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에 포섭된 ‘촛불혁명’과 개혁의 후퇴

  • 글쓴이: 김정주(진보평론 편집위원, 경제학)
  • 2019-01-14

  1. 문재인 정부 안의 ‘트로이 목마’ 경제관료

  2016년 11월의 ‘촛불혁명’을 통해 분출된 한국사회의 근본적 구조개혁에 대한 대중적 열망을 안고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출범 1년을 넘기면서 차츰 정치적 사면초가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출범 초기부터 1년 넘게 80% 수준을 유지해오던 대통령에 대한 국정지지도는 2018년 부동산 대책 발표, 최저임금 인상 논란, ‘주52시간’ 노동제 도입 및 탄력근로제 확대 논란, 그리고 마침내 청와대 경제수석과 경제부총리 등 ‘경제사령탑’의 교체를 거쳐 최근에는 45% 대로 급전직하 했다. 여러 이유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달 만에 대통령에 대한 국정지지도가 급격히 하락했다는 사실은 2016년 ‘촛불혁명’ 이후 대통령과 현재의 집권 여당을 중심으로 결집했던 대중이 이들로부터 빠르게 이탈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인 것만은 분명하다.

  정권 출범 이후 대북정책에 있어서는 일정한 성과를 냈지만 실업률과 같은 일자리 지표를 중심으로 경제적 성과가 크게 부진했다는 점이 정권으로부터의 대중적 이탈과 국정지지도 하락을 가져 온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극우적 성향의 야당은 물론 보수언론들 마저도 문재인 정부가 가장 핵심적 정책으로 내놓은 ‘소득주도 성장론’을 좌파 포퓰리즘 정책으로 낙인찍으며 이러한 반시장적, 반기업적 포퓰리즘 정책이 경제지표의 악화를 가져왔다면서 정권으로부터의 대중적 이탈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거시경제 지표 상 지난 1년 간 문재인 정부의 경제적 성과는 ‘정책실패’로 부를 만큼 아주 나쁜 편은 아니다. 2.9%로 예상되는 올해의 경제성장률은 3%대 성장률을 달성했던 작년보다 분명 저조한 것이지만, 갈수록 심화되는 미-중 간 무역분쟁과 세계경제의 전반적 침체 국면 속에서도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높은 수준의 성장률을 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년에 불어 닥친 조선업의 위기와 군산공장 폐쇄로 이어진 GM사태 같은 충격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여전히 수출은 증가세를 유지했으며 환율 또한 안정적 수준에서 유지되었다. 거시적 성장지표와 대외적 경제지표의 안정에도 불구하고, 일자리 지표가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온 점이 문재인 정부로서는 큰 부담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실업률은 4.5% 수준으로 상승했으며, 특히 30세 이하 청년층의 실업률은 10% 수준에 이르렀다. 또한 소비와 투자 등 내수의 전반적인 부진 속에서 한국의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자영업자의 위기가 심화되었다. 결국 올 한해 한국경제의 전체적인 상황을 평가해보자면, 수출에 의존한 견실한 성장세 속에서도 이러한 성장의 결과가 내수부문으로 충분히 파급되지 않음으로 인해 여전히 내수산업을 중심으로 수익률 악화와 고용지표의 부진이 이어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과 관련해 이러저러한 비판과 비난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주로 고용지표의 악화와 영세 중소자영업자의 수익률 악화 문제인데, 보수진영에서 제기하고 있는 비판의 핵심은 주로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주52시간’ 근로제 도입과 같은, 기업과 자영업자 입장에선 노동비용의 급격한 증가를 의미하는 반기업적 노동정책이 기업의 고용기피와 자영업 부문의 수익률 악화를 가속화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반기업적이고 친노동자적인 이른바 ‘소득주도 성장론’의 폐기를 일관되고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다. 심지어 얼마 전 물러난 김동연 경제 부총리마저 ‘소득주도 성장론’의 폐해를 언급하며 자신의 재임 기간 중에 나타난 저조한 고용성과가 자신의 정책적 역량 부족 때문이기 보단 마치 설익은 좌파 포퓰리즘 정책의 무리한 추진 때문이란 생각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정책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자신의 과오를 감추기 위한 매우 무책임한 발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경제공약이었던 ‘소득주도 성장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에 동의하지도 않으면서, 또한 이를 추진할 정책적 역량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가 문재인 정부의 초대 경제 부총리라는 막중한 책임을 스스로 떠맡아야 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를 초대 경제 부총리로 지명한 문재인 정부나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 김동연 경제 부총리나 모두 불가사의하기는 마찬가지다. 정권의 핵심공약이자 핵심정책인 ‘소득주도 성장론’에 동의하지도 않고 이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며, 따라서 이를 정책적으로 추진할 의지도 없는 그저 고만고만한 경제관료를 정권의 초대 경제 부총리로 임명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문재인 정부에 내재된 근본적 개혁에 대한 의지 부족과 그로 인한 개혁실패의 숙명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올 한해 나타난 고용지표의 부진과 내수부문의 어려움을 오직 ‘소득주도 성장론’의 한계로 돌리고자 하는 이러한 태도가 얼마나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철면피적 태도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따져보자.

