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사회변혁운동과 노동계급의 임무

  • 글쓴이: 노동자
  • 2005-12-13

사회변혁운동과 노동계급의 임무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 글을 시작하며
2. 개량을 포기한 사회체제와 그에 대한 저항
3. 사회변혁운동의 두 가지 전략, 두 가지 투쟁
4. 사회변혁운동의 계급적 중심과 대중적 기반
5. 두 종류의 노동계급, 그들이 지닌 다른 임무
6. 남(한국)노동계급의 임무
7. 글을 맺으며

1. 글을 시작하며

때로는 사회과학적 인식보다 문학적 직관이 사회체제의 깊숙한 곳을 더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남(한국)의 민중문학을 대표하는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쓴 작가 조세희의 문학적 직관이 아마 그런 경우일 것이다.
그의 문학적 직관은 오늘의 현실을 이렇게 고발한다.
“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제3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경험한 그대로 우리 땅에서도 혁명은 구체제의 작은 후퇴, 그리고 조그마한 개선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우리는 그것의 목격자이다.”
“우리는 억압하는 체제와 질서를 사회 대다수 구성원의 뜻과 힘으로 전복하지 못했다. 그것은 비약을 통한 질적 전환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시대의 악은 더 야비해지고 강고해져 가고 있다. 나는 혁명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혁명이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다. 단언컨대 우리에게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변화가 오지 않는 한 우리에게 21세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쓰던 1970년대 초에도 그러했지만,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오늘도 노동계급과 근로농민의 투쟁현장을 번번이 찾아가는 그는 자기의 투명한 직관으로 혁명이 “구체제의 작은 후퇴, 그리고 조그마한 개선들에 의해 저지”되었음을 목격하였고, “혁명이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는” 근본적인 변화를 열망하고 있다.
문학적 직관이 “억압하는 체제와 질서를 사회 대다수 구성원의 뜻과 힘으로 전복하지 못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고발한다면, 사회과학적 인식은 그 현실 속으로 파고 들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원인을 밝혀낸다.
사회변혁운동이 요구하는 것은 문학적 직관과 사회과학적 인식이 한 덩어리로 어우러진 예리하고 강렬한 언어이다. 그러한 언어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때, 사회변혁운동은 세상을 바꾸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이 글은 현 단계 사회변혁운동 앞에 나선 몇 가지 문제를 검토하면서 남(한국)노동계급에게 주어진 사회변혁의 임무를 논한다.

2. 개량을 포기한 사회체제와 그에 대한 저항

작가 조세희의 문학적 직관을 통하여 모습을 드러낸 오늘의 현실을 생각할 때, 머리 속에 떠오르는 문제의식이 있다. 그것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세상에 나온 시기의 남(한국)사회와 그로부터 한 세대가 흘러간 오늘의 남(한국)사회 사이에서 무엇이 바뀌었고, 또 무엇이 바뀌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이다. 30년의 시차를 두고 남(한국)사회를 바라보는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2-1) 서울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1948-1970)의 삶과 투쟁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1970년대 남(한국)노동계급은 절망과 체념 속에서 억압과 착취를 견디며 괴로워하였으나, 2000년대의 노동계급에게는 비록 아직은 미약하지만 사회변혁의 주체역량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사회변혁운동의 주체적 관점에서 보면, 노동계급에게 사회변혁의 주체역량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야말로 지난 30년 동안 남(한국)사회에서 일어난 가장 뜻깊은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지난 시기 남(한국)사회에서 억압과 소외, 착취와 천대에 짓눌리며 체념과 절망을 안고 살아온 노동계급은 오늘 사회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함으로써 사회변혁의 객관적 조건을 마련하였다. 사회변혁의 객관적 조건은 앞으로 사회변혁의 주체역량이 장성할수록 더욱 무르익게 될 것이다.
지배, 착취, 억압에 짓눌려온 노동계급에게 사회변혁의 주체역량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사회변혁운동이 합법칙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뜻한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자신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사회체제를 거부하고 새로운 사회체제를 세우게 되는 데, 그것을 사회변혁운동 발전의 합법칙성이라 한다.
사회변혁운동의 합법칙적 발전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력으로 추진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작가 조세희의 문학적 직관이 ‘더 야비해지고 강고해져 가는 이 시대의 악’을 고발하였다면,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사회과학적 인식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시대의 악’이 휘두르는 폭력에 굴하지 않고 의식화되고 조직화되어 가는 주체역량의 장성을 논하며, 사회체제가 자주적으로 발전해 가는 미래전망을 논한다.

2-2) 흔히 군사독재정권(military dictatorship)이라고 부르는 파쇼권력에 의해서 유지되었던 사회체제, 곧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야만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해온 사회체제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저항과 투쟁이 차츰 거세어지자 그것에 떠밀리면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고, 그 후퇴공간에 사회개량(social reform)의 물결이 흘러들었다. 그 물결은 예민한 감각이 아니고서는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아주 천천히 남(한국)사회체제 속으로 흘러들었다.
군사독재정권이 물러가고 형식적 민주주의(formal democracy)가 실현된 것이다. 사회개량은 지난 30년 동안 남(한국)사회에서 일어난 가장 커다란 변화이다.
군사독재정권의 퇴장과 형식적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이루어진 사회개량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목숨을 건 저항과 투쟁으로 얻어낸 정치적 성과이면서도 그들의 투쟁을 멈추게 한 배반요인이기도 하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은 그 투쟁을 저지하는 사회개량이라는 배반요인에 의해서 끊임없이 그 대오가 흩어지고 그 진로가 교란 당했던 것이다.
오늘 남(한국)사회는 사회변혁역량의 초기적 형성과 사회개량이라는 배반요인의 퇴조 사이에 있는 어느 지점에 와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남(한국)사회를 바라보아야 한 세대가 흐르는 동안에 바뀐 것이 무엇이고 바뀌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2-3) 사회개량을 알지 못했던 한 세대 전이나 사회개량의 물결이 흘러 들어온 오늘에나 바뀌지 않은 것은, 남(한국)사회체제의 근본성격이다.
지금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살아가는 현실이 명백하게 입증하는 것처럼, 군사독재정권이 물러가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해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억압과 소외, 착취와 천대를 강요하는 사회체제의 근본성격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회개량이 이루어졌다는 2000년대의 남(한국)사회에서 억압과 소외, 착취와 천대는 전혀 줄어들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다만 사회개량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경제성장의 신화(the myth of economic growth) 뒤편에 잠시 가려지는 것 뿐이다.
사회개량으로 바꾸어진 것은 사회체제의 근본성격이 아니라 사회변혁운동의 현실이다. 사회개량의 환상에 사로잡힌 일부 운동대오가 사회변혁의 역사적 전망을 내려놓고 사회변혁의 길에서 벗어났으며, 사회변혁운동에 대해 경계선을 긋는 새로운 운동, 곧 사회개량운동이 자리를 잡았다.

