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하지 말라는 옛 이야기 입니다.
199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여러모로 힘들 때 였지요. 하루는 저녁 먹다가 화장실 불 끄는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좀 끄면 안돼?!"
" 쓴 사람이 꺼야지!"
점점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전기세도 못벌어 오면서!"
무의식적으로 튀어 나온 말이겠지만
온 몸이 감전된 듯 굳어 버릴 것 같았습니다.
입은 영원히 침묵으로 닫혀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감정이었습니다.
알량한 자존의 가장 밑 둑이 허무러지는 것 같았습니다.
한마디 말 없이 짐보따리를 싸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갈데가 있어야지요.
연구소로 갔습니다.
연구원들에게는 급한 글 쓴다는 핑계로 이틀을 개겼습니다.
난감했습니다.
아내가 들어오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얼마나 다행이던지...
그 뒤 몇차례 후배, 제자들 주례를 서면서
남자건 여자건 집을 뛰쳐 나가게 되더라도 최소한 보름 쯤 버틸 돈은 따로 챙겨 두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하기는 버틸 돈이 없었기 때문에 가출사건이 칼로 물베기 식으로 일찍 끝났을 지 모릅니다.
그해 내가 세금 냈던 일년 동안 번 총액이 98만원이었습니다.
한 학기 한 과목 강사료 총액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디 노동자 민중운동 단체에서 강의를 하고
차비하라고 주는 봉투를 그냥 가져올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가 넣어주던 차비와 밥값 아껴가며 꼬부쳐 두었던 비상금까지
몽땅 2차 술값으로 털어 놓아야 제대로 강의를 한 것 같았습니다.
아내가 주는 활동비로 활동하던 초보 역사학자 교육활동가 시절
집안의 경제에 대해서는 지극히 무지 무능하고
아내의 가슴을 수 없이 멍들게 했던
철없는 남편의 옛이야기 입니다.
그 뒤 여유가 있는 조합이나 단체에서 주는 강사료를 받을 때도
쑥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강사료 가지고 참으로 쓰고 싶은 대로 잘 썼습니다.
강의와 연구에 필요한 책과 자료
슬라이드 노동운동사에 필요한 도구라며
카메라와 가지가지 렌즈들과 필요한 소품들
환등기를 대체하려고
디지털 카메라, 빔 프로젝트, 노트북에 필름 스캐너까지...
아내가 보기에는 혀를 찰 사치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환등기 걸머메고 정신없이 강의하러 다닐 때
강의를 요청하며 조심스럽게
"저희 사정이 어려워서 강사료는 조금 밖에 드릴 수 없어요"하거나
중간 연결하는 분이 더듬 듯이
"혹시 강사료 드리더라도 도로 투쟁기금으로 돌려 주셨으면 해요. 워낙 어려운 곳이거든요"할 때면
'전기세'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더 어려운 현장일수록 만사 제쳐놓고 먼저 달려가야할 곳이었지요.
앞으로도 맨 먼저 달려가야할 곳이기도 하고요.
'희망'을 이야기하기 가장 부담스러운 곳에서
어떻게 '희망'과 '해방'을 이야기 할 것인가?
요즘 나무에 글자를 한자한자 새기면서 그 생각을 하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