  퇴임한 김동연 경제 부총리는 ‘소득주도 성장론’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에는 끝까지 예리하고 성실한 태도를 잃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임기간인 올 한 해 동안에만 정부가 자그마치 30조 원에 가까운 세금을 더 거두었다는 사실에 대해선 끝까지 무책임한 침묵을 지켰으며, 이러한 막대한 규모의 초과세수가 내수경제 및 일자리에 얼마나 ‘파괴적’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선 퇴임하는 그날까지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30조 원의 초과세수는 현재 한국 GDP 규모의 거의 2% 수준에 이르는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다. 정부가 세금으로 거두지 않았다면 일반 국민의 주머니에서 소비하는데 쓰이고, 따라서 내수경기를 활성화 하는 데 쓰였을 돈이 ‘쓸 데도 없이’ 정부의 금고 안에서 잠자고 있었던 셈이다.

  내수경기 부진으로 인해 고용지표가 악화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쓸 데도 없이’ 무작정 더 거두어들인 30조 원의 세금은 내수경기를 더욱 위축시키고 일자리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을 것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정부는 올해 발생한 막대한 규모의 ‘초과세수’ 문제를 분명히 밝히고 이를 내수경기 부양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으로 편성해 과감히 지출했어야만 했다. 30조 원의 막대한 돈을 정부 금고에 묵혀놓은 상태에서 경기가 좋아지고 일자리 상황이 개선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경제학원론’ 정도를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만일 정부가 올해 거둔 초과세수 30조 원 가운데 20조 원만 지출했어도 경제성장률 3% 달성은 물론 일자리 상황도 크게 개선되었을 것이다. 경제를 순환해야 할 혈액과도 같은 돈줄을 초과세수를 통해 죄어버리고 가뜩이나 수출부문과 내수부문의 연관성이 취약한 상태에서 경제 전체가 동맥경화증에 걸리도록 부채질한 건 다름 아닌 정부 자신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경제관료 출신인 김동연 경제 부총리는 자신이 퇴임하는 날까지 이 문제를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언급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러한 사실 자체를 끝까지 은폐하려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올해 단행된 큰 폭의 최저임금 상승 등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임금상승이 한계 기업 및 영세 중소자영업자에게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적극적인 정부 재정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러나 김동연 부총리의 경제팀은, 초과세수로 인한 충분한 재정적 여유를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재정적 역할을 끝까지 부정했으며, 그 결과 내수경기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따라서 올해 예상 밖의 내수경기 부진은 직접적으론 경제사령탑인 김동연 부총리의 정책적 무능력과 태업(!)에서 비롯된 것이지 최저임금 인상 및 ‘주52시간’ 근로제 도입 등과 같은 노동조건의 변화, 나아가 ‘소득주도 성장론’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현재의 여러 정황 상 김동연 부총리를 비롯한 보수적 관료집단은 ‘소득주도 성장론’으로 상징되는 노동친화적 정책을 좌절시키고 정책추진을 위한 정치적 동력을 약화시킬 현실적 알리바이를 제공하기 위해 초과세수 문제를 의도적으로 감추어 오고 은폐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즉, 의도적으로 경제가 경색될 수밖에 없는 국면을 조성한 뒤 이를 반기업적이고 반시장적인 ‘소득주도 성장론’과 노동친화적 정책 탓으로 돌려 이를 좌절시키려 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사회 전체를 위해서는 물론 개혁정부를 자임해온 문재인 정부에 있어서도 매우 끔찍하고 불행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개혁정부에 있어서 경제관료 집단은 여전히 개혁에 저항하고 개혁성을 거세함으로써 개혁정부 스스로 자멸토록 하기 위해 수구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파견된 ‘트로이 목마’인 것인가?