2-4) 사회개량은 사회체제의 고유한 성격도 아니고 사회체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지도 못한다.
제국주의체제의 내적 모순과 그 체제에 예속된 남(한국)사회체제의 내적 모순이 겉으로 드러나면서 몹시 격화될 때, 사회개량은 멈추게 되고 그 동안 경제성장의 신화 뒤편에 잠시 가려졌던 사회체제의 근본성격이 드러난다. 그것은 사회개량을 내던진 야만적인 모습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쥐어짜다 못해 아예 죽음으로 내모는 ‘벌거벗은 야만’이다. 비정규직 철폐와 쌀시장 사수를 부르짖는 노동계급과 근로농민의 목덜미를 피묻은 방패로 내려치고 진압봉을 휘두르며 물대포를 쏘아대는 폭력경찰의 만행, 그리고 강제연행과 구속수감으로 이어지는 정치탄압이 그것이다. 노무현정권이 추구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는 그 야만성을 감출 수 없을 만큼 무능하고 무의미하게 되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짓누르는 진압경찰의 폭력이 해마다 더욱 격해지는 것은,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사태로 남(한국)의 경제성장신화가 깨져나가고 사회경제적 조건이 급속히, 그리고 해마다 지속적으로 악화되어온 것과 관련된다.
경제성장신화가 깨져나간 것은 제국주의체제가 자기에게 예속된 남(한국)사회체제에서 이윤수탈을 전례 없이 증대시켰음을 뜻한다. 제국주의적 이윤수탈이 증대된 까닭은, 제국주의체제가 과잉투자(overinvestment)와 과잉생산(overproduction)이 불러일으킨 내파적 위기(implosive crisis)에 빠져들었고, 그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제국주의체제가 자기에게 예속된 남(한국)사회체제에 대한 수탈강도를 부쩍 높였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적 수탈강도가 높아져 강한 외압을 느끼게 된 남(한국)지배계급은 사회개량을 내던지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쥐어짜다 못해 이제는 죽음으로 내모는 야만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남(한국)노동계급의 60%를 비정규직 노동자로 만들어 최저생계비를 밑도는 저임금과 정치적 무권리상태에 묶어버리고 한층 가혹하게 쥐어짜는 착취만행, 그리고 남(한국)근로농민이 지켜온 마지막 농업기반마저 파괴하려는 압살만행은, 군사독재정권의 퇴장과 형식적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추진된 사회개량을 포기한 사회체제가 얼마나 끔찍스럽게 야만적으로 바뀌는지를 실증하는 것이다.
현실은 사회개량을 포기한 사회체제에 맞선 노동계급의 처절한 저항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2004년 2월 14일 현대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 분신자살, 3월 9일 현대중공업 노동자 자살, 4월 13일 서울에서 건설노동자 자살, 5월 7일 택시노조 노동자 자살, 6월 27일 택시노조 노동자 분신자살, 8월 23일 대우조선 노동자 자살, 10월 4일 부산에서 건설노동자 자살, 12월 26일 한진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 자살, 2005년 1월 21일 금호타이어 노동자 자살, 같은 날 대우조선해양 노동자 자살, 3월 4일 한원컨트리클럽 노동자 자살기도, 9월 4일 현대자동차 하청기업 비정규직 노동자 자살, 9월 10일 화물연대 노동자 분신자살.
또한 현실은 마지막 농업기반마저 파괴당하는 사회체제에 맞선 근로농민의 저항이 올해 11월 이후 분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05년 11월 12일 담양군 농민 음독자살, 11월 17일 성주군 농민 음독자살, 11월 18일 수원시 농민 음독자살, 11월 24일 보령군 농민 시위도중 경찰폭력으로 사망, 11월 30일 나주시 농민 음독자살.
현대자동차 비정규 노동자는 절규한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그 죽음으로 얼마나 더 아파야 우리는 하청이라는, 비정규라는 그 서러운 이름을 떨쳐낼 수 있을까.” (『프레시안』 2005년 10월 27일자)
2-5) 용역깡패와 진압경찰 뒤에는 그들을 조종하는 지배계급이 있다.
그들을 조종하는 지배계급은 정권을 잡기 위해서 자기들끼리 날카롭게 대립하며 경쟁하는 두 부류의 정치세력인데, 권력기관을 틀어쥔 노무현 정권, 그리고 그 정권에 맞서 싸우며 권력기관을 차지하려는 한나라당이다.
이 두 부류의 정치세력은 자기가 집권하려고 서로 격렬하게 싸우다가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저항을 짓누를 때는 곧잘 연대협력한다.
남(한국)사회체제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한동안 그럴싸하게 속여왔던 사회개량의 간판을 내던지고 야만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까닭은, 그 체제 뒤에 자기 정체를 감추고 예속과 수탈의 올가미를 더욱 거세게 옥죄는 또 하나의 체제가 있기 때문이다. 남(한국)사회체제의 목에 걸어놓은 예속과 수탈의 올가미를 조여대는 그 체제를 제국주의체제(imperialist system)라 한다.
최근 남(한국)의 해외수출액이 사상 최고에 이르고 주식시장의 주가지수가 오르고 외환보유액이 넘쳐나고 기업의 평균이윤은 62%나 늘어나는 현상과는 전혀 무관하게,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실질소득(real income)이 0%로 떨어지고 절대적 궁핍에 빠져드는 까닭은, 제국주의독점자본이 남(한국)경제의 목에 걸어놓은 예속과 수탈의 올가미를 더욱 거세게 조여대기 때문이다. 남(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제국주의체제의 올가미를 끊어버리지 못하는 한, 자기의 자주성이 짓밟히고 마지막 남은 생존권마저 빼앗기는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2-6) 남(한국)의 지배계급과 독점자본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쥐어짜다 못해 아예 죽음으로 내몰면서도, 주한미국군에게는 온갖 특권과 특혜를 주고 천문학적 분담비를 퍼주면서 영구주둔을 간청하고, 평택시 일대를 미국군 군사기지로 넘겨주고, 이라크침략전쟁에 파병하라는 부시의 강요에 굴복하고, 알짜기업을 헐값에 팔아 넘기고 쌀시장을 열어놓으라는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요구를 따르고 있다.
남(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국내지배계급이 세워놓은 예속적이고 반민중적인 정권, 사회개량도 추진하지 못할 만큼 낡고 무능한 정권을 전면적으로 교체하여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자신의 새로운 정권,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정권을 세우지 못하는 한, 자기의 자주성이 짓밟히고 마지막 남은 생존권마저 빼앗기는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피묻은 방패와 진압봉을 휘두르며 물대포를 쏘아대는 경찰의 폭력에 저항하면서 생존권을 지키려는 투쟁에 나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주어진 것은, 세상을 바꾸는 투쟁으로 제국주의체제의 올가미를 끊어버리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정권을 세우는 사회변혁의 임무이다.

