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30주년기획연재4)
1980년대 중반부터 노래와 구호로 퍼져 나가던 ‘노동해방’이 1988년 11월 13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매년 가을이면 전태일 열사의 주기에 맞춰 열리는 노동자대회가 시작된 날이다. 그 날 노동자대회는 그때까지 우리 역사에서 ‘전국’의 노동자들이 한 자리에 가장 많이 모인 날이었다. 1946년 메이데이 집회 때 모인 노동자들이나 1987년 7.8.9 노동자투쟁 때 울산 남목고개를 넘어 태화강변에 모였던 노동자들이 수는 더 많았다. 하지만 그때는 ‘전국’에서 모인 것은 아니었다.
대회장은 “계승하자 열사 정신! 철폐하자 노동악법”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열사정신 계승 노동해방 쟁취하자!”는 구호 소리로 가득 찼다. 노동자 선봉대 500여 명이 선서식을 끝냈다. 선봉대로 나선 노동자들과 인천 세창물산 노동자들 40여 명이 연단 위로 뛰어 나갔다. 반으로 부러뜨린 낭창낭창한 도루코 면도날로 들고 손가락에 금을 그어 흐르는 피로 하얀 광목 천 위에 ‘노동해방’이라는 붉은 글씨를 써나갔다.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5만여 노동자, 학생, 시민의 행진 대열 맨 앞에 노동자들이 붉은 피로 쓴 노동해방 깃발이 자리 잡았다. 이미 1920년대 선배노동자들이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하면서 “노농계급을 해방하고 완전한 신사회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함”을 강령 제1조로 내세운 적이 있다.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에서도 추구하던 ‘노동자들이 해방되는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노동운동의 방향과 목표는 1945년 11월에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에서 계승하였다. 전평의 소멸과 함께 증발된 줄 알았던 ‘노동해방’이 사라지지 않고 몇 십 년 동안 역사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었다. 골짜기 바위와 자갈과 흙 밑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어느 지점부터 솟아나 샘이 되고, 졸졸 흐르던 샘물이 모여 강물이 되듯 1980년대부터 다시 솟아난 ‘노동해방’이 큰 물줄기를 이루기 시작했다.
1987년 7.8.9 투쟁을 겪은 노동자들은 1988년, 1989년 투쟁의 성과를 모아 1990년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을 만들었다. 경찰의 철통같은 원천봉쇄를 뚫고 전국의 전노협 대의원과 선봉대 700여명과 학생 300여명이 성균관대 수원캠퍼스에 모였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전노협 진군가’를 불렀다.
새날이 밝아 온다 동지여 한발 두발 전진이다
기나긴 어둠을 찢어 버리고 전노협 깃발아래 총진군
잔악한 자본의 음모 독재가 판쳐도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총 파업 깃발이 솟았다 한발 두발 전진이다
노동자 해방의 그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2절은 “노동자 주인 될 그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으로 끝난다. 노동자가 주인되는 ‘노동해방’은 전노협 깃발에 쓰여진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과 함께 전노협을 상징하는 말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전노협 시절 전노협 소속 노동자들에게 노동운동의 방향과 목표가 무엇이냐고 설문조사를 했다면 아마 80%이상이 ‘노동해방’이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1990년 전후해서 노동자들의 머리띠와 노래, 구호, 깃발 속에 담겨 있던 ‘노동해방’의 구상도 똑 같지는 않았다. ‘강제와 감시 속에 우울하고 고통에 찬 죽음의 고역 같은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에서부터 막연히 ‘노동자 주인 되는 세상’,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곧바로 사회주의를 내세울 수 없는 시대 상황에서 ‘자본의 억압과 착취를 벗어나 임금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노동해방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전노협의 정신이라 일컬어지던 ‘노동해방’은 민주노총의 건설과정에서 노동운동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지 못하였고, 1997년 IMF 구제금융 상황이후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자본의 전면적인 공세에 휩쓸려 주변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노동해방’이라는 노동운동의 지향은 100년이 넘는 노동자 투쟁이 만들어 온 역사의 산물이며, 자본으로부터 ‘노동의 소외’를 극복할 뿐 아니라 고역 같은 ‘노동 자체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은 여전히 노동자들이 지향해야 할 ‘불온한 꿈’이며 새로운 세상의 핵심이다. 1925년 5월 1일 동아일보에 실린 한 편의 만평에서 보여주는 노동자가 앞장서서 자본주의 세계의 억압과 착취의 장막을 걷어 제치고 만들어낼 ‘자유세계’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성립된 뒤부터 노동시간을 줄이고 저임금을 철폐하려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자본주의 초기 노동자들은 하루 12-16시간 일을 해야 했다. 