  노무현 정부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자신들의 개혁과제와는 어울릴 수 없는 수구적 경제관료를 자기 정권의 초대 경제 부총리로 임명한 것 자체가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이미 예견해주었다는 측면에서 ‘촛불혁명’의 완수를 자임하며 집권한 문재인 정부 또한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 하는’ 모순 속에서 스스로 실패의 길을 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겠다.

 

2.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논란의 본질

  올 한해 ‘소득주도 성장론’과 더불어 가장 큰 논란을 일으켰던 문제는 단연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 문제였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한 첫 해인 작년에는 최저임금을 16.4% 인상해 2018년의 최저임금은 시간당 7,530원이 되었으며, 올해는 최저임금을 다시 10.9% 인상해 2019년의 최저임금은 시간당 8,350원으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주 40시간을 일하는 노동자라면 월급으로 대략 174만 원 이상의 소득을 보장받게 된다. 대통령 선거를 치루는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스스로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원 수준까지 인상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는데, 이럴 경우 주 40시간 이상 일하는 모든 노동자는 최소 208만 원 이상의 월급을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의 공약대로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 원 수준까지 인상하려면 매년 15%가 넘는 수준의 최저임금 인상을 단행할 수밖에 없고, 이는 전임 정부였던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하에서의 최저임금 평균 상승률인 6% 수준에 비해 상당히 높은 인상률인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최저임금 망국론’까지 등장하면서 최저임금 인상 문제는 올 한해 가장 뜨거운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최저임금이 가파르게 오른다고 해서 나라가 망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문재인 정부가 ‘소득주도 성장론’과 더불어 이를 실현할 하나의 정책적 수단으로서 최저임금 인상을 자신의 핵심 경제 공약으로 제시했던 데에는 한국경제의 현실 인식과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배경이 있었다. 우선 2000년대 초반 이후 한국사회 내에서 중산층이 붕괴되면서 소득분배 상태가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왔다. 올해 통계청이 발표한 2017년 한국의 지니계수는 0.355로 한국은 이른바 ‘선진국 클럽’이라 불리는 OECD 회원국들 가운데 네, 다섯 번째로 소득분배가 불평등한 나라다. 그러나 국세청이 보유한 과세자료에 기초해 추정할 경우, 한국은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3%를 차지하면서 주요 선진국들 가운데 미국 다음으로 소득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다. 이처럼 소득분배 상태가 불평등해지고 상위 10%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소득이 집중될수록 하위 90%에 속하는 사람들의 소득과 소비여력은 점차 위축될 수밖에 없으며, 결국 그러한 경제는 활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소득불평등도가 지금처럼 계속 악화된다면, 활력을 잃고 시들어가는 경제와 몇몇 ‘슈퍼 부자’가 공존하는 기묘한 모습이 다름 아닌 한국경제의 미래가 될 것이다.