3. 사회변혁운동의 두 가지 전략, 두 가지 투쟁

남(한국)사회변혁운동은 두 가지 전략을 추진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1) 사회변혁운동의 전략은 사회개량도 추진하지 못할 만큼 낡고 무능한 정권을 퇴진시키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권을 세우는 집권전략이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내놓은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는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사회변혁운동의 투쟁구호인데, 사회변혁이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신의 정권을 세우는 것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신의 정권을 세우는 집권전략은 ‘좌파이론’에서 말하는 계급투쟁전략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서로 다르다.
‘좌파이론’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통일전선정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단독정권을 세우는 전략을 논한다. ‘좌파이론’의 계급투쟁전략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신의 정권을 세우는 집권전략과 다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권이란 노동계급이 정권의 중심에 서고 근로대중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실질적 민주주의(real democracy)를 실현하는 가장 민주적인 정권이다. 그 집권과정에서 배제되는 것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요구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한사코 반대하는 소수의 사회정치세력밖에 없다. 소수의 사회정치세력을 제외하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참여한다는 점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권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사회정치세력들이 가장 폭넓게 정치적으로 연합한 통일전선의 기반 위에 세워지는 민주정권 곧 통일전선정권이다.
그런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자신의 정권을 선거전의 승리로 세우지 못한다.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선거는 국내지배계급이 틀어쥔 지배구조 안에서 실시되므로, 그런 선거를 통해서는 사회체제의 근본성격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선거제도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지배계급을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바꾸어놓는 그야말로 형식의 교체에 지나지 않는다.
정권을 틀어쥔 국내지배계급의 체제장악력이 내분 따위로 상당히 약화된 조건에서 선거를 치르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진압경찰의 저지선도 뚫지 못하는 힘으로 선거전을 벌여 국내지배계급의 체제장악력을 뚫어보겠다는 생각은 오산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신의 정권을 세우는 집권전략은 그 전략을 강하게 떠밀어 가는 추진력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그 추진력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신의 정권을 세우는 집권전략을 떠밀어 가는 추진력이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어떻게 하면 집권전략의 추진력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밝혀내는 것이다.
여러 갈래의 사회변혁이론들이 한결같이 논증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변혁운동의 역사적 경험에서도 뚜렷이 입증된 것처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집권전략의 추진력을 갖는 것은 오로지 그들의 투쟁에서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투쟁이란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을 뜻한다. 그 투쟁의 전화발전과정은 대중투쟁의 동학(動學)을 통하여 인식할 수 있다. 대중투쟁의 동학에 따르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은 대체로 네 단계를 거치면서 전화발전된다. 산발적 생존권사수투쟁→제도개선 총파업투쟁→정권퇴진 총파업투쟁→민중항쟁이 그것이다.
이 네 단계의 투쟁은 사회변혁운동의 전략적 수세기, 전략적 대치기, 전략적 공세기에 각각 조응한다. 산발적 생존권사수투쟁과 제도개선 총파업투쟁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사회변혁운동의 전략적 수세기에 벌이는 투쟁이고, 정권퇴진 총파업투쟁은 그 운동의 전략적 대치기에 벌이는 투쟁이며, 민중항쟁은 그 운동의 전략적 공세기에 벌이는 투쟁이다.
사회변혁운동이 전략적 수세기를 벗어나 전략적 대치기로 상승발전하고, 다시 전략적 대치기를 거쳐 전략적 공세기로 상승발전하는 것은, 계속되는 투쟁과정에서 쌓이고 쌓인 사회변혁역량이 마침내 질적 변화의 임계점(critical pont of qualitative change)을 순식간에 넘어서면서 사회변혁운동을 급진전시키는 매우 역동적인 과정이다.
사회변혁운동의 전략적 수세기에는 산발적 생존권사수투쟁과 제도개선 총파업투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 투쟁력과 투쟁경험이 쌓이고 운동주체가 단련강화된다.
지금 남(한국)사회변혁운동은 산발적 생존권사수투쟁이 곳곳에서 벌어지면서, 비정규직 철폐와 쌀시장 사수를 요구하는 제도개선 총파업투쟁이 벌어지는 전략적 수세기에 있다.
사회변혁운동이 전략적 수세기에 있다고 해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언제나 방어전만 벌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사회변혁운동의 전략적 수세기에도 전술적 공세를 가해야 하며, 전술적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산발적 생존권사수투쟁과 제도개선 총파업투쟁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전술적 공세를 가하고 전술적 승리를 쟁취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기나긴 전략적 수세기를 지나온 사회변혁운동이 질적 변화의 임계점을 넘어서 전략적 대치기로 들어가는 상승발전은 그러한 전술적 승리가 축적된 역량에 의해서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산발적 생존권사수투쟁과 제도개선 총파업투쟁에서 전술적 승리를 쟁취할 때, 사회개량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을 저지하는 배반요인이기를 멈추고 그들의 투쟁대상으로 바뀌어진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은 사회개량을 거부하고 사회변혁을 요구하게 된다. 사회변혁을 요구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격렬한 투쟁 속에서 사회개량은 급속도로 폐기된다.
지금 남(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파업투쟁은 사회개량의 잡다한 배반요인들을 한꺼번에 청산하는 가장 강력한 대립물로 성장전화하고 있다.
산발적 생존권사수투쟁과 제도개선 총파업투쟁으로 사회변혁역량이 축적강화되지 않은 조건에서 느닷없이 정권퇴진 총파업투쟁에 나서려는 것은 대중투쟁의 동학을 모르는 무지한 선동가들의 오류이다.
더욱이 정권퇴진 총파업투쟁도 벌이지 못하는 조건에서 민중항쟁에 나서겠다는 것은 비과학적 급진주의에서 흘러나온 조급증(impatience)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집권전략을 추진하는 데서 중요한 것은, 산발적인 생존권사수투쟁의 동력을 제도개선 총파업투쟁으로 결집시키고, 그 결집된 힘으로 전술적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며, 또한 제도개선 총파업투쟁의 전술적 공세를 통하여 집권전략의 추진력을 더욱 강화하며, 정권퇴진 총파업투쟁을 착실히 준비하는 것이다.
최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공조관계가 깨져나가고, 민주노총이 홀로 벌인 비정규직 철폐 총파업투쟁에 산하 노조들 가운데 대기업 노조들은 뒤로 빠지고 그나마 약 10% 밖에 참가하지 못한 실정은, 제도개선 총파업투쟁의 동력이 집권전략의 추진력으로 축적되지 못하고 사그라졌음을 말해준다.
돌이켜보면, 1997년과 1998년에 민주노총은 제도개선 총파업투쟁을 성과적으로 벌인 경험이 있다. 민주노총은 1997년에 노동법개정투쟁본부와 범국민대책위원회를 내오고, 제도개선 총파업투쟁을 네 단계에 걸쳐 벌였다. 1996년 12월 26일부터 1997년 1월 2일까지 이어진 제1단계 총파업투쟁에는 매일 평균 170-180개의 노조와 22만 명의 조합원이 참가하였다. 1997년 1월 3일부터 1월 14일까지 이어진 제2단계 총파업투쟁에는 최대 212개 노조와 21만1천731명의 조합원이 참가하였다. 1월 15일부터 1월 19일까지 이어진 제3단계 총파업투쟁에는 최대 388개 노조와 35만856명의 조합원이 참가하였다. 1월 20일부터 2월 28일까지 이어진 제4단계 총파업투쟁에는 최대 135개 노조와 14만373명의 조합원이 참가하였다.
1997년 초 두 달 동안 계속된 총파업투쟁에 연인원 387만8천211명의 노동자가 나섰으며, 주요도시에서 열린 대중집회에 연인원 150만 명이 참가하였던 것이다.
1998년 5월 27일과 28일에 벌어진 제도개선 총파업투쟁에는 최대 132개 노조와 12만3천416명의 조합원이 나섰으며, 주요도시에서 열린 집회와 행진에 6만 명이 참가하였다. 7월 14일과 15일에 벌어진 총파업투쟁에는 최대 70개 노조와 15만8천645명이 참가하였다.
그처럼 공세적인 총파업투쟁은 민주노총이 세워진 뒤 불과 2-3년밖에 되지 않는 초창기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세워진 뒤로 10년이 되는 올해에 벌어진 총파업투쟁은 너무 미약하였다. 이것은 지난 10년 동안 노동계급이 벌인 총파업투쟁이 사회변혁역량으로 축적강화되지 못하였음을 뜻하며 대중투쟁의 전화발전경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뜻한다.
민주노총이 걸어온 민주노조운동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깎아 내리는 것은 그 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가능성을 읽지 못하는 지나친 혹평일 것이다.
그렇지만 실질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사회정치세력들이 가장 폭넓게 정치적으로 연합한 통일전선의 기반 위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신의 정권을 세우는 집권전략과 무관하게 지속된 노동계급의 총파업투쟁은, 그 투쟁이 10년이 아니라 100년 동안 지속된다고 해도 사회변혁역량을 축적강화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은 100년이 넘도록 미국, 유럽연합, 일본의 노동계급이 벌이는 총파업투쟁에서 현실로 입증되었다.
자기의 총파업투쟁과 집권전략을 하나로 이어주는 통일전선의 중심에 당당히 서서 자신과 근로대중을 사회변혁의 길로 이끌어 가는 것, 이것이 남(한국)노동계급의 임무이다.