장시간 노동 때문에 여가 생활을 할 수 없었고, 정신까지도 갉아 먹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어 노동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올리기 위해 싸웠다. 1847년 영국의 노동자들은 ‘10시간 노동법’을 따냈다. 그런데도 다른 나라에서는 여전히 하루 14-15시간씩 일해야 했다. 노동자들은 8시간 일하고, 8시간 잠자고, 8시간 휴식할 수 있는 8시간 노동제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1864년 노동자 계급 최초의 국제 조직으로 창립된 제1인터내셔널에서는 강령 제1항에서 8시간 노동을 법으로 규정할 것을 요구했다. 8시간 노동제는 노동자들의 체력과 건강을 회복하고, 사회적 교제와 지적.도덕적. 정치적 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여 노동해방으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이었다. 1868년 미국의 노동자들도 조직과 투쟁으로 하루 8시간 노동법을 쟁취했다. 법이 만들어졌다고 현실에서 그대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1886년 5월 1일 미국의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전국적인 파업을 벌였다. 5월 3일 파업하는 맥코믹 농기계 공장 노동자들에게 경찰이 총을 쏘았다. 어린 아이까지 포함하여 6명이 목숨을 잃었다. 5월 4일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항의가 헤이마켓 광장에서 열렸다. 독점 자본가들의 하수인들이 폭탄을 던졌다. 자본의 앞잡이 경찰이 노동조합과 노동자 단체를 습격하고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잡아들였다.
1889년 세계 20개 나라에서 391명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여 제2인터내셔널을 결성했다. 다음해인 1890년 5월 1일에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동시에 1일 8시간 노동의 확립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대규모 국제적 시위를 조직한다”고 결의하고, “8시간 노동이 노동력을 한층 새롭게 하는 활기를 주고 인류의 퇴화를 방지하며 대다수 노동자로 하여금 인간다운 지적.도덕적 생활로 이끄는 수단이 된다”고 선언했다. 1890년 5월 1일 제1회 메이데이부터 모든 나라의 노동운동의 주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가 8시간 노동제의 전면적 실시였다.
우리나라 노동자운동도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8시간 노동’이 주요 투쟁 목표였다. 1924년 결성된 조선노농총동맹은 1925년 메이데이 때 ‘8시간 노동과 최저 임금의 확정’을 첫 번 째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1929년 원산 지역 3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80여 일 싸웠던 원산총파업에서도 8시간 노동제 실시, 최저임금제 확립, 단체계약권 수용이 주요 요구였다. 1930년대 혁명적노동조합 운동의 주역이었던 이재유는 ‘7시간 노동제’ 확립을 혁명의 주요 임무와 행동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1945년 11월 창립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는 최저임금제, 유급휴가제, 완전고용제, 사회보험제, 단체계약권, 결사 시위 파업의 자유, 노동자 공장관리와 함께 8시간 노동제를 일반행동강령으로 내세웠다. 1953년 근로기준법에서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하고 1일 8시간, 1주 48시간을 기준으로 한다”고 법제화된 이후 1989년에 “1일 8시간, 1주일 44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고 개정하여 주 44시간제가 성립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매년 5월 1일 노동운동의 당면 과제와 8시간 노동제를 주요 목표로 내걸었던 ‘메이데이’노동절이 1950년대 이승만 정권 때인 1958년 대한노총 창립일인 3월 10일로 바뀌었다. 군사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1963년 이름마저 ‘근로자의 날’로 바꾸었다.1980년대 중반부터 5월 1일 노동절을 투쟁을 전개하였다. 1994년 법개정으로 ‘5월 1일’날짜는 되찾았으나 이름은 여전히 노동을 빼앗긴 ‘근로자의 날’이다.