  또한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전체 GDP 가운데 이윤분배몫은 지속적으로 상승해온 반면 임금분배몫은 지속적으로 하락해왔다. 이를 반영하듯 전체 GDP에서 기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속적으로 증가해왔지만, 반대로 가계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속적으로 하락해왔다. 결국 경제활동을 통해 창출된 소득이 지속적으로 기업부문에만 집중되어 왔다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더 많은 소득을 가져 간 기업들이 투자를 통해 이를 지출하지 않고 이른바 ‘사내유보금’ 형태로 쌓아두고만 있다는 데 있다. 기업으로 흘러 들어간 소득이 지출되지 않고 쌓여만 있으니 경제 전체적으로 돈이 돌지 않으면서 소비와 내수가 부진하고 고용은 늘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경제는 성장하지만 늘어난 소득의 보다 많은 부분이 상위 10%의 개인에게 집중되고 가계보단 기업에 집중되다보니 경제의 활력은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상위 10% 고소득자와 기업으로 흘러들어간 돈은 소비나 투자형태로 지출되지 않고 저축형태로 쌓여만 가니 시중에 유동자금은 풍부해져서 이들 유동자금이 부동산 시장 등에 몰리면서 아파트와 같은 자산 가격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리는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즉, 심화되는 소득불평등의 문제는 고소득자와 빈곤층 간의 자산불평등의 문제 또한 심화시키면서 활력을 잃어가는 경제에서 오직 주택 가격과 같은 자산 가격만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왜곡된 경제구조를 고착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국경제에 대한 이와 같은 현실 인식 하에 소득불평등의 문제, 특히 자본 소득자에 대한 임금 소득자의 불평등과 기업부문에 대한 가계부문의 불평등 문제를 해소함으로써 경제성장의 과실이 모든 경제주체들에게 균형적으로 분배되도록 하고 이를 통해 소비 및 내수경기의 활성화,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 그리고 저축의 생산적 활용 등을 위해 제안된 정책이 바로 ‘소득주도 성장론’이며,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정책적 수단이 최저임금 인상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소득주도 성장론’은 왜곡된 소득분배구조를 개선함으로써 경제를 활성화 하고자 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러한 정책을 통해 자신의 소득 일부분을 양보해야만 하는 고소득 계층이나 기업들의 극심한 반발을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제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소득주도 성장론’이라는 정책 자체를 무력화 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매우 집요하게 전개되었다. 이들의 주된 논리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비용의 급격한 상승을 초래해 임금지급 여력이 충분치 않은 한계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를 중심으로 수익성 악화를 초래할 것이고, 결국 이들로 하여금 고용 자체를 회피하도록 함으로써 오히려 최저임금 노동자의 일자리 문제가 악화됨을 물론 경제의 활력은 더 떨어지게 될 것이란 점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절반은 맞지만 절반은 완전히 틀린 이야기다.

  우선 임금을 단순히 ‘지불해야만 하는’ 비용의 문제로 보는 건 완전히 잘못된 관점이다. 일반적으로 최종 생산물이 만들어지면, 최종 생산물의 가격에서 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투입된 중간재의 가격을 뺀 나머지를 ‘부가가치’라 부른다. 따라서 부가가치는 생산과정에서 새롭게 창출된, 혹은 만들어진 가치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형성된 부가가치가 노동자의 임금과 기업(혹은 고용주)의 이윤으로 분배되면서 국민경제 전체의 소득 수준을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노동자에게 지불되는 임금이란 경제 전체적으론 비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생산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부가가치 혹은 소득으로부터의 분배를 의미한다. 따라서 임금의 상승은 비용의 증가가 아닌 생산된 부가가치로부터 분배되는 임금몫의 상승을 의미할 뿐이고 이것은 경제 전체의 비용 증가와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이다.