3-2) 사회개량도 추진하지 못할 만큼 낡고 무능한 정권이 퇴진하고, 새로 세워지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민주적 정권이 제국주의체제에 결박된 예속정권이 아니라 자주적 정권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세우는 정권은 자주적 민주정권인 것이다.
제국주의체제와 국내지배계급은 지배예속관계로 결합되었으므로, 제국주의체제에서 벗어나는 반제투쟁과 그 체제에 결박된 예속정권을 퇴진시키는 집권투쟁은 서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반제투쟁이 승리하여 제국주의체제에서 벗어날 때, 그 체제에 결박된 예속정권을 퇴진시키고 자기의 정권을 세울 수 있으며, 집권투쟁에서 승리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제국주의체제에 결박된 예속정권을 퇴진시킬 때, 제국주의체제의 지배구조가 결정적으로 파열붕괴된다.
그러므로 자주적 민주정권을 세우는 집권투쟁과 지배예속관계를 끊어버리는 반제투쟁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단계 사회변혁운동의 전략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반제투쟁전략이자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집권투쟁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반제투쟁과 집권투쟁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변혁전략으로 결합된 투쟁이다.
그런데 ‘좌파이론’은 반제투쟁과 집권투쟁을 갈라놓고, 반제투쟁을 집권투쟁의 부속물 정도로 여기는데, 그것은 제국주의체제의 지배구조와 그것에 결박된 예속정권의 관계를 너무 안이하게 바라보는 인식결핍으로 생각된다.
반제투쟁전략의 핵심은 제국주의체제와 예속정권 사이에 형성된 지배예속의 고리를 찾아내서 끊어버리는 것이다. 한미동맹관계와 한일동맹관계는 지배예속의 고리를 단단히 얽매어 놓은 제국주의체제의 두 측면이다. 물론 남(한국)정권을 결박한 제국주의체제의 두 측면에서 결정적인 것은 한미동맹관계이다.
그 체제를 치장하고 있는 동맹의 기만적 외피를 조금만 벗겨내면 지배예속의 고리가 드러난다. 한미동맹관계를 얽매어 놓은 지배예속의 고리는 여러 개이다.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의 고리가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엮어져 지배예속관계의 총체를 이루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제국주의체제의 경제적 침탈행위에 붙여진 이름이라면, 한미동맹은 제국주의체제의 정치군사적 지배행위에 붙여진 이름이다. 제국주의체제는 신자유주의라는 간판을 내걸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이익을 침탈하고, 한미동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지배한다. 제국주의체제가 남(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지배한다는 말은, 예속정권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지배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제국주의체제의 지배구조가 간접적 지배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남(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자기의 일상생활에서 제국주의체제의 지배압력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제국주의체제가 남(한국)정권을 결박한 지배예속관계의 현실을 사회과학적 안목으로 파헤칠 때,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자주성을 짓밟는 제국주의체제의 반동적 지배력이 그 숨겨진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제국주의체제가 남(한국)의 정권과 시장을 결박한 지배예속관계의 현실은 정치군사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에서 그 실상을 드러낸다.
지배예속관계의 정치군사적 측면은 한(조선)반도의 정전체제를 미국의 제국주의군부세력이 다른 제국주의군부세력을 제쳐놓고 배타적으로 틀어쥔 데서 드러나며, 그 관계의 경제적 측면은 미국, 일본, 유럽연합의 제국주의독점자본이 남(한국)시장경제를 이리저리 갈라놓고 제각기 타고 앉은 데서 드러난다.
지배예속관계의 정치군사적 측면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여중생 두 명을 장갑차로 깔아 죽인 살인미군에게 주한미국군 군사법정이 무죄평결을 내리고 미국으로 빼돌리거나, 평택시 일대를 자기의 군사기지로 영구히 강탈하려는 것과 같은 제국주의군부세력의 만행이 드러날 때이다.
주한미국군 철군투쟁은 제국주의군부세력의 만행을 드러냄으로써 제국주의체제의 간접적 지배형태를 벗겨내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 대한 제국주의체제의 반동적 지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반제투쟁의 핵심부분이다.
다른 한편, 지배예속관계의 경제적 측면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신자유주의라는 간판 아래서 남(한국)시장경제를 타고 앉은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침탈만행이 드러날 때이다. 남(한국)시장경제를 타고 앉은 국제금융자본은 국내독점자본을 압박하여 노동계급을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 극빈자로 내몰고 있으며, 세계 농산물시장을 틀어쥔 국제농업자본은 세계무역기구(WTO)를 앞세워 근로농민의 마지막 농업기반인 쌀농사마저 파괴하고 있다.
지금 남(한국)에서 벌어지는 노동계급의 비정규직 철폐투쟁과 근로농민의 쌀시장 사수투쟁은, 국내독점자본의 착취와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야만적 침탈에 맞서 싸움으로써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 대한 제국주의체제와 남(한국)사회체제의 이중적 착취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투쟁이다.
평택 군사기지화 저지투쟁이 제국주의군부세력에 맞서 싸우는 반제투쟁이자 제국주의군부세력에게 굴종하는 남(한국)예속정권에 맞서 싸우는 계급투쟁인 것처럼, 비정규직 철폐투쟁과 쌀시장 사수투쟁 역시 노동계급과 근로농민에 대한 국내지배계급의 착취에 맞서 싸우는 계급투쟁이자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침탈에 맞서 싸우는 반제투쟁인 것이다.
평택 군사기지화 저지투쟁, 비정규직 철폐투쟁, 쌀시장 사수투쟁이 제국주의체제와 그 체제에 결박된 예속정권과 국내독점자본의 야만성을 얼마나 적나라하게 드러내느냐에 따라서 그 투쟁에 대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참여와 지지의 정도가 정해진다.

4. 사회변혁운동의 계급적 중심과 대중적 기반

사회변혁운동은 계급적 중심(class center)과 대중적 기반(popular basis)을 갖는 운동이다. 계급적 중심과 대중적 기반을 가진다는 점에서, 사회변혁운동은 그 밖의 다른 사회운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회변혁운동의 계급적 중심이란 노동계급(working class)이 운동의 중심에 선다는 뜻이고, 그 운동의 대중적 기반이란 농민을 비롯한 근로대중(working masses)이 운동의 기반으로 된다는 뜻이다.
사회변혁운동은 계급적 중심과 대중적 기반이 형성되고 그것이 운동력으로 수렴될 때, 비약적으로 강화발전될 수 있으며 무비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다.
반면에, 계급적 중심과 대중적 기반이 모두 빈약할 때, 또는 그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갖추지 못할 때 사회변혁운동은 기형적, 파행적으로 될 뿐 아니라, 사회변혁을 반대하는 세력의 공세를 뚫고 나가지 못하고 결국 좌절하게 된다.
만일 노동계급이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에 서서 근로대중과 함께 투쟁하지 않고 자기의 계급운동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경우, 그 운동은 대중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고립되거나 약화될 것이며, 반대로 만일 근로대중이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을 차지하고 그 운동을 자기의 대중운동으로 끌어가는 경우, 그 운동은 계급적 중심을 잃고 표류하거나 실종될 것이다.
노동계급이 사회변혁운동의 대중적 기반 위에서 운동의 중심을 세울 때, 그리하여 근로대중이 결집한 운동의 기반이 사회변혁운동의 계급적 중심과 든든하게 결합할 때, 사회변혁운동은 불패의 위력을 발휘하며 전진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변혁운동의 계급적 중심을 세우고 대중적 기반을 갖추는 것은 사회변혁운동의 승패를 결정하는 최대의 전략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명백하게도, 사회변혁운동의 계급적 중심을 세우는 것은 노동계급의 투쟁에 의해서 가능하며, 그 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형성하는 것은 근로대중의 투쟁에 의해서 가능하다.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에 서는 노동계급은 생산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지배와 착취에 순응하는 미조직 노동자들(unorganized workers)이 아니라 생산현장에서 자행되는 지배, 착취, 억압에 저항하는 조직화되고 의식화된 노동자들(organized and consciousness-raised workers)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한결같이 지배와 착취 아래 있지만,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것은 노조운동에 참여하는 노동계급과 농민운동에 참여하는 근로농민 밖에 없다. 그 밖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체념과 절망 속에서 살고 있다. 노조운동에 참여하는 노동계급과 농민운동에 참여하는 근로농민이 지배, 착취, 억압에 저항하는 생존권사수투쟁을 벌이는 것은, 그들이 각각 노동조합이나 농민회 같은 대중조직에 속해 있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그들이 노동계급이라는 것만으로 사회변혁운동의 계급적 중심이 될 수 없으며, 근로대중 역시 그들이 근로대중이라는 것만으로 그 운동의 대중적 기반으로 될 수 없다. 노동계급은 지배와 착취에 저항할 때 선진적인 사회계급으로서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며, 근로대중 역시 지배와 착취에 저항할 때 진보적인 정치세력으로서 사회변혁역량을 갖게 된다.
노동계급이 사회변혁운동의 계급적 중심에 서는 과정이나, 근로대중이 사회변혁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쌓고 다지는 과정은 의식화와 조직화의 과정이자 실천과 투쟁의 과정이다.
그러한 의식화와 조직화를 떠밀어 가는 힘, 그리고 그러한 실천과 투쟁을 전개하는 힘은 허공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정치조직(political organization)에서 생겨난다. 다시 말해서, 사회변혁운동의 계급적 중심도 정치조직에 의해서 세워지며, 그 운동의 대중적 기반 역시 정치조직에 의해서 마련되는 것이다.
현 시기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사회변혁운동의 계급적 중심을 세우고 대중적 기반을 마련하는 정치조직을 통일전선체(united-front body)라 한다.
통일전선체는 진보적인 사회정치세력이 무정형하게 모인 집합체가 아니라, 계급적 중심과 대중적 기반을 가진 진보적 정치연합체(progressive political association)이다. 통일전선의 계급적 중심이 서지 못하고 대중적 기반이 갖추어지지 못하였을 때, 그것은 진보적 정치연합체가 아니라 일반적 연대협력체(joint cooperative body)에 지나지 않는다.
‘좌파이론’에서도 ‘공동전선’ 또는 ‘진보정치연합’이라는 말을 간혹 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공동전선’이나 ‘진보정치연합’을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정치연합을 지원방조하는 보조적 지위와 전술적 역할에 머물러있는 근로대중의 연대협력체 정도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런 개념들은 계급적 중심과 대중적 기반을 가진 통일전선이라는 전략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현 시기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통일전선체는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가운데 근로대중이 광범위하게 결집함으로써 형성되는 정치연합체이다.
통일전선은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추진되는 사회변혁의 전략적 운동형태이다. 만일 사회변혁운동이 통일전선이라는 전략적 운동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그 운동은 대중적 기반을 잃어버리고 고립된다.
자본주의체제가 발달하지 못한 사회의 노동계급은 아직 성장하지 못한 사회계급이므로 자기 힘만으로 사회변혁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아직 성장하지 못한 노동계급은 농민을 비롯한 근로대중과 결합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사회변혁운동을 떠밀어 가게 된다. 그에 비해서, 오늘 남(한국)노동계급은 지난날의 성장하지 못한 사회계급이 아니라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계급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한 사회계급으로 성장하였다고 해서 자기 힘만으로 사회변혁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이 성장한 사회에서도 사회변혁운동은 여전히 통일전선의 운동전략을 요구하게 되며 통일전선의 운동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4-1) 노동계급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한 사회계급으로 성장하였다는 말은, 노동계급 전체가 사회변혁의 임무를 수행한다는 뜻이 아니다. 노동계급 전체가 사회변혁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노조운동에 참여해온 노동계급이 사회변혁의 주체임을 자각할 때 그들이 사회변혁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 남(한국)노동계급의 87%는 노조운동에 참가하지 않는 미조직 노동자로 흩어져 있다. 미조직 상태에 있는 87%의 노동계급은 사회변혁의 임무를 수행하는 현실역량이 아니라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잠재역량으로 될 뿐이다.
노조운동에 참여한 13%의 노동계급이 사회변혁의 주체임을 자각할 때 사회변혁의 임무를 수행하는 현실역량을 갖게 된다.
불과 13%의 현실역량밖에 갖지 못한 노동계급은 사회변혁의 주도세력으로 나서지는 못하며, 더욱이 13%의 현실역량조차도 사회변혁의 임무를 아직 자각하지 못하고 사회변혁의 과학적 전망을 갖지 못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한 현실적 한계를 가진 노동계급이 독자적인 힘으로 사회변혁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상에 가깝다.
물론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 그리고 1997년과 1998년의 총파업투쟁에서 노동계급 자신이 경험하였듯이, 어떤 특별한 계기에 노동계급의 투쟁력이 왕성히 분출되면서 노동계급 전체의 의식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87%의 잠재역량 가운데 상당부분이 현실역량으로 전환되는 정세의 급변이 있을 수 있지만, 사회변혁운동은 그러한 정세의 급변을 막연하게 기다릴 수 없으며, 설령 정세가 그처럼 급변한다 해도 평소에 노조운동의 준비태세가 허술하면 성과를 얻지 못한다.
13%의 현실역량을 가진 노동계급이 사회변혁의 주도세력으로 나서려면, 우선 나머지 87%의 잠재역량을 현실역량으로 바꾸어내는 민주노조운동을 결정적으로 확대강화하여야 하며, 그와 더불어 민주노조에 참여한 노동계급이 근로대중과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하여야 한다. 민주노조가 통일전선에 나설 때, 그리하여 노동계급이 근로대중과 정치적으로 연합할 때, 그때에 비로소 노동계급은 사회변혁의 임무를 수행하는 현실역량을 갖는 것이며, 자기의 생존권을 지키는 민주노조운동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의 생존권을 빼앗는 폭력의 근원을 걷어내는 사회변혁운동으로 전진하게 되는 것이다.
통일전선에 나선 노동계급은 자기의 생존권을 빼앗는 폭력의 근원과 근로대중의 생존권을 빼앗는 폭력의 근원이 동일한 것임을 발견하게 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변혁의 임무를 깨닫게 된다. 통일전선은 자주적 민주정권을 세우는 정치문제를 생각해본 적이 없는 노동자들을 자주적 민주정권을 세우는 사회변혁의 임무수행에로 이끌어 간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변혁의 임무를 깨달은 노동계급은 민주노조의 생존권사수투쟁으로부터 과감하게 통일전선의 변혁적 정치투쟁으로 나아감으로써 광범위한 근로대중을 사회변혁운동에 이끌어 들인다. 광범위한 근로대중을 사회변혁운동에 이끌어 들이는 것은 현 시기 남(한국)노동계급의 당면임무이다.
노동계급이 아니고서는 그러한 임무를 수행할 사회계급이 없다.

