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순님
어째, 내가 가는 곳마다 먼저 흔적을 남겨놓고 그러시나요
우아
박준성님을 왕창 띄워놓았네요
억제할 수 없는 질투심
암튼 방가!
건강은 유경순 님부터 미리 신경쓰쇼.
>>> Writer : 유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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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성, 김진순, 신재걸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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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많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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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길 만큼, 갈 길 역시 평탄치 않을 무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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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선배님들이 무게 중심을 잡고 헤쳐가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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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덜어 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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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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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만드신 것, 준비위 띄우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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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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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연세(?)들 생각하셔서 바쁘시더라도 건강 꼭! 챙기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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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순언니, 다리는 요즈음 어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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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이던, 돈이든, 머리가 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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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 있는 부분들 모아야 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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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디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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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길로 가나 한 길로 모아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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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에 준성 형이 인터뷰를 통해 센터 소개를 하셨기에
>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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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ze=3>하종강의 휴먼 포엠 ] | 2002년12월04일 제437호 |
> src="http://www.hani.co.kr/h21-image/blank.gif" > border=0> |
> size=4>“노동자여, 역사를
> 써라”
>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
> color=#a00000 size=3>박준성 노동자교육센터 소장, 이보다 더 화끈한 강사는 없다
>
>
>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지난해 여름, 박준성(47)씨와 함께 전남대병원 파업현장을 방문했다. 전남대병원노조 간부가 우리 두 사람을 파업하는 노동자들 앞에
> 굳이 불러세우더니 “한 말씀 하시라”고 했다. 나는 평소 하던 대로 “우리가 이렇게 파업할 수 있는 권리는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신성한
> 노동기본권으로서…” 어쩌고 하며 짧은 일장연설을 했는데, 마이크를 넘겨받은 박준성씨는 “파업하느라고 수고 많으신 동지들께, 저는 위로삼아 노래나
> 한곡 불러드리겠습니다”라고 입을 열더니 대번에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젖히기 시작했다.
>
>
> size=2>파업현장을 ‘소름 돋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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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
> src="http://img.hani.co.kr/section-kisa/2002/12/04/021080000120021204110-1.jpg"
> align=left>
사진/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에게 자신의 역사를 들려주고 싶다는
> 박준성씨. 그는 노동자들이 역사를 재구성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주체로 설 수 있다고 말한다.
>
>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
“믿는다 믿어어라아 벼언치말자 누가 머언저 마알했더언가. 에라. 이 씨팔놈들아! 잘먹고 잘살아라! 믿으라고 할 때는 언제고
> 이제 와서 노동자의 피땀을 빨아먹느냐 이 개새끼들아!”
>
>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박준성씨가 노래를 하다 말고 갑자기 병원 로비가 떠나가라 욕을 해대기 시작하자 옆에 서 있는 나는 물론 병원 로비를 가득 메운
> 사람들이 모두 움찔했다. 실제로 사람들이 어깨를 일시에 움츠리는 것이 보였다. 파업현장은 일시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
>
>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그렇다. 박준성씨가 그렇다. 노동교육을 하러 갈 때 나는 예의를 갖춘다고 말끔한 신사복 차림일 때가 많은데 박준성씨는 언제나 허름한
> 등산복 차림이다. 등에는 항상 배낭을 메고 다닌다. 동산복에 배낭을 짊어지고 수련회에 참석한 노동자들과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넘기도
> 한다. 배낭에서 큼지막한 환등기를 꺼내는 것으로 그는 강연을 시작한다. 대부분 2시간 정도 걸리는 역사 강연에 200장 넘는 슬라이드 사진을
> 사용한다. 강의 도입부분, 사진 한장과 함께 그의 목소리가 강의장을 가득 메우며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
>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세계 대공황 시기, 일본은 자국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군국주의 체제를 강화하고 대륙 침략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조선을 견고한
> 후방기지·병참기지화하면서 조선 민중과 민족해방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했습니다. 1928년, 100만명에 이르는 조선인 노동자들은 오랜 시간의 과도한
>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성인 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반, 여성 노동자는 4분의 1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전시 인플레이션으로 물가는
> 폭등했으며, 임금은 기아 수준으로 폭락했습니다.
>
>
>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
> src="http://img.hani.co.kr/section-kisa/2002/12/04/021080000120021204111-1.jpg"
> align=right>
사진/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농성 노동자, 강주룡을 아십니까?"
> 박준성씨가 교육 때마다 슬라이드로 보여주는 1931년 평원고무공장 노동자의 농성 장면.