  임금의 상승을 통해 생산된 일정한 부가가치 가운데 임금몫이 증가한다면, 그 결과 당연히 이윤몫은 감소할 것이다. 노동자를 고용한 기업과 고용주가 실제 두려워하는 것, 따라서 최저임금 상승과 ‘소득주도 성장론’에 기필코 반대하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그들은 비용의 증가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윤몫이 줄어드는 것을 진정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윤몫의 감소는 당연히 기업과 고용주의 입장에선 (비용 증가에 기인한 것이 아닌 그들의 이윤몫 감소에 기인한) 수익률의 악화를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최저임금 상승을 둘러싼 오랜 논란의 본질은 경제 전체가 부담해야 할 비용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 및 경제활동을 통해 창출된 부가가치 혹은 소득의 분배 문제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업과 고용주는 임금 상승으로 인한 이윤몫의 감소를 회피할 수단 역시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임금이 상승하는 것만큼 생산물의 가격을 인상하는 것이다. 생산물의 가격을 인상하는 것만큼 부가가치는 커질 것이고, 따라서 임금 상승에 따른 이윤몫의 감소를 가격 인상을 통해 회피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이윤몫의 감소를 회피하기 위한 가격 인상을 통해 비로소 경제 전체의 물가수준이 상승하는 인플레이션이 나타나면서 일정량의 생산물을 생산하기 위해 경제 전체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 또한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경제 전체의 비용을 증가시키는 요인은 임금 상승 그 자체가 아니라 이로 인한 이윤몫의 감소를 회피하기 위해 기업과 고용주가 취하게 되는 가격 인상과 인플레이션인 것이다. 이를 다르게 해석해보자면, 결국 가격 인상을 통해 이윤몫의 감소를 회피하고자 하는 기업과 고용주들의 행위에 대한 적절한 규제가 없다면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노동자들의 임금몫을 늘리고자 하는 정책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 내에서 정부가 가격 인상을 통해 이윤몫의 감소를 회피하고자 하는 기업의 행위를 규제할 수단과 방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최저임금을 비롯한 전반적인 임금 수준의 상승을 수단으로 하는 ‘소득주도 성장론’의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할 수 있겠다.

  최저임금의 빠른 상승이 한계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들의 수익성을 악화시킴으로써 이들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애초에 임금 문제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낮은 부가가치 생산능력 자체가 이들 부문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늘 상존해왔다. 즉,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고용주와 노동자가 나눠가져 갈 수 있는 부가가치 자체가 워낙 작다보니 이들 부문은 애초에 최저임금 이상을 지불할 여력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저임금 노동자는 주로 한계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 부문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높은 임금 때문에 영세해진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영세하기 때문에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는 임금 문제 그 자체라기 보단 오히려 한계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 부문의 부가가치 생산능력이 왜 그토록 열악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자영업의 대표업종인 편의점의 수익구조를 다루고 있는 한 언론사의 보도(2018년 7월 17일 ‘KBS 9시뉴스’)가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

  한 달 매출이 8천 만 원으로 적지 않은 매출을 올리고 있는 서울 시내 한 편의점의 경우, 가맹점 본사로부터의 제품구입비용 5천 7백 만 원을 제하고 나면 2천 3백 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매출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매출이익 가운데 가맹점 수수료로 30%를, 임대료로 30%를 내고 나면 편의점 주인은 매출이익의 고작 40%를 가져올 뿐이며, 여기에서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도 받지 못하는 아르바이트생 5명의 임금 450만 원을 제하고 나면 편의점 주인은 고작 240만원의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매일 24시간 가게 문을 열면서 한 달을 쉬지 않고 일해 얻은 이익의 60%를 가맹점 본사와 건물주가 가져간다면, 편의점 주인과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은 과연 누굴 위해 일하고 있는 걸까?