4-2) 노동계급이 통일전선의 중심에 서야 하는 까닭은, 사회변혁역량을 노동계급의 역량을 중심으로 편성해야 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선행이론은 사회변혁역량을 편성할 때 힘의 우위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통일전선을 이해하였다. 그 이론에서는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전략이 역량을 편성하는 범위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통일전선의 의의와 목적을 사회변혁역량을 편성할 때 힘의 우위를 확보하는 문제로 한정할 경우, 노동계급이 아직 성장하지 못한 前자본주의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계급은 근로농민이므로, 그러한 사회에서는 근로농민이 통일전선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근로농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前자본주의사회에서도 통일전선의 중심에 서는 사회계급은 역시 노동계급이다. 사회계급구성에서 노동계급이 양적으로 소수인데도 통일전선의 중심에 서야 하는 까닭은, 사회변혁역량이 사회계급구성에서 차지하는 양적 비중에 따라서 편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변혁역량은 사회변혁이 진전됨에 따라 자주성을 가장 완성된 형태로, 가장 선진적으로 실현하는 사회계급을 중심으로 편성되어야 한다. 사회변혁이 진전됨에 따라 자주성을 가장 완성된 형태로, 가장 선진적으로 실현하는 사회계급은 노동계급이다. 다른 근로대중과 달리 노동계급은 개별적으로 흩어져서 노동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조직되어 노동하는 유일한 사회계급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자기의 생존권사수투쟁을 반제투쟁과 집권투쟁으로 상승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통일전선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통일전선의 중심에 설 때, 자기의 자주성을 가장 완성된 형태로, 가장 선진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
통일전선의 중심에 서는 것은 현 시기 남(한국)노동계급의 당면임무이다.