>
>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
1931년 5월16일,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에서 회사쪽이 일방적으로 임금을 내리겠다고 통고하자 노동자들이 격분해
> 파업을 시작했습니다. 28일 밤, 파업이 시작된 뒤 공장을 점거하고 시위를 계속하던 노동자들이 아사(餓死)동맹을 결의하자 기업주가 경찰을
> 불러들여 노동자들을 회사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일본 경찰과 손을 잡은 자본가들에 의해 노동자들의 파업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에서 쫓겨난
> 여성 노동자 강주룡은 노동자들의 희망과 꿈이 폭력에 의해 사그라지는 현실에 분노하며 밤새 광목을 찢어 줄을 만들었습니다. 다음날 평양에서 가장
> 높은, 대동강가 높이 12m 되는 을밀대 지붕 위에 줄을 던지고 타고 올라가 ‘고공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일제가 얼마나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 탄압하는지 고발하면서 9시간 반 동안이나 그곳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
>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우리 49명은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종국에는 평양의 2300명 고무직공의 임금감하 원인이 될 것이므로
>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가운데 대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은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 지식입니다.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해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
>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경찰에 잡혀 평양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76시간 동안 단식하며 대항하다 검속기간이 끝나 풀려났습니다. 풀려난 뒤에도 계속 파업단
> 대표로 활약하다 다시 공장습격사건으로 잡혀 들어갔습니다. 강주룡은 다시 57시간 옥중단식을 벌이다가 극심한 건강쇠약 증세로 31년 6월4일
>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검거와 단식, 석방을 거듭하며 노동운동의 중심에서 활약하다 건강을 해친 그는 32년 8월14일,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 숨졌습니다. 그때 나이 31살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농성 노동자, 강주룡을 아십니까”
>
>
> size=2>두 시간 일사천리, 눈이 젖는다
>
>
>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두 시간 동안 일사천리로 울려퍼지는 그의 말을 들으며 사람들은 70년 전 노동자 선배의 절절한 결단이 가슴에 사무쳐 목이 잠기고
> 눈이 젖는다. 그의 슬라이드는 계속 넘어간다. ‘전평’을 넘고 ‘전태일’을 넘고 ‘동일방직’과 ‘YH투쟁’, ‘부마항쟁’을 거쳐 ‘87년
> 노동자대투쟁’의 지평이 열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가슴이 벅차올라 숨쉬기조차 버겁다.
>
>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역사의 주인인 노동자 민중에게 자신의 역사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개인에게 자서전이 있는 것처럼 노동자들도 자신과 노동운동에 대한
> 역사쓰기를 하면 좋겠어요. 역사를 재구성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주체로 설 수 있습니다. ‘이길 때까지 지는 싸움’의 역사 한가운데 서
>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자는 겁니다.”
>
>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박정희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던 70년대 중반 대학에 들어가 80년대를 살아야 했을 역사학도에게 시련의 시기가 어찌
> 없었으랴. 을 그가 즐겨부르게 된 사연 역시 눈물겹다. 1990년대 초반은 세계사 대격변의 시기였다. 소비에트가 하루아침에
> 해체되고, 동구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는 몰락했으며, 국내에서는 운동권 90% 이상이 선택한 ‘비판적 지지 노선’이 대통령 선거에서 무참히
> 패배했다.
>
>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그즈음인데 한 운동단체 노동교실에 갔더니 사람이 4명밖에 앉아 있지 않는 거예요. 그런 교육 한번 하려면 몇달 동안이나
> 준비하잖아요. ‘앉아서 강의 듣는 것만 교육이냐, 술 마시며 세상 이야기하는 것도 교육이다’ 그런 생각으로 사람들과 함께 술 한잔 마시며
> 이야기하다가 사람들이 속상해서 울고, 나는 달래다가 울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자본주의 모순구조를 인정하는 거고 미국놈들과 타협하는
> 거다’라는 생각으로 끊은 담배를 그날 7년 만에 다시 피웠어요. 혼자 집으로 돌아오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를 가르친 선배들,
> 노동현장에 있는 지식인 활동가들, 그러다가 썰물처럼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 생각이 나고…. 혼자 술에 취해 길을 걷는데 나도 모르게 ‘믿는다
> 믿어라 변치 말자 누가 먼저 말했던가…’ 그 노래가 나오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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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ze=2>“혓바닥에 단맛 들면 사람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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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그는 대학을 전체 수석으로 졸업했고 석사·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지금도 대학에서 한국근현대사 강의를 하고는 있지만 “혓바닥에 단맛
> 들면 사람 버린다”는 생각으로 기득권 세력에 등극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했다.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산행·역사기행 모임 ‘역사와 산’ 고문,
>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연구·교육위원 등으로 바쁘게 활동하는 그가 요즘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노동교육의 성과를 집약하고, 노동자 교육을
>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담당하는 일에 디딤돌을 놓기 위해 ‘노동자교육센터’를 설립하면서 김진순·신재걸씨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은 것이다.
>
>
>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지금까지 내가 해온 어떤 일보다 부담스러운 교육센터를 만들고 활동하는 일에 얼마만큼 나를 던질 수 있을까, 내가 할 몫을 감당할
> 수 있을까, 밤을 지새우면서 고민합니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도와줄 거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역사’와 함께하는 내 희망의 근거니까요.”
>
>
>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평소에도 “슬라이드 교육은 일정한 시설을 갖춘 곳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길거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교육할 수
> 없는 것이 슬픕니다”라고 말해온 박준성씨가 ‘노동자교육센터’를 통해 꿈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희망의 근거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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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MARGIN-TOP: 10px; MARGIN-LEFT: 0px; LINE-HEIGHT: 22px">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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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그림은 하종강씨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바로 그날,> 전남대병원 파업현장 방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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