  만일 편의점 매출이 획기적으로 더 늘어날 수만 있다면 매출이익의 40%만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편의점 주인도 적정 이윤을 가져갈 수 있고, 또한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에게도 최저임금 이상의 임금을 지불할 여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편의점을 비롯한 한국의 자영업 부문이 이미 과포화 상태에 있다는 건 이제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은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자영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30%를 넘어설 정도로 다른 나라에 비해 자영업자 수가 너무 많은 나라다. 따라서 이미 과포화 상태에 있는 자영업 부문에서 이들 업종의 매출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기를 기대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소득불평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소비와 내수가 위축되는 상황에선 이를 기대하기가 더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엔 왜 이리 자영업자가 많은 것일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으론 한국경제의 성장산업인 제조업이 충분한 노동력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시적 구조조정을 통해 대규모 노동력을 방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영업 부문이 영세해질 수밖에 없는 이와 같은 구조적인 문제들과 한국의 노동시장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함께 고려하지 않은 채 마치 최저임금 인상 그 자체가 한계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 부문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 대안을 마련하는 데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의 경제팀은 본질에서 벗어난 최저임금 인상 논란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잠시 동안의 논란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일관된 정책으로서 이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 또한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 많은 논란 속에서 최저임금 인상이 경기부진과 고용위축의 주된 요인으로 지목되는 순간, 정권이 출범한지 고작 1년 남짓 만에 문재인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인 ‘소득주도 성장론’ 또한 사실상 무력화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3. 과거로의 회귀: 소득주도 성장에서 다시 투자주도 성장으로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한국사회에 나타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문제이다. 제조업과 서비스업 사이의 임금격차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같은 제조업 내에서도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 수익률 격차와 임금격차는 되돌리기 어려울 정도로 확대되어 왔다. 이미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이고 이들의 소득은 정규직 노동자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수익률 격차와 임금 격차에 기인해 개인들 사이에선 상위 10%의 고소득자에게 소득이 집중되었고, 가계소득보단 기업소득이 더 빠르게 증가해왔다. 그 결과 소득불평등과 자산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중산층 또한 서서히 붕괴되어 왔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대중적 소비기반의 약화를 통해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려 왔으며,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하락하는 추세 속에서 부동산 시장에서 아파트와 같은 자산 가격만이 끊임없이 상승하는 기형적인 경제구조를 고착화 해왔다. 어느새 한국사회는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 되지 않고는 사회적 계층 상승이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으며, 노후를 대비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은 성실한 노동과 절제된 저축이 아닌 부동산을 통해 투기 차익을 얻는 것이 되었다. 이처럼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한번 낙오하거나 실패하면 두 번 다시 계층 상승의 기회를 얻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물질적 욕망에 강하게 사로잡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은 기피하고 천시해야 할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결과 한국사회에서 청년세대의 가장 큰 장래 희망은 건물주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마치 수 백 년 전 조선사회에서 과거시험에 합격해 관료가 되는 것이 유일한 입신양명의 길이었듯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안정적 연봉과 높은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공무원이 되는 것이 우리사회 젊은 세대의 인생목표가 되었다. 21세기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득불평등과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어 온 우리사회는 어느새 몇 백 년 전 조선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회로 되돌아 가버린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창의적 사고가 가능할 것이며, 어떻게 새로운 혁신인들 가능할 수 있겠는가? 우리사회는 어느새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조차 두려운, 따라서 생명을 잉태하는 것조차 어려운 불모지나 다름없는 사회가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지난 십 여 년 간 지속적으로 심화되어 온 우리사회의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사회와 경제 전반에 걸친 시급한 구조전환 및 개혁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촛불혁명’을 통해 표출된 한국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개혁에 대한 대중적 열망과 지지 속에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집권 첫해 핵심적 경제정책 방향으로 소득주도성장, 공정경제, 혁신경제 등을 제시하였다. 