5. 두 종류의 노동계급, 그들이 지닌 다른 임무

사람은 개별적, 고립적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정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 관계를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라 하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사회적 존재(social being)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생산관계(relations of production)이다.
생산관계란 직접적 생산자와 생산수단 소유자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이다. 현존하는 사회적 생산관계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 밖에 없다.
생산관계에서 결정적인 것은 생산수단(means of production)의 소유문제이다.
생산관계는 생산수단을 어느 계급이 소유하는가에 따라서 그 관계의 성격이 결정되며, 사회적 생산의 동기와 목적이 정해진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는 개별자본가가 소유한 생산수단과 노동자가 그에게 판매한 노동력이 상호결합된다. 그 관계는 결국 생산수단 소유자와 노동력 판매자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 곧 자본계급과 노동계급의 사회적 관계이다.
개별자본가는 생산수단을 소유함으로써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에서 직접적이고 배타적인 통제력을 행사하게 되며 그로써 생산관계 자체를 자기 손에 틀어쥐게 된다. 생산관계를 틀어쥔 개별자본가가 생산활동의 산물인 잉여가치(surplus value)를 모두 탈취할 때,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에 대한 자본가의 직접적 배타적 통제(control)는 잉여가치에 대한 착취(exploitation)로, 직접적 생산자에 대한 지배(domination)로 전화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필연적으로 노동계급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운동형태로 되고, 노동계급에게 강요되는 억압과 빈곤의 물질적 근원으로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생산노동을 사회적으로 조직함으로써 물질적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운동형태로 된다. 개별적으로 흩어진 생산노동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통하여 사회적으로 조직된 생산노동으로 바뀔 수 있었으며, 그로써 물질적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될 수 있었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생산노동을 사회적으로 조직함으로써 물질적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운동형태로 된 것만이 아니라,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을 배타적으로 통제하고 생산관계를 전면적으로 틀어쥔 까닭에 노동계급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운동형태로도 되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는 생산노동이 사회적으로 조직되면서 동시에 생산수단이 사적으로 소유되는 까닭에 생산노동의 조직과 생산수단의 소유 사이에서 불일치성과 불합리성이 생겨난다. 그리하여 불일치성과 불합리성은 그 생산관계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해소할 수 없는 계급적 대립의 근원, 곧 계급모순으로 전화된다.
반면에,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에서는 생산노동이 사회적으로 조직되고 그에 맞게 생산수단도 사회적으로 소유되는 까닭에, 생산노동의 조직과 생산수단의 소유 사이에서 일치성과 합리성이 보장된다. 그리하여 일치성과 합리성은 물질적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사회경제적 조건으로 전화된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private ownership of means of production)는 낡고 반동적인 장애물이며,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social ownership of means of production)는 새롭고 선진적인 창조물이다.
사회변혁이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기초한 낡은 생산관계를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에 기초한 새로운 생산관계로 바꾸는 사회개조라고 말할 수 있다. 낡은 생산관계를 새로운 생산관계로 바꿀 수 있는 사회계급은 노동계급이다.
생산관계를 바꾸는 사회개조의 임무를 수행하는 사회계급은 노동계급이다.
생산노동을 사회적으로 조직하고 그에 맞게 생산수단도 사회적으로 소유한 생산관계가 형성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프리드릭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체(free and equal association of the producers)’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선행이론은 개별적 노동을 사회적 노동으로 개조하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로 교체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생산관계를 바꾸는 사회개조를 실현함으로써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체’가 건설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생산관계를 바꾸는 사회개조를 실현하였다고 해서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체’가 곧바로 건설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시기 소련과 동유럽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로 바꾸는 사회개조를 실현하였는데도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체’가 건설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결국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복귀하였다.
‘좌파이론’은 소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무너진 원인이 그 생산관계에 내재된 모순에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현실사회주의(real-socialism)에서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소유한 것은 생산수단을 사회주의정부가 소유하는 국가적 소유, 곧 사회주의국유화(socialist nationalization)이므로,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사회주의정부와 직접적 생산자인 사회주의노동계급 사이에서 모순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에서 형성되는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직접적 생산자의 관계를 모순관계로 보는 것은 오류이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개별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파는 직접적 생산자를 지배하고 착취하기 때문에,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의 주체가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착취자와 피착취자만 있을 뿐,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의 주체는 없는 것이다. 지배자와 착취자는 주체가 아니다.
반면에,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는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의 주체에 의해서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이다. 사회주의정부와 사회주의노동계급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는 ‘좌파이론’에서 오해한 것처럼 모순관계가 아니라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의 주체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이다.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에서는 사회주의정부도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의 주체로 되고, 사회주의노동계급도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의 주체로 된다. 그 관계는 필연적으로 주체들 사이의 단결과 협력을 실현하는 자주적 관계인 것이다. 사회주의국유화를 실현하는 과업과 사회주의노동계급이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의 주체로 되는 과업은 모순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생산관계가 물질적 생산력의 운동형태이자 발전형태라는 점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동일한 성격을 갖지만,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는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의 주체들이 상호협력하여 물질적 생산력을 발전시킴으로써 자주성을 실현하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인 반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의 주체가 없는 낡은 사회적 관계이며, 지배자와 피지배자,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끊임없이 대립하고 투쟁하는 사회적 관계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개별자본가가 틀어쥔 생산수단의 소유권은 실질적 소유형태를 취함으로써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계급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대립물로 전화하지만,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에서 사회주의정부에 귀속된 생산수단의 소유권은 형식적 소유형태를 취하게 되며,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유지하고 물질적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사회주의경제의 법적 기초로 전화한다.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법적 형식이 생산수단의 국가적 소유(state ownership)라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실질적 내용은 생산수단의 전인민적 소유(all people's ownership)이다.
여기서 노동계급적 소유라 하지 않고 전인민적 소유라 하는 까닭은, 생산수단을 사회주의적으로 소유한 사회주의노동계급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을 협동적으로 소유한 사회주의협동농민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노동계급이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의 주체로 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의 핵심은, 생산수단의 소유권이 사회주의정부에 귀속된 법적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노동계급이 생산수단의 실질적 소유자임을 자각하는 현실적 내용에 있다. 사회주의노동계급이 생산수단의 실질적 소유자임을 자각할 때, 그 계급은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의 주체로 된다.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에서 진행되는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은 사회주의정부에 귀속된 생산수단의 소유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주의경제관리체계(socialist economic management system)에 의해서 규정된다.
사회주의경제관리체계는 생산수단의 국가적 소유와 생산수단의 전인민적 소유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한다. 그것은 법적 형식과 현실적 내용의 변증법적 통합이다.
그래서 국가적 소유이자 전인민적 소유라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경제관리체계에서는 사회주의정부의 경제행정사업과 더불어 사회주의집권당의 정치사업(political work)이 추진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치사업이 경제행정사업보다 우선되고 중시된다.
그것을 ‘공장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factory party committee's collective leadership)’라 한다.
그러한 집체적 지도로 움직이는 사회주의경제관리체계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경제생활을 보장하는 기능, 생산과 경영에서 자발성과 창의성을 불러일으키는 기능,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속에서 사회주의적 상호협력을 강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런데 만일 사회주의노동계급이 생산수단의 실질적 소유자임을 자각하지 못하여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의 주체로 되지 못하고 비주체적으로 사회주의정부의 지시와 통제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면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체’를 건설하기는커녕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임무도 수행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20세기 말 소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무너진 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체’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세우는 사회개조만으로는 건설되지 않으며, 사회주의노동계급을 생산수단의 실질적 소유자임을 자각하고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에 주체적으로 나서는 자주적 생산자로 개조하여야 건설될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세우는 사회개조가 실현될 때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체’를 건설하는 객관적 조건이 마련된다면, 사회주의노동계급이 자주적 생산자로 개조될 때 그러한 연합체를 건설하는 주체적 조건이 마련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세우는 사회개조는 사회주의노동계급을 자주적 생산자로 개조하는 과업과 서로 떼어놓을 수 없으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세우는 사회개조는 사회주의노동계급을 자주적 생산자로 개조하기 위한 선행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사회주의노동계급을 자주적 생산자로 개조하는 과업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세우는 사회개조의 과업보다 더 중요하고 더 결정적이며, 더 힘들고 더 오랜 기간을 요구한다.
소련과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가 좌절한 원인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 자체에 어떤 오류나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주의노동계급이 자주적 생산자로 개조되지 못하였다는 데 있었다. 사회주의노동계급이 자주적 생산자로 개조되지 못한 조건에서, 빠른 속도로 사회주의공업화를 달성하고 생산력을 끌어올려야 했던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정부는 행정적 명령과 통제(administrative command and control)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지난 시기 중국에서 전개되었던 인민공사화운동(人民公事化運動)은 사회주의공업화를 달성하지 못한 조건에서 농업부문의 봉건적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이고 협동적인 생산관계로 교체하는 사회개조에서는 성공하였으나 사회주의근로농민을 자주적인 생산자로 개조하는 과업을 추진하지 못하고 행정적 명령과 통제에 결정적으로 의존하였던 까닭에 실패하였다.
또한 소련과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주의공업화를 달성해놓고서도 사회주의노동계급을 자주적 생산자로 개조하지 못한 까닭에 행정적 명령과 통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행정명령과 통제의 반복과 축적은 관료주의로 악화변질되면서 차츰 체제유지력을 앗아갔던 것이다.
사회주의정부의 행정적 명령과 통제가 지속되는 가운데, 생산관계의 주체에서 어느덧 생산노동의 동원대상으로 바뀐 소련과 동유럽의 노동계급은, 제국주의연합세력과 자국의 반사회주의세력이 체제붕괴를 노려 덤벼들었을 때는 이미 너무 나약하고 무능해져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파괴하는 반동공세에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어이없게 무너지고 말았다. 소련과 동유럽의 노동계급은 사회주의체제를 자주적으로 발전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기는커녕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제국주의연합세력과 자국의 반사회주의세력의 손으로 파괴되고 자신을 ‘임금노예(wage slave)’로 결박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복귀하는 반동적 사회개조를 두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그 흔한 시위투쟁에 나서지 못할 만큼 극도로 나약해지고 무능해졌던 것이다. 그들의 나약하고 무능한 모습은 억압과 착취에 저항하는 남(한국)노동계급의 전투적인 모습과 매우 대조적으로 보인다.
소련과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가 좌절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선행이론이 사회주의노동계급을 자주적 생산자로 개조하는 발전전망, 곧 자주적 사회주의의 발전전망을 밝혀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선행이론이 자주적 사회주의의 발전전망을 밝혀주지 못하였으므로 사회주의노동계급은 자신이 생산수단의 실질적 소유자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생산활동과 경영활동에 주체적으로 나서지 못했으며 사회주의건설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주적 사회주의의 발전전망을 밝혀준 자주성의 과학에 따르면, 사회주의노동계급을 자주적 생산자로 개조하는 것은 인간개조(human remolding)이다. 인간개조란 사회주의노동계급과 사회주의근로대중이 자기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인간개조는 사회적 존재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을 생산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인간개조에 의해서 사회주의노동계급은 사회적 존재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을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실현하는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게 되며, 그로써 가장 선진적인 사회계급으로 된다.
사회주의노동계급이 자주적 생산자로 개조되려면, 자기의 사상의식을 자주적 사상의식으로 개조하여야 한다. 사회주의노동계급이 앞장선 인간개조의 대장정은 자신과 근로대중의 사상의식을 자주적 사상의식으로 개조하는 사상개조(ideological remolding)의 복잡하고 어려운 길이다.
인간개조의 중심은 사상개조에 있다. 사회주의노동계급이 자신을 자주적 사상의식을 가진 생산자로 개조할 때, 그때에 비로소 노동계급 자신만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체의 자주성이 완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노동계급은 낡은 생산관계를 새로운 생산관계로 바꾸는 사회개조의 임무를 수행하며, 사회발전단계에서 그들보다 앞선 사회주의노동계급은 자주성을 실현하는 인간개조의 임무를 수행한다.

