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올해 6월항쟁이 일어난지 30년이 되었다. 1987년 6월항쟁과 1980년 5.18민중항쟁의 간극은 7년에 지나지 않는다. 6월항쟁은 518민중항쟁의 피가 흐르는 본류에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눈물 섞인 지류가 섞여 1987년 1월의 ‘박종철 고문치사’와 ‘4.13호헌조치‘를 계기로 전두환 ‘학살정권’ ‘폭력정권’의 저수지를 무너뜨린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6월항쟁 기간 동안 전국에서 동시 다발로 벌인 시위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주도하고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시민들이 합류한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 6월 18일 ‘최루탄 추방 결의대회’,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벌어졌다. 6월항쟁에 참가한 연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
'국본'은 6.10 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국민’들의 동참을 이끌어 내려고 오후 6시 국기 하강식 때 애국가를 부르고, 자동차 경적을 울리며, 전국 사찰.교회.성당에서 종을 울리고, 오후 9시부터 9시 10분까지 10분 동안 불을 끈 뒤 KBS와 MBC 뉴스를 보지 말자고 제안하였다. 경찰의 폭력에 대해서는 비폭력으로 저항하고, 연행을 거부하며, 연행될 경우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평화 시위 방침을 세웠다.
'국본'의 방침에 맞서 전두환 정권은 매일 시행하던 국기 하강식을 생략하고, 택시와 버스회사에 압력을 넣어 경음기를 떼도록 하였다. 서울에서는 시청, 광화문, 종로 일대의 역에서 지하철을 세우지 않고 통과시켰다.
학생들이 먼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차도로 뛰어 들었다. 인도에서 구경하며 박수로 응원하던 시민들이 따라 들어갔다. 6월 10일 시위를 6월 18일 최루탄 추방 결의대회로 연결한 중요한 징검다리는 5박 6일에 걸친 명동성당 농성이었다. 경찰의 진압에 밀려 명동성당으로 밀려들어간 700-800명의 시위대는 ‘농성해제론’을 물리치고 5박 6일 동안 해산하지 않고 버티며 싸웠다. 명동 성당에서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던 상계동 철거민들이 밥을 해주었고, 가까이 있는 계성여고 학생들이 자기들 먹으려고 싸왔던 도시락을 모아 넘겨주었다. 명동성당 주변의 사무직 ‘넥타이부대’의 응원도 큰 힘이 되었다.
명동성당 농성에 힘을 받아 전국 곳곳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대도시와 중소도시 뿐 아니라 농촌 지역 군단위에서도 시위가 터져 나왔다.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푼 뒤 6월 17일부터는 부산 가톨릭 센터에서도 명동 성당과 비슷한 농성이 7일 동안 계속되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하여 최루탄을 쏘아대며 폭력으로 해산하였다. 시위대도 보도블록을 깨서 ‘짱돌’ 대신 쓰고, 소주병을 모아 화염병을 만들어 곳곳에서 파출소와 민정당사 지구당, 지방 KBS와 MBC 건물에 집어 던졌다. 경찰차와 시위 진압에 동원된 소방차를 불태웠다. 트럭을 끌고 고속도로를 점거하기도 하였다.
6월항쟁 기간 경찰이 쏘아댄 최루탄은 67만 발 이상이었다. 최루탄의 양으로 보면 서울, 광주, 부산 순으로 시위가 많았다. 6월 10일 범국민대회 때 22개 도시에서 동시에 벌어졌던 시위가 6월 26일 평화대행진 때는 34개 도시로 늘어났다. 광주, 여수, 순천, 이리, 인천 등지에서는 중고교생들이 오히려 ‘비폭력 평화시위’ 지침을 무시하고 격렬하게 싸웠다. 공단 지역인 인천, 부산, 안양, 성남, 서울의 구로와 영등포에서는 늦게 퇴근한 노동자들이 합류하여 밤새도록 싸웠다. 인천 부평에서는 투쟁 과정에서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을 창립하였다. ‘지도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발적인 투쟁이 아래로부터 확산되었으나 기존 조직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항쟁 지도부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전두환 정권은 경찰력만으로 시위를 진압하기 어렵다고 인식하여 한 때 ‘계엄’과 같은 특별조치와 함께 군 투입을 고려했다. 미국은 압력을 넣어 군이 출동하는 비상사태를 저지하였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때 국군 20사단 투입을 허용하고 전두환 정권 수립을 지지한 결과 반미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경험한 미국이었다. 한국에 투자를 늘려온 미국 자본의 이익과 동아시아 전략을 위해서는 정치적 안정과 지속적인 경제성장, 평화적 현상 유지가 필요하였다.
