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올림 운동 10년, 아직 더 걸어야 할 길

  • 글쓴이: 공유정옥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 2017-11-11

  2007년 11월 20일, 삼성전자 기흥공장 앞 벌판에서 작은 기자회견이 열렸다. 반올림의 전신인 ‘삼성 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 규명과 노동 기본권 쟁취를 위한 공동 대책위원회’ 발족을 알리는 자리였다. 그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를 비롯하여 노동운동, 인권운동 단체와 진보정당 활동가들이 함께 했다.

  10년이 흘렀다. 기흥공장 앞 기자회견에서 어설프게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던 황상기씨의 머리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리는 사이, 유미씨 한 명에서 출발한 직업병 피해 제보는 3백 명을 훨씬 넘어섰다. 그리고 반올림 운동이 이룬 성과와 남겨진 숙제 또한 10년 전에 상상했던 몇백 배로 커졌다.

 

  첨단전자산업 직업병 공식 산업재해 인정

  반올림 운동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감춰져 있던 첨단전자산업 직업병의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사람들은 황유미씨의 백혈병을 공식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일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거라 했다. 바위는 강고했다. 근로복지공단은 2년이나 끌다가 산재인정을 거부하고, 행정소송에 삼성을 초대하여 대형 로펌 변호사들을 동원했다. 1심에서 산재인정 판결을 받았으나 공단은 항소했고, 삼성은 여론의 비난에도 아랑곳 않고 다시 소송에 개입했다.

  하지만 7년 반을 싸우고 견딘 끝에 마침내 황유미씨의 백혈병은 산업재해 인정을 받았다. 그 긴 시간 동안 반올림은 다른 피해 제보자들을 만나러 전국을 돌아다녔고 더 많은 이들의 산재신청을 조직했다. 주변의 만류와 조롱, 경제적 압박, 회사의 회유에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떠난 분들도 더러 있지만, 거의 모든 피해 노동자와 가족들은 버텼다. 이들 곁에 법률, 보건, 문학, 음악, 영화, 언론에 몸담은 많은 이들이 자신의 노동을 보탰고, 수많은 시민들이 십시일반 병원비와 약값을 보탰다.

  마침내 바위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어느 덧 20명을 넘는 이들이 백혈병, 림프종, 재생불량성빈혈, 유방암, 뇌종양, 폐암, 난소암, 불임, 다발성 신경염, 다발성 경화증에 대해 공식 산재인정을 받았다. 여기에는 삼성 외에도 하이닉스, 매그나칩, 그리고 이들 대기업의 사내하청, 사외협력업체 노동자들이 포함된다. 한 명 한 명이 한국 최초, 세계 최초의 법적 산재인정으로 기록되고 있다. 바위는 강고했지만 이를 내려치는 계란은 끈질겼다. 아직도 몇 년째 산재인정을 위해 버텨야 하는 이들이 수십 명이고 그보다 훨씬 많은 피해자들이 드러나지 않은 채이긴 하나, 이 계란들이 바위를 부수고야 말 것임은 확실하다. 본 적 없는 새로운 땅을 보게 된 이상 지도는 바뀔 수밖에 없고, 본 적 없는 새로운 현상을 인식하면, 그 현상을 다시 지워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가 진실과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당사자 보상을 넘어선 사회 변화

  이들의 산재 인정은 각 피해 노동자들이 정부의 보상을 받아 경제적 고통을 덜게 되었다는 차원을 넘어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사회에 던졌다. 암이나 희귀질환으로 산재인정을 받는 일이 ‘미션 임파서블’ 수준이라면 과연 산재보험이 재해 노동자의 치료와 생계를 돕는 사회보장제도라 할 수 있겠는가. 이들이 산재인정을 받지 못하는 주된 이유가 사업주의 비협조와 정보 은폐, 이를 통제하기는커녕 부화뇌동해온 정부기관과 전문가들의 문제 때문이라면, 이런 방해 때문에 재해 노동자가 업무관련성을 입증하지 못하여 산재보상권마저 박탈당하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가. 그리고 사업주가 영업비밀을 명분삼아 중요한 작업환경 정보를 은폐해온 행태는 과연 정당한가.