6. 남(한국)노동계급의 임무

2001년 3월에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통일연대)가 결성되었고, 2003년 5월에는 전국민중연대(민중연대)가 결성되었다.
민중연대와 통일연대에는 민주노총과 전농을 비롯한 진보적 대중단체들이 결집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민중연대와 통일연대를 통일전선체로 보기는 힘들다.
그 까닭은 민중연대와 통일연대에는 민주노조운동의 상층부만 결합되어 있을 뿐이어서, 운동의 계급적 중심을 갖지 못한 연대협력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또한 민중연대와 통일연대는 진보적 대중단체들이 광범위하게 결집하는 대중적 기반도 약하기 때문이다. 민중연대에 대한 민주노총과 전농의 결합력이 약하여 민중연대의 투쟁이 큰 힘을 쓰지 못하고 있으며, 통일연대에 대한 민주노총과 전농의 결합력은 더 약하여 남(한국)에서 6.15공동선언 실천운동의 주도권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에 넘어가 버렸다.
이러한 현실은 현 시기 남(한국)사회변혁운동이 아직 자기의 통일전선체를 갖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기존의 연대협력체를 통일전선체로 개편하고 강화하는 것은 현 시기 남(한국)사회변혁운동에게 주어진 절실하고 시급한 과제이다.
남(한국)사회변혁운동은 진보적 대중단체들의 정치연합이 먼저 결성되고, 그것에 기초하여 진보정당이 건설되는 경로를 밟지 못하였다.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뒤에 진보적 대중단체들의 정치연합이 결성되는 비정상적인 경로를 밟고 있는 것이다. 통일전선의 정상적인 발전경로는 진보적 대중단체들의 정치연합이 먼저 결성되고 그것에 기초하여 진보정당이 건설되는 경로이다.
남(한국)사회변혁운동에서 진보정당이 먼저 건설된 뒤에 진보적 대중단체들의 정치연합이 뒤늦게 결성되는 까닭은, 여러 각도에서 분석할 수 있겠지만, 가장 주된 까닭은 민주노조운동 지도부가 통일전선을 형성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고, 더욱이 민주노조운동 일각에서는 계급적 중심과 대중적 기반을 가진 진보정당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정당’, 곧 노동계급의 독자정당을 세우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은 노동계급의 독자정당도 아니고, 노동계급의 중심을 갖지 못한 몰계급적 대중정당도 아니다.
노동계급의 독자정당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를 무시하고 사회변혁의 사회주의적 단계로 뛰어넘으려는 좌경적 오류이며, 몰계급적 대중정당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사회변혁운동의 역사적 발전전망을 내려놓는 우경적 오류이다. ‘노동자계급정당’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대중적 고립과 정치적 무기력에 빠졌고, 몰계급적 대중정당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파탄되었다. 진보정당은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의 요구에 맞게 노동계급이 중심에 서고 광범위하게 결집된 대중적 기반을 가진 진보적 정치연합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만일 진보적 대중단체들의 정치연합이 먼저 결성되고 그것에 기초하여 진보정당이 건설되었다면, 사회변혁운동의 정치역량이 총집결된 당적 체계가 세워졌을 터이나,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비정상적인 현실은 통일전선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남(한국)사회변혁운동에서 청산되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민주노동당에는 생산현장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결집된 것이 아니라 민주노총 상근간부를 중심으로 소수가 결집하였다.
특히 눈여겨보는 것은, 노동계급에게 주어진 사회변혁의 임무를 저버리는 관료주의(bureaucratism)와 개량주의(reformism)라는 사상적 독소, 그리고 미약하게나마 형성된 사회변혁역량을 분열로 끌어가는 분파주의(sectarianism)라는 사상적 독소가 민주노조운동 상층부 일각에 스며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통일전선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넘어서는 것, 그리고 민주노조운동 상층부에 스며든 관료주의, 개량주의, 분파주의를 없애는 것은 사회변혁운동에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당면한 요구로 되었다.
민주노조운동의 파업투쟁은 그 투쟁의 주체가 사회변혁의 역사적 전망을 갖지 못하였을 때 파업투쟁으로 끝난다. 노동계급이 자기를 중심으로 형성되어야 할 통일전선에 자기 힘을 결집하지 못하고 주춤거릴 때 민주노조운동은 사회변혁의 역사적 전망을 잃어버린 조합활동, 곧 조합의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으로 끝난다.
노동조합운동이 진보정당의 정치활동과 결합되지 못하고 노조지도부가 사회변혁의 강령을 저버림으로써 노동조합의 이익추구에만 매달리는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노동조합(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nd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 AFL-CIO)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노동조합의 강령에서는 노동계급이 수행해야 할 사회변혁의 임무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작업장에서 경제적 정의(economic justice)를 실현하고, 전사회적으로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를 실현한다”는 문구만 들어있을 뿐이다.
노동계급에게 사회변혁의 임무를 밝히지 않고 경제적 정의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한다는 식의 모호하기 그지없는 임무만 밝힌 것은, 노동계급에게서 사회변혁의 지향과 요구를 원초적으로 제거하는 사회개량주의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실제로 미국노동조합은 자기의 정치활동을 선거참여에 국한시키고 사회변혁의 임무를 저버린 사회개량주의에 빠져있다.
미국노동계급은 미국자본주의체제의 내적 모순이 격화되어 자신에 대한 착취가 한층 가혹해지고 절대적 빈곤에 빠져드는 경우,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폭동을 일으킬지언정 사회변혁운동에 나설 가능성은 없다. 미국노동계급에게 사회개량주의를 주입하는 노동조합은 있으나, 사회변혁의 강령을 밝혀주는 진보정당은 없다.
그에 비해서, 민주노총은 자기 강령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보장하는 참된 민주사회를 건설”하고, “민족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민주적 제권리를 쟁취하며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한다”고 밝혔다.
비록 절제된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지만, 그 강령적 내용은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제시되는 최저강령, 곧 반제투쟁, 계급투쟁, 조국통일의 강령을 담아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주노총의 강령에 사회변혁의 최저강령이 담겨져 있는 것은, 민주노총 창립선언문에서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가열찬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힌 데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좌파이론’은 반제투쟁강령과 조국통일강령을 부정하고 계급투쟁강령만 인정한다. 반제투쟁강령과 조국통일강령을 부정하는 까닭은, 그 두 강령을 사회변혁의 강령이 아니라 민족주의강령으로 보기 때문이다.
‘좌파이론’에 따르면, 사회변혁의 최저강령과 최고강령의 구분은 있을 수 없고 오로지 사회변혁의 사회주의강령(내 표현으로는 최고강령)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좌파이론’의 급진적 성격이 드러나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논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6-1) ‘좌파이론’은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와 사회주의적 단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사회변혁의 단계를 구분하지 않는 까닭은, ‘좌파이론’이 제국주의체제와 자본주의체제를 구분하지 않고 제국주의체제를 국가독점자본주의(state monopoly capitalism)라는 자본주의의 최고발전단계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경향 또는 외연으로 파악한 선행이론의 맹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체제를 자본주의체제의 최고발전단계, 경향, 외연으로 인식하는 ‘좌파이론’에서 반제투쟁강령이 계급투쟁강령으로 해소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문제는 ‘좌파이론’의 주장처럼 그렇게 간단치 않다.
물론 제국주의체제는 국가독점자본의 기반 위에서 형성되었지만, 국가독점자본주의체체가 제국주의체제로 되는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체제와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를 동일하다고 본 선행이론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제국주의 형성기의 레닌주의적 인식이 빚어낸 착오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는 제국주의체제가 아니라 최고단계로 성장발전한 자본주의체제이다.
개별적 자본주의체제들 가운데 생산력이 발달하지 못한 체제는 제국주의체제에 예속되어 한 쪽으로 수탈 당하고 다른 한 쪽으로는 기생한다.
제국주의체제에 예속되어 수탈 당하며 기생하는 개별적 자본주의체제가 차츰 발달하여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진행되고 국가독점자본이 형성된다고 해서 그 체제가 제국주의체제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선행이론은 제국주의체제를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로 파악하는 바람에 제국주의체제가 하나의 고유한 생산양식을 가진 사회체제임을 해명하지 못하는 맹점에 빠졌다. 제국주의체제를 자본주의체제의 최고발전단계, 경향, 외연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체제로 인식할 때, 반제투쟁강령은 계급투쟁강령으로 해소되지 않게 된다.
제국주의체제와 자본주의체제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해명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다음 기회로 미룬다.