1980년대 내내 ‘광주’에 시달려온 전두환 정권으로서도 전국에서 동시 다발로 일어나고 있는 시위를 같은 방식으로 진압해서는 후과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야말로 12.12쿠테타로 군부 내의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계엄을 발표하고 군대를 투입할 경우 군 내부에서 역쿠테타가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군 투입을 막을 수 있었던 힘의 근원에는 1980년 광주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싸웠던 ‘시민군’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국에서 수백만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항쟁 자체가 군 투입을 막아냈다.
경찰력으로 감당하기 힘들고, 군 투입도 어려운 상황에서 전두환 정권이 선택한 ‘신의 한 수’가 김대중 사면 복권이었다. 그들은 김대중과 김영삼은 반드시 분열될 것으로 보았다. 야권이 분열하면 직선제로 선거를 치루더라도 자신들이 승리하여 집권을 연장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1987년 6월 29일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 직선제 수용’, ‘김대중의 사면 복권과 양심수 석방’, ‘국민의 기본권 신장’, ‘언론 자유 창달 등 8개항’을 담은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곧 이어 전두환이 이를 받아들이는 정치적 쇼를 벌였다.
6월항쟁으로 4.13호헌 조치를 폐지시켰다. 1972년 유신헌법 이후 15년 만에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는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였다. ‘6.29선언’에는 노동자 민중의 요구가 담겨 있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의 속내가 드러나면서 곧바로 629를 ‘속이구’라고 불렸다. 그러나 박정희 집권만큼 갈지도 모른다고 절망하게 만들었던 4.13호헌조치를 세 달이 되기 전에 폐지시킴으로서 패배주의를 씻어내고 ‘역사적 낙관주의’를 살려냈다. 직접행동을 통하여 얻은 승리의 경험은 이후 사회의 다양한 변화를 이끌어 내는 동력이 되었다. 또한 6월항쟁으로 얻어낸 ‘6.29선언’은 노동자들에게 7.8.9 투쟁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보수 정치인들이나 국본의 지도부, 6월항쟁에 참가했던 중간층 시민들은 ‘6.29 선언’이 발표되자마자 투쟁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7월 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서울시청광장에 운집한 백만여 명의 조문객들은 경찰이 쏘아댄 다연발 최루탄에 뿔뿔이 흩어진 채 사라진 뒤 다시 모이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의 예상대로 사면 복권된 김대중은 대통령 불출마 선언을 번복했다. 김대중 김영삼은 분열하여 서로 자기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경쟁을 벌였다. 헌법 개정의 주도권은 전두환 노태우의 신군부 세력과 보수 야당이 움켜쥐었다.
6월항쟁의 포문을 열었던 ‘국본’이나 학생조직은 헌법 개정 투쟁을 능동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민주주의 확장 투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야당은 물론 선거에 몰입하였고, 종교계를 비롯하여 국민운동본부도 ‘군사 독재 종식을 위한 선거 혁명’을 공식적인 활동 방침으로 정하였다. 서로들 ‘선거 혁명’의 환상에 젖어 대통령으로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를 놓고 이합집산하였다.
1987년 12월 직선으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36.6%를 얻어 당선되었다. 신군부의 집권이 연장되었다. 1987년 7.8.9 노동자투쟁이 6월항쟁의 연장선에서 전개되었으나 6월항쟁과 분리되었듯이 5.18민중항쟁과 6월항쟁의 성과로 출범한 ‘문민정부’ ‘국민정부’ ‘참여정부’의 민주주의는 ‘노동이 배제된 민주’였다. 노동을 배제한 민주는 ‘87년 민주주의 체제’ 이후 자본의 전략이기도 했다. 올해 29년, 내년이면 30주년이 되는 ‘6월항쟁’은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하고 다시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