1995년 민주노총이 창립된 뒤 1996년부터 주 40시간 노동제 투쟁을 전개하였다. 2003년 마침내 주 40시간제가 도입되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전면화 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비정규직의 확산, 실업률의 증가 상황에서 주요한 대안으로 내세우는 요구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었다. 하지만 주 40시간 노동, 주 5일제로 도입된 노동시간 단축은 투쟁을 통한 노동운동의 중요한 성과였으나 그 자체로 이전에 비해 새로운 일자리를 늘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현실은 노동자들 스스로 ‘8시간 노동’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였으며 나머지 시간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시간으로 장악하지 못하였다. 과학기술의 발달을 바탕으로 한 정보화, 자동화나 신기술을 자본이 장악하여 노동강도를 높임에 따라 노동시간 단축효과가 반감되기도 하였다. 노동시간이 임금과 노동조건의 문제와 따로 떼어 놓을 수도 없다.
그렇지만 자본으로부터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고역 같은 노동 자체로부터 벗어나는 지금 여기 노동해방의 핵심과제는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노동량을 대폭 축소하여 더 많은 휴식과 여가와 스스로 자유롭게 관리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투쟁과 실천이다. ‘새로운 일자리’에도 당연히 적용되어야 할 목표이다.
현실에서 ‘노동해방’ 세상은 당장 실현되기 어려운 불가능하고 불온한 꿈일지 모르나 그 과정의 상징이자 실제 내용으로 나는 “먹고 살만큼만 적게 일하고 잘 놀자”를 내세운다. 일을 안 하면 먹고 살기 힘들다. 하지만 일만 하다보면 죽는다. 그래서 요즘 “먹고 살 만한가보다”는 비아냥을 무릅쓰고 강의 끝날 때마다 일상에서 ‘1.1.1.3.3.3 실행하기’를 숙제로 낸다. 숙제 검사 없는 숙제이니까 강요는 아니다. 매일 하루에 한 주제로 일기 쓰기, 한 달에 책 한 권 읽기, 악기 한 가지 익히기, 노래방 기계나 스마트 폰에 의존하지 않고 노래 세 곡 부르기, 시 세편 외워서 낭송하기, 일주일에 3장씩 그림 그리기이다. 덧붙여 춤추기도 넣어야 하겠다. 당연히 시간 없고 돈 없어서 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나온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여기서 이렇게 배우고 놀기 위해서라도 노동시간 단축 투쟁을 벌이고 임금인상 투쟁을 해야 하지 않겠나. 거꾸로 일 적게 하고 임금 올려서 뭘 하려고 하는 반문도 가능하다. 청춘도 젊음도 마냥 지속되지 않는다. 놀고 싶어도 놀 줄도 모르고, 하고 싶어도 못 놀 날이 온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니까 오늘 잘 놀자”는 인식을 바탕으로 발상의 전환을 꾀하고 상상력을 촉발해 보자는 뜻이다. 체게바라가 혁명에 성공한 뒤 청년들에게 했던 강의에서 인상 깊었던 대목, "지구상에 한 사람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서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성을 계발하고, 자유의 깃발 아래 나설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에서 ‘감성 계발’의 매개 고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꿈꿨던 ‘밥과 하늘이 중심인 세상’은 자본의 이윤을 위해 일하고 상품의 소비 욕망에서 허덕이는 세상이 아니라 생존권이 확보되어 먹고 살 염려 없이 살 수 있는 세상, 모든 인간의 자존과 존엄이 인정되는 평등한 세상이었다. 인간사에서 史를 人+口로 해체하여 본다면 역사의 주체인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입으로 하는 먹는 일과 말을 매개로 하는 소통과 관계이다.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가 핵심이다. 평화에서 和는 禾+口이다. 평화는 평등한 관계 속에서 입에 곡식(밥)들어갈 걱정 없는 상태이다. 동학농민군의 꿈이나 ‘인간사’, ‘평화’에서 더 보태야할 새로운 꿈이 ‘잘 놀자’이다.
레닌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독수리는 때때로 닭보다 낮게 날 수는 있지만, 닭은 결코 독수리처럼 높이 비상할 수 없다..... 그녀는 독수리였으며 독수리로 남을 것이다” 하고 독수리로 비유하였다. 현실을 고정 불변한 상태라고 체념하며 전술에 급급하면 닭 밖에 될 수 없다. ‘노동해방’은 여전히 노동운동의 독수리이며, 반자본주의 저항의 무기이며 탈자본주의 탈주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