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11일-12일 한진중공업가는 희망버스를 탔다.
희망은 발로 배우고
역사는 길위에서 써야한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하지만
발을 떼고 길을 걷기까지는
멈칫멈칫하고 쭈빗쭈빗하기를
되풀이한다.
30년이 넘게
늘
이러니
배움이 늦다.
희망은 발로 배우고
역사는 길위에서 써야한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하지만
발을 떼고 길을 걷기까지는
멈칫멈칫하고 쭈빗쭈빗하기를
되풀이한다.
30년이 넘게
늘
이러니
배움이 늦다.
콘테이너 박스로 용접한 한진중공업 정문을 지났다.
우리편 방송차량이
"부산 동지들은 차도에 자리잡고
희망의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은 인도 쪽으로 옮겨주시기 바랍니다"하며
지역을 '분열'시켰다.
작전이었다.
담장너머로 사다리들이 미끄럼타듯 흘러내리고
"빨리 조심해서 넘으세요"하는 외침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경찰이 몰려드는 긴반한 순간
재빠르게 뒷 일을 계산하며
연행될지도 모르는 월담을 선택했다.
35미터 꼭대기 85호 크레인에서 김진숙 동지가
아래를 내려보며 손을 흔들면
'나를 보았구나' 가슴이 두근거렸고
"와주셔서 고맙습니다다"하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인사들 을들 때는
희망을 싣고 온 듯 뿌듯했다.
사회를 보는 송경동 시인이,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의 이창근 실장이,
얼겁결에 마이크 잡았던 나까지도
"우리가 비록 1박 2일 버스여행을 마치고 떠나도
필요하면 다시 달려올 수 있겠지요?"하고 목소리 높여 물었지만
나는
큰 목소리로 '투쟁'하며 대답하지 못했다.
사정이 있으면 못 올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주고받는 작별인사도 못 나눈 채
조금먼저 떠나오면서
다만
지금 못 오면 두고두고 미안할까봐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않으려고
지금여기를 외면하며 그때거기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아
나를 위해
희망의 버스를 탔을 뿐인데
두고 온 희망보다
챙겨가는 희망이 더 큰 것 같아
미안했다.
다시
희망의 버스가 마련된다면
타야지
별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