이는 한국사회 내의 사회경제적 양극화 자체가 성장잠재력을 떨어뜨리고 있으며, 따라서 이를 해소하지 않고는 지속적 성장 또한 불가능하다는 문제의식 하에 나온 것으로서 현재 한국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검토했듯이 이전 정부들과는 분명히 다른 이와 같은 정책방향의 전환은 이미 정권 내부에서 이를 집행할 경제 관료들의 반발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일 년 간 청와대와 경제 부총리 사이에 나타난 정책방향을 둘러싼 불협화음과 구조개혁 과정에서 필요한 정부 재정의 적극적 역할을 의도적으로 방기해온 것으로 의심할만한 관료 출신 경제 부총리의 태업에 가까운 행보 등은 이를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정책방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경제 관료들을 정치적으로 규율하고자 하는 확실한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으며, 그 결과 ‘소득주도 성장론’ 자체가 정치적 논란거리로 전락함으로써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정치적 동력 또한 점차 소진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소득주도 성장론’은 그것에 내재된 올바른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정책이다. 최저임금 상승 등을 통해 전체적인 임금 상승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단기적으로 전체 소득 가운데 임금몫을 늘린다 하더라도, 기업이나 고용주 입장에선 가격 인상을 통해 임금 상승이 가져올 이윤몫의 하락을 회피할 수단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소득주도 성장론’은 단기적 효과만을 낸 채 장기적으론 인플레이션만을 야기할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따라서 불평등한 소득분배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선 최저임금 인상 등에 의존하기 보단 근본적으론 조세구조 개혁 등을 통해 한국사회에 만연된 불로소득 및 자산소득 등에 대한 과세수단들을 강화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실제 한국에서 조세가 갖는 소득불평등 개선 효과는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매우 약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누진과세의 원칙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한국의 조세구조를 개혁하는 일이야 말로 훨씬 중요하면서도 본질적 의미를 갖는 개혁과제 가운데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간 대립과 갈등이 가장 첨예한 형태로 표출되는 문제가 바로 조세구조를 개혁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는 최저임금 인상 과정에서 드러난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정치적 반발과 반동을 불러 올 것이다. 따라서 조세구조를 개혁하는 문제야 말로 사회적 개혁에 대한 절박한 정치적 의지 없이는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과 더불어 대통령 직속 위원회로 ‘재정개혁특별위원회’를 두고 조세구조 개혁 등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고는 있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한국의 조세구조가 갖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고민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세구조 개혁을 위한 사회적 의제 또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곧 집권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 또한 한국사회가 시급히 필요로 하는 개혁과제들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적 수단들과 정치적 프로그램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민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제 곧 집권 2년차를 맞는 문재인 정부는 집권 이후 한국사회의 구조개혁과 적폐청산을 끊임없이 강조해왔지만, 지금까지의 정책추진 과정 등을 고려해본다면 이는 실제적 성과를 의도한 것이라기 보단 정치적 지지층의 결집을 위한 정치적 수사에 그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한국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이를 위한 개혁을 끊임없이 강조해온 올 한 해 동안 경제성장률이 예상치를 밑돌고 고용지표가 개선되지 않자 문재인 정부는 청와대 경제수석과 경제 부총리 등 경제팀 전체를 교체하고 소득주도 성장대신 대규모 기업 투자에 기초한 혁신성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정책기조를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는 과거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결국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한국사회의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매개고리인 분단화 된 노동시장의 구조개혁 문제는 물론 재벌개혁을 중심으로 한 산업구조 재편 문제는 제기조차 되지 못한 채 구조개혁보다는 경제적 성과를 강조하는 지표관리형 정책으로 경제운용 방향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일 년의 문재인 정부를 평가하자면, 개혁과 적폐청산을 강조했던 것에 비해 개혁에 대한 정치적 의지는 턱없이 부족했고, 개혁을 위한 구체적 수단과 정치적 프로그램에 대한 고민 또한 부재했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대통령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도 매우 분명해졌다. 현재의 집권 여당 또한 최저임금 산입 범위와 탄력근로제 확대를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대통령의 핵심 경제공약인 소득주도 성장에 대한 정책적 확신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한국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개혁에 대한 확고한 정치적 의지 또한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모든 문제는 다시 정치로 귀결된다. 지금의 집권 여당이 ‘촛불혁명’의 가장 큰 정치적 수혜자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촛불혁명’을 통해 표출된 한국사회의 근본적 변화에 대한 대중적 의지를 결코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말로 어쩌면 한국사회가 직면해 있는 가장 큰 불행들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