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책 〈제국〉이 출간된 후, ‘제국이냐 제국주의냐’를 둘러싼 논쟁이 뜨거웠다. 한국 사회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관심을 끌었다. 논쟁의 핵심은 “오늘의 세계는 미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이며, 이른바 세계화란 미국 제국주의의 세계적 지배의 확장 과정일 뿐”이라는 제국주의적 관점에 대해, “현대 자본주의는 전지구적 주권질서로 구축된 지구제국”이라는 제국론적 관점으로 나뉜다. 이러한 논쟁은 좌파연구자들에게 많은 혜안과 통찰력을 제공함으로써 학문적 성숙을 배가시켜 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와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다만 그 효과로서 사회운동이나 변혁운동에 얼마나 반영되는지는 별개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2019년 오늘에서 보면 여전히 세계 자본주의는 국민국가 수준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른바 ‘제 3세계’는 제국주의 억압과 수탈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여전히 민족, 종교, 인종 문제가 중요한 행위의 요인이자 주체이다. 최근 준동하고 있는 우파 포퓰리즘도 동일한 맥락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자본은 전지구적 수준으로 확장되고 있지만 국민국가를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했다. 삼성은 초국적 자본이지만 여전히 한국 자본이다. 자본은 국적이 없어서 다국적이지만 자본가는 국적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국가를 넘어서려는 일련의 시도와 흐름들은 여전히 답보상태이다. 유럽연합이나 남미의 사례는 현재적이고 실증적이다.
미 제국주의의 위기와 트럼프의 등장
현재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미국과 중국 양 제국주의 간 패권 쟁투의 시대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유일 패권에 대해 중국이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위협함으로써 ‘G2’라는 새로운 구도가 만들어졌다. 미소 냉전시대의 경쟁 구도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최근 미중 무역전쟁이 ‘90일 휴전’으로 들어가고, 캐나다에서 전격 체포된 화웨이 창업자의 딸인 멍완저우(孟晩舟) 부회장이 석방되었지만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물론 양쪽 모두 파국을 원치 않기 때문에 당장은 물밑 협상을 통해서 합의에 이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예측하기 힘들다. 양 제국주의는 경쟁을 무역전쟁으로 시작하지만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경쟁이 저변에 깔려 있어서 어느 한쪽이 우월하다는 결론이 날 때까지 지속할 것이다.
그동안 중국은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를 기존 40%에서 15%로 낮추고 미국산 대두 수입을 재개했다. 또 중국 최고인민법원이 2019년 1월 1일부터 기업 특허소송 등을 다루는 지식재산권법원을 설립하기로 하는 등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미국도 984개 중국 수입품에 대한 고율 관세를 철회하는 등 미·중 양국이 협상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 흐름이 깨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이 ‘강제 기술 이전 금지’ 등을 내세워 중국의 최첨단산업 육성책인 `중국제조 2025’에 대해 계속 태클을 걸고, 중국은 이를 방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경향신문>, 2019.1.1.)
‘중국제조 2025’는 2015년 리커창 총리가 전인대에서 발표한 내용으로 중국의 산업개발을 그 동안의 양적 성장에서 향후 질적 성장으로 바꾸겠다는 내용이다. 차세대 정보기술, 로봇, 항공우주, 해양 공학, 고속철도, 고효율 신에너지 차량, 친환경 전력, 농업 기기, 신소재, 바이오 등을 중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10대 핵심산업으로 지정해서 2020년까지 핵심부품과 자재의 국산화율을 40%까지 끌어올리고, 2025년까지는 70%까지 끌어올려서 세계 최고의 기술대국 수준으로 끌어 올리겠다는 전략이다.
그런데 이 전략이 미국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되는 것이고, 방치하게 되면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 오게 된다. 그래서 샤오미나 화웨이, ZTE 같은 기업들에 대해 미국의 기업들이 경계심을 높이고 있는 중이다. 그 와중에 화웨이의 멍 부회장 체포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지금의 미중 무역전쟁은 중국이 미국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면 끝나게 된다. 현재의 조건 속에서 정면 대결은 중국에게 승산이 없다. 그런 점에서 중국의 태도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중국은 강온을 오가며 미국을 약올린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미 제국주의 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시진핑의 집권 전략이다. 미국의 대통령으로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미 제국주의의 위기가 핵심이다.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에 대한 전제들이 모두 흔들리고 있다. 첫째, 미 군사력이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압도적이지만 지역적으로는 흔들리고 있으며, 둘째, 금융위기 이후 대서양 동맹이 이완되었고, 셋째, 중국의 세계자본주의 시장 참여에 대한 기대가 틀렸고, 넷째, 민주주의 확산으로 세계 평화가 유지된다는 전망과 달리 선진국에서부터 민중적 반발이 나오고 있으며, 다섯째, 우익 포퓰리즘이 유럽에서부터 확산되고 있으며, 여섯째,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역진 가능성이 대두하였고, 마지막으로 기술진보에 의한 낙관론이 인공지능과 로봇의 도전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 제국주의의 위기는 자유주의자들마저 자유주의의 ‘후퇴’ 혹은 ‘위기’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첫째, 출산율 저하와 인구 노령화 같은 장기적 추세에 기인한 경기침체, 둘째, 세계화의 부작용과 그에 대한 반발이다. 자유무역에 따른 저임금 국가의 노동이 고임금 국가의 노동을 대체면서 실업률은 높아지고 직업안정성은 낮아졌다. 셋째, 정보통신기술의 혁명적 변화에 따른 제4차 산업혁명이다. 컴퓨터와 로봇,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빼앗아 갔다는 것이다. 넷째, 재정문제다. 정부지출을 늘렸는데, 문제 해결은 불가능했고 오히려 국가부채만 증가했다는 것이다.(김태현, “중국의 부상, 세계질서의 위기, 그리고 동아시아: 한국의 전략.” 『한국과 국제정치』, 제33권 제1호(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2017), 19-20쪽).