  반올림은 수십 명의 산재 신청을 통해 경험한 이 문제들을 틈나는 대로 사회에 제기해왔다.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공감대가 만들어졌고, 마침내 제도권 내에서도 이 문제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변화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올해 8월 삼성 노동자의 다발성 경화증에 대한 산재 소송에서 대법원은 ‘사업주의 비협조나 정부의 조사 불충분 때문에 피재 노동자가 업무관련성을 입증하기 어려워졌다면 그 사실 자체를 노동자에게 유리한 증거로 사용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업무관련성을 입증해야 할 부담을 노동자로부터 덜어줄 뿐 아니라, 사업주나 정부가 정보를 감추거나 조사를 소홀히 하여 산재인정을 어렵게 해왔던 관행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소중한 판결이다.

  기업이 영업비밀을 앞세워 작업환경에 대한 정보를 숨겨왔던 관행도 법으로 규제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산재 여부를 판단하기 위하여 법원이 삼성에 수십 차례 자료를 요청하였으나 삼성은 80퍼센트 이상을 답변하지 않음으로써 소송을 지연시켰고, 마지못해 자료를 제출해야 할 때는 영업비밀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중요 정보를 삭제한 채 내놓곤 했다. 영업비밀이라는 말은 삼성이 정부기관이 갖고 있는 정보마저 통제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였다. 상식 수준을 벗어난 영업비밀 남용 사례가 쌓일수록 노동자와 시민의 알 권리를 기업이 훼손하지 못하도록 지켜낼 제도가 없다는 문제 인식이 깊어졌다.

  마침내 2016년 말부터 화학물질 영업비밀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사전 심의 등의 규제 장치를 만들자는 법률들이 발의되기 시작했다. 기업이 영업비밀로 감추어도 되는 정보인지 사전에 심의하는 장치를 만들고, 영업비밀로 인정되더라도 그 시효를 다하면 공개하도록 만들자는 취지다. 반도체 산업을 중심으로 기업들은 ‘심각한 기술 유출’과 ‘산업 경쟁력 저하’가 초래될 것이라며 극구 반대하고 있다.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의 SNS 계정에는 ‘중국의 산업 스파이’ 운운하는 비방 덧글들이 하루 사이에 사이버 테러 수준으로 달리기도 했다. 친기업 학자들도 ‘비합리적인 규제’라며 비난에 동원되고 있다.

 

  침묵과 부정 일변도였던 기업들의 변화

  반올림 활동을 시작한 뒤 2년 반 동안 삼성전자는 직업병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다수의 언론은 이 문제를 보도하지 않았고, 몇몇 영향력 있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취재에 나섰으나 전파를 타지 못하고 엎어졌다. 오랜 침묵은 2010년 3월 삼성 반도체 온양공장 노동자 박지연씨가 백혈병으로 숨지면서 깨졌다. 박지연씨의 사망 소식은 인터넷을 통해 ‘반도체 소녀의 죽음’으로 널리 퍼졌고, 삼성 직원들 내부에도 큰 동요를 가져왔다. 그해 4월 삼성은 공장 이름을 ‘캠퍼스’로 바꾸고 공장 외벽에 페인트 칠을 하고 서점과 카페, 산책로를 공장 안에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으며 곧이어 관광버스 여러 대에 기자들을 태우고 기흥 공장 견학을 시켰다. 그 ‘성과’로 친기업 언론들은 삼성 반도체 공장이 얼마나 깨끗하고 안전한지 예찬하는 수십 개의 기사들을 쏟아내어 ‘반도체 소녀’에 대한 기사를 밀어냈다. 삼성은 ‘삼성반도체이야기’라는 블로그를 개설하고 반올림이 국가 경제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과학적 근거 없는 억지 주장으로 삼성 직원들의 피땀을 훼손하고 있다는 비방 글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직원들을 동원하여 ‘이렇게 안전한 삼성에 대해 비방하는 외부 세력 때문에 화가 난다’는 인터뷰를 담은 동영상도 올렸다.

  외부 언론과 사내 매체를 총동원한 여론전과 더불어 전문가, 과학자의 동원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삼성은 <삼성전자 건강연구소>를 설립하고 전문 인력을 채용하는 한편 <인바이론>이라는 국제 안전보건 컨설팅 회사를 고용하여 작업장의 안전을 ‘검증’하겠다고 나섰다. 다른 나라에서 환경오염, 직업병 논란이 있을 때마다 기업을 위해 조사 연구를 해주는 ‘청부과학’ 집단으로 유명한 회사였다. 이들을 통해 삼성은 반도체 공장 안전보건관리가 완벽하다, 유해물질 노출이 없다, 질병의 초과발생이 없다는 주장을 국내외 학계에 발표해왔다.