6-2) ‘좌파이론’은 선행이론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사회변혁의 의미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로 교체하는 뜻으로만 이해한다.
사회변혁의 의미를 그렇게 이해하면, 사회변혁의 강령은 오로지 계급투쟁강령일 뿐이며, 반제투쟁강령이나 조국통일강령이 민족주의강령으로 규정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문제는 ‘좌파이론’의 주장처럼 그렇게 간단치 않다.
사회변혁의 의미에는 사회적 생산관계를 교체하는 사회개조의 의미는 물론이고 사회적 생산관계의 주체를 개조하는 인간개조의 의미도 포함되어야 하며,
인간개조가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회변혁의 의미로 인정되어야 한다.
‘좌파이론’이 사회변혁의 의미를 생산관계의 교체로만 이해하는 것, 그리하여 오로지 계급투쟁강령만 제시하는 것은, 그 이론의 혁명적 계급성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제한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선행이론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로 교체하면 그것으로 노동계급이 자신을 해방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소련과 동유럽이 겪었던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적 경험은 그 생각이 빗나가고 말았음을 입증하였다.
사회주의노동계급을 자주적 생산자로 개조하지 않으면,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으로 교체하였다고 해도 노동계급이 자신을 해방하지 못한다. 사회주의노동계급을 자주적 생산자로 개조하는 인간개조는 사회주의노동계급이 자기의 사상의식을 자주적 사상의식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위에서 설명한 바 있다. ‘좌파이론’은 사회변혁의 의미를 사회개조로만 이해한 선행이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오늘 남(한국)노조운동이 사회변혁의 최저강령을 자기의 강령으로 받아들이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노조운동이 실제로 사회변혁의 최저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과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회변혁의 최저강령을 자기의 강령으로 든 민주노조운동이 조합활동의 울타리를 벗어나 그 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과 투쟁에 나설 때, 그 운동은 근로대중의 진보적 대중운동과 정치적으로 연합하는 통일전선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통일전선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은, 사회변혁의 민주주의적 단계에서 제시되는 강령이 사회변혁의 최고강령인 노동계급의 사회주의강령이 아니라 사회변혁의 최저강령 곧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정치적으로 연합하는 통일전선의 진보적 민주주의강령이기 때문이다. 민주노조운동이 조합활동의 울타리를 벗어나 통일전선의 계급적 중심에 설 때 사회변혁의 최저강령을 실현하게 된다.
최근 민중연대와 통일연대를 비롯한 진보적 대중단체들이 결집하는 새로운 정치연합을 결성하려는 생산적인 논의가 오가는 것은, 통일전선체를 건설하는 투쟁을 크게 고무추동하는 일이다.
지난 시기 계급적 중심을 갖지 못하였던 연대협력체가 사회변혁운동의 계급적 중심과 대중적 기반을 가진 통일전선체로 재편되고 강화되는 것은, 전선의 분산분열을 접고 전선의 결집통일을 펼쳐 가는 사회변혁운동의 합법칙적 발전이다.
사회변혁운동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새로운 통일전선체가 건설되면, 진보정당과 진보적 대중단체 연합체라는 두 가지 형태의 통일전선체가 병존하게 된다.
두 가지 형태의 통일전선체가 병존하더라도, 진보정당이 통일전선의 정치적 대표성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회변혁운동의 정치역량이 총집결된 당적 체계를 세운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회변혁운동의 강령과 정책을 내오고 그것을 실현하는 정치투쟁에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이끌어 간다는 점에서, 진보정당은 통일전선의 정치적 대표성을 갖는다.
진보정당은 통일전선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통일전선정당(united-front party)이다.
새로 건설되는 통일전선체는 진보적 대중단체들이 물리적으로 결합하는 연대협력체가 아니라 사회변혁운동의 계급적 중심과 대중적 기반을 가진 정치연합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통일전선체를 건설하는 것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역량을 집결시키고 영도하는 전선조직을 건설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진보적 대중단체들이 공동의 정치과업을 합의하고 그 합의에 기초하여 진보적 정치연합을 건설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동의 정치과업이란 두말할 나위 없이 반제투쟁, 계급투쟁, 조국통일의 정치과업이다. 새로 건설되는 통일전선체가 계급적 중심과 대중적 기반을 가질 때, 그리고 반제투쟁, 계급투쟁, 조국통일을 자기의 강령으로 삼을 때, 사회변혁운동은 비약적으로 강화발전될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진보정당의 중심에 서고, 진보적 대중단체 연합체의 중심에 서는 사회계급은 노동계급이다.
사회변혁운동의 계급적 중심에 선 노동계급은 진보정당과 진보적 대중단체 연합체가 병존하는 통일전선에서 통합력을 발휘하여 장차 하나의 단일한 통일전선체를 내오고, 다시 그것을 노동계급 자신의 정당으로 성장발전시킬 것이다.
이것이 사회변혁의 주체를 세워 가는 과정이다. 사회변혁의 주체는 그 과정에서 생성되고 강화되며 발전한다. 진보적 대중단체 연합체가 진보정당으로, 진보정당이 노동계급 자신의 정당으로 성장발전하는 기나긴 과정에서 사회변혁의 주체를 세워 가는 것은 노동계급이 수행하는 역사적 임무이다.

7. 글을 맺으며

남(한국)사회체제에서 들리는 파열음. 그것은 노무현정권이 허공에 내걸어놓은 사회개량의 허울이 찢겨져 나가는 파열음이다.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독점자본의 이중적 착취가 한층 가혹해지면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격심한 고통이 몰려오고, 착취에 저항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존권사수투쟁이 격렬해지며, 위기감을 느끼는 노무현 정권은 더욱 포악해지는 경찰폭력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생존권사수투쟁은 사회체제의 파열음을 낼 수는 있어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존권을 빼앗는 사회체제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그 까닭은, 생존권사수투쟁이 생존권을 빼앗는 폭력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할 수는 있으나, 생존권을 빼앗는 폭력의 근원을 걷어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체제의 내적 모순과 그 체제에 예속된 남(한국)자본주의체제의 내적 모순이 주기적으로 융합되고 격화되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존권마저 빼앗지 않고서는 체제를 유지할 수 없는 위기가 다가올 때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생존권사수투쟁으로 어렵사리 얻었던 생존권을 다시 빼앗기게 된다.
그러므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생존권을 빼앗는 폭력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하는 투쟁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폭력의 근원을 걷어내는 투쟁에 나서야 한다.
생존권을 빼앗는 폭력의 근원을 걷어내는 투쟁은 그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변혁투쟁이다. 세상을 바꾸는 사회변혁운동만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존권을 빼앗는 폭력의 근원을 걷어낼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생존권사수투쟁을 넘어서 사회변혁운동으로 나아가야 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사회변혁운동의 과학적 전망을 아직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사회변혁운동의 과학적 전망을 밝혀주는 것은 진보정당의 정치활동에 의해서 가능하다. 진보정당은 사회변혁운동의 과학적 전망을 자기의 강령과 정책에 담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뚜렷이 제시하고, 그 강령과 정책에 따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통일전선으로 이끌며, 자주적 민주정권을 세우는 집권전략을 추진한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진보정당을 통해서, 오로지 그것을 통해서만 자기의 집권전략을 추진할 수 있다. 남(한국)사회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집권전략을 합법적으로 추진하는 정치조직은 진보정당 밖에 없다.
진보정당이 자기의 강령과 정책에서 사회변혁운동의 과학적 전망을 밝혀줄 때,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생존권사수투쟁을 넘어서 사회변혁운동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게 되며, 진보정당은 노동계급과 근로농민의 총파업투쟁을 집권전략을 추진하는 사회변혁운동의 동력으로 축적강화할 수 있게 된다.
사회변혁운동이 앞으로 나아가느냐 뒷걸음질하느냐, 그 운동이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 하는 것은, 진보정당의 깃발 아래 결집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세상을 바꾸는 투쟁에 의해서 결정된다.
세상을 바꾸는 투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2005년 12월 1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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