덕 드라마”이며, “우리가 오랫동안 봤던 명확한 공산주의 선전 작품”이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대지의 소금》에 대한 가장 치졸하고 악랄한 탄압으로 여주인공 에스페란사을 맡았던 로사우라 라부엘타스(1910-1996)의 추방이었다. 미국 이민국은 촬영 막바지에 그녀를 체포해서 여권문제를 핑계로 멕시코로 추방했다. 영화는 대역을 써서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에스페란사는 다시는 미국 땅을 밟지 못했다. 1956년 프랑스 영화아카데미는 정열적 연기로 새로운 여성상을 창조한 부엘타스에게 여우주연상을 수여했다.
끈질기게 살아남은 영화
탄압과 고립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미국 밖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탄압의 역사 때문에 노동조합, 좌파단체, 여성주의단체, 영화모임, 멕시코계 이주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1960년대에는 더욱 유명해져서, 노조 회관, 여성단체, 영화학교에서 당당하게 상연되면서 고전 노동영화로 자리잡았다.
1993년 노엄 촘스키는 자신이 영화를 자주 보지도 않고 영화 평론가도 아니지만, 《대지의 소금》이야말로 잘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진정한 성과를 거둔 사례라고 평가했다. 아주 오래 전에 이 영화를 봤을 때 진짜 훌륭한 영화였다고 회고했다.
아리조나주 투산에는 이 영화의 이름을 딴 노동자 교육기관인 “《대지의 소금》 노동대학”이 있다. 이 노동대학은 노동조합과 경제정의에 관한 다양한 강의와 포럼을 진행하는데, 이 영화를 정기적으로 상영한다.
그리고 1982년에는 이 영화를 제작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됐고, 그 제목은 《처벌에 맞춘 범죄》(A Crime to Fit the Punishment)였다.(국내에서는 2006년 서울 인권영화제에서 이 다큐멘터리와 함께 상영됐다.) 또 2000년에는 이 영화를 여주인공 에스페란사(희망이란 뜻)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2막 오페라가 제작돼 공연됐다. 같은 해 허버트 바이버먼을 다룬 영화 《헐리우드 10인 중의 1인》(One of the Hollywood Ten)가 제작됐다.
아주 오래됐지만, 항상 새로운 영화
어떤 면에서 《대지의 소금》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옛날 영화로 보인다. 그리고 사회주의 계열의 사실주의 영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도 그리 틀린 평가는 아니다. 그러나 영화가 표현하는 파업의 구체적 현실은 제작된 지 65년이 지난 지금도 강력한 메시지와 감동을 지니고 있다.
장기파업에서 나타나는 노동자들 내부의 갈등, 남성과 여성의 갈등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그리고 이 갈등의 과정에서 여성이 조합원 남편과 동등한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그것도 1954년 영화에서 노동조합운동과 페미니즘의 충돌과 화해를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사실이 놀랍다.
《대지의 소금》는 1950년대 미국에서 유일하게 블랙리스트에 오른 노동영화였다. 그러나 제작 38년 뒤인 1992년 미국 의회도서관의 영구보존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영화 《대지의 소금》을 둘러싼 역사는 미국 자본주의 제국이 자랑하는 민주주의의 오점의 생생한 기록이다. 동시에 오늘 날에서 이어지는 이주 노동자와 여성의 지난한 삶과 투쟁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