이러한 위기 담론이 분명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정치적 자유주의는 더 이상의 신뢰를 상실하였고, 자본주의는 방향 감각을 상실하였다. 신자유주의 축적 체제가 위기 극복 노력을 게을리 할 경우 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트럼프의 등장이 미 제국주의 위기의 산물이지만, 역설적으로 트럼프로 인해 위기 극복이 가능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다. 바로 그 중심에 미중 패권경쟁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는 반대로 맑스주의자들에게는 또 다른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지금이 혁명전야일 수도 있고 이행기일 수도 있다. 역시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불안정한 시진핑의 중국
그런데 이러한 미 제국주의의 위기와 함께 시진핑의 권력 기반이 불안정하다. 중국으로서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대국굴기’를 선언해서 세계의 패권국으로서 나아가는 입장이다. 문제는 대외 정책의 실패와 대내적으로 시진핑의 중국 인민들로부터의 지지와 동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시진핑 외교정책의 핵심인 ‘일대일로’는 사실상 실패한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일대일로는 주변외교를 강화하고 중국이 주도하는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에 중앙아시아와 아세안을 편입시킴으로서 ‘중국 중심의 경제질서’를 구축하며, 나아가 아시아 신안보론에 입각하여 ‘아시아주도 안보질서’를 구축해서 미국에 맞대응하는 중국의 전략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국의 전략에 대해서 주변 국가들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중국의 약탈적 투자로 인해 무역분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국내 정치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다. 시진핑은 2017년 10월 19차 당 대회를 통해 당내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한 데 이어, 2018년 양회를 통해 권력 공고화와 친정체제 구축을 순조롭게 진행하였다. 시진핑은 집권 2기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의지와 정책을 더 강력하게 추진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 인민들이 시진핑 정책에 만족도가 높은 것은 아니다. 우선 부동산 가격 억제에 실패했고, 실질소득보다 물가 상승이 더 빠게 이어지고 있으며, 반부패 정책도 실물경제에는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시진핑이 국내 경제문제에 총력을 기울였음에도 실패하게 되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시진핑의 몫이다.
따라서 미중 무역전쟁이 어떻게 될지는 불확실성이 여전히 크다. 중국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향후 방향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은 최근 정치국 회의에서 “변증법적으로 국제환경 볼 것”을 강조했다. 현재 중국이 직면한 가장 큰 국제환경은 미중 무역전쟁인데, 그것을 ‘변증법’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시진핑이 미중 무역전쟁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여서 중국이 더 강해지는 기회로 삼자고 독려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시진핑은 “싸움에 능해야만 전쟁을 막을 수 있고, 전쟁 태세를 갖추어야만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장기전에 대비하는 발언으로 읽힌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소위 ‘미국을 제외한 글로벌화’(非美全球化, globalization without America) 전략이다. 말 그대로 미국을 빼고 지구화를 계속 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를 중국의 ‘아군’으로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중국은 나머지를 한중일 3국, 동남아지역, 그리고 유럽 지역으로 구획한다. 중국은 이렇게 세계를 3개의 ‘전선’으로 나누어 이 지역의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하려 할 것이다.(이성현, “미중 무역전쟁 ‘장기전’을 준비하는 중국.” 『정세와 정책』, 2018-24호. 2018.12.19.)
2019년은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손문이 중화민국을 세운 신해혁명 100주년이자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한 70주년이기도 하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수교를 맺은 북한, 러시아와도 수교 70주년일 뿐 아니라 미국과도 수교 40주년을 맞았다. 중국으로서는 미국과의 무역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돼야만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에서 누가 승리하고 패배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미중 양 제국주의 사이에서 요동치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암담하기만 하다. 남한의 좌파들에게는 미중 제국주의 국가와의 투쟁뿐만 아니라 국내 자본가-정치권력과의 투쟁이라는 이중적인 투쟁 전선에 놓여 있다. 따라서 한반도와 동북아 문제는 노동자 민중의 힘에 의해 규정력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