  2014년 한겨레 신문이 반올림에 제보된 SK하이닉스의 백혈병 문제를 보도한 직후, SK하이닉스도 자체 대응을 시작했다. 공격적이고 노골적인 프로파간다 전략을 채택해온 삼성과 달리 SK하이닉스는 비교적 사회적 논란이 적은 길을 택했다. 두 노동조합과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산업보건검증위원회>를 만들고, 이들이 수행한 연구 및 개선안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방식을 택했다. 자연유산과 갑상선암 등 반도체 공장에서 발생하기 쉬운 질환들을 포괄하는 기준을 만들어 자체 지원보상 시스템을 가동하는 한편, 127개 안전보건관리 개선 권고를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2017년에는 LG디스플레이에서도 자체적인 보상안을 만들어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들 어느 기업도 노동자들의 질병과 작업환경의 인과관계나 사업주의 책임을 공식 인정한 적은 없다. 그러나 10년 전과 달리 이들은 무언가 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첨단전자산업 노동자들의 건강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기업이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까지 나아간 것은 분명하다.

 

  반올림 운동 10년이 남긴 숙제

  지난 10년 반올림 운동은 직업병 피해 노동자를 발굴하여 공식 산재 인정을 받기 위한 싸움을 통해 개별 피해자 보상을 넘어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확장과 관련 법제도의 개혁 시도, 그리고 기업의 침묵을 깨뜨리는 데까지 나아왔다. 그러나 아직 마치지 못한 숙제도 많다.

  첫째, 산재보험제도 개혁이나 알 권리 보장을 위한 영업비밀 규제를 실현해내야 한다. 그동안 인권을 침해하건 말건 이윤추구의 자유와 지배력을 만끽해온 이들의 저항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 저항을 넘어 제도를 정비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도록 바꾸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둘째, 변화를 위한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운동의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다. 반올림 운동의 첫 시동은 소수지만 고결한 의지를 가진 피해 노동자와 가족들에게 빚지고 있다. 이들은 자기 개인의 보상을 넘어 다른 노동자들이 이런 고통을 겪지 않도록 바꾸어내겠다는 의지로 몇 년씩 버티고 견디며 싸웠고, 그 시동이 꺼지지 않도록 각계각층의 운동가와 시민들이 연료를 보태며 10년을 이어왔다. 그러나 이 운동이 직업병 피해자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한, 전자산업 생산 현장의 변화는 요원하다. 반올림 운동은 지금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만나 병들거나 다치기 전에 자신의 노동환경을 점검하고 바꾸어내는 노동자들의 예방 투쟁으로 진전해 가야 한다.

  셋째, 대기업들의 자발적인 보상 및 예방 시스템이 가져올 수 있는 문제를 예측하고 적극 대응해나가야 한다. 정부의 공식 산재인정이 더디고 어려운 상황에서 대기업들이 사내 복지제도로 자체 보상을 진행하면, 산재보험제도의 문을 두드릴 피해 노동자들은 줄어든다. 자율적인 안전보건관리 강화는 흔히 유해물질이나 위험작업을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거나, 사외 하청업체로 내보내거나, 아예 해외 사업장으로 이전하는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 공식 산재인정의 문이 넓혀지지 않고, 정부의 안전보건 관리 감독이 강화되지 않은 채 유해위험작업이 외주화되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하다. 10년의 싸움으로 간신히 그 존재를 가시화했던 직업병 피해자들은 대기업에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것이고, 중소규모 하청업체이나 해외 공장에 흩어져 계속 존재해 갈 터이나 우리 눈에는 또다시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왜 백혈병에 걸린 건지 꼭 밝혀내겠다고 우리 유미한테 약속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두 번 다시 이런 억울한 일을 겪으면 안되잖아요.” 황상기씨는 10년 동안 투쟁을 이어가는 이유에 이렇게 답하곤 한다. 유미에게 한 약속은 지켰지만, 제2, 제3의 유미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황상기씨의 싸움은 아직 진행형이다. 저 단순한 한 마디에 반올림 운동이 아직 못다 한 숙제가 모두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