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읽는데 꼭 내맘같아서(박선생님 입장이? 아님 사모님 입장에서?^^;)
어제 정기진료갔는데 아마 인터페론 시작해야겠다네요 선생님이 제가 젊다고
미루어줬는데 약을 먹어도 하늘 무서운줄모르고 올라가니...
근데 참 이상한게 보기엔 멀쩡해보여서...아픈환자같지도 않으니...
사랑니때문에 아파서 치과가도 내과진료때문에 내과에서수술도하지말고
약도먹지말고 2세도 생각하지말고...어쩌구저쩌구 아휴~뭐가 그리 복잡한지.
전기세라....근데 어케 생활고를 극복하셨는지...남의일같지도 않고--;;
근데 동지들은 저보고 그래도 너는 정규직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다 벌지 않느냐....
요즘은 이런 말들이 가슴을 횡하니... 멍들게 하네요 히히~
(정규직되시니 행복하십니까~까까...)
당분간 저의 투쟁구호는 원직에 복직되었으니
최저임금 투쟁! 빈곤투쟁! 무상의료투쟁! 입니다.-하하하
좋은이야기 감사합니다.
>>> Writer : 박준성
> 아내는 하지 말라는 옛 이야기 입니다.
> 199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 여러모로 힘들 때 였지요. 하루는 저녁 먹다가 화장실 불 끄는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
> "가까운 사람이 좀 끄면 안돼?!"
> " 쓴 사람이 꺼야지!"
>
> 점점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
> "전기세도 못벌어 오면서!"
>
> 무의식적으로 튀어 나온 말이겠지만
> 온 몸이 감전된 듯 굳어 버릴 것 같았습니다.
> 입은 영원히 침묵으로 닫혀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감정이었습니다.
> 알량한 자존의 가장 밑 둑이 허무러지는 것 같았습니다.
> 한마디 말 없이 짐보따리를 싸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 갈데가 있어야지요.
> 연구소로 갔습니다.
> 연구원들에게는 급한 글 쓴다는 핑계로 이틀을 개겼습니다.
> 난감했습니다.
> 아내가 들어오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 얼마나 다행이던지...
> 그 뒤 몇차례 후배, 제자들 주례를 서면서
> 남자건 여자건 집을 뛰쳐 나가게 되더라도 최소한 보름 쯤 버틸 돈은 따로 챙겨 두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 하기는 버틸 돈이 없었기 때문에 가출사건이 칼로 물베기 식으로 일찍 끝났을 지 모릅니다.
>
> 그해 내가 세금 냈던 일년 동안 번 총액이 98만원이었습니다.
> 한 학기 한 과목 강사료 총액이었습니다.
> 그러면서도 어디 노동자 민중운동 단체에서 강의를 하고
> 차비하라고 주는 봉투를 그냥 가져올 수가 없었습니다.
> 아내가 넣어주던 차비와 밥값 아껴가며 꼬부쳐 두었던 비상금까지
> 몽땅 2차 술값으로 털어 놓아야 제대로 강의를 한 것 같았습니다.
> 아내가 주는 활동비로 활동하던 초보 역사학자 교육활동가 시절
> 집안의 경제에 대해서는 지극히 무지 무능하고
> 아내의 가슴을 수 없이 멍들게 했던
> 철없는 남편의 옛이야기 입니다.
>
> 그 뒤 여유가 있는 조합이나 단체에서 주는 강사료를 받을 때도
> 쑥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 그래도 강사료 가지고 참으로 쓰고 싶은 대로 잘 썼습니다.
> 강의와 연구에 필요한 책과 자료
> 슬라이드 노동운동사에 필요한 도구라며
> 카메라와 가지가지 렌즈들과 필요한 소품들
> 환등기를 대체하려고
>
> 디지털 카메라, 빔 프로젝트, 노트북에 필름 스캐너까지...
> 아내가 보기에는 혀를 찰 사치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
> 환등기 걸머메고 정신없이 강의하러 다닐 때
> 강의를 요청하며 조심스럽게
> "저희 사정이 어려워서 강사료는 조금 밖에 드릴 수 없어요"하거나
> 중간 연결하는 분이 더듬 듯이
> "혹시 강사료 드리더라도 도로 투쟁기금으로 돌려 주셨으면 해요. 워낙 어려운 곳이거든요"할 때면
> '전기세'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
> 더 어려운 현장일수록 만사 제쳐놓고 먼저 달려가야할 곳이었지요.
> 앞으로도 맨 먼저 달려가야할 곳이기도 하고요.
> '희망'을 이야기하기 가장 부담스러운 곳에서
> 어떻게 '희망'과 '해방'을 이야기 할 것인가?
> 요즘 나무에 글자를 한자한자 새기면서 그 생각을 하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