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꼬빌동지 >
11월 5일 방글라데시 꼬빌 동지가 연행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한국정부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탄압과 단속이 강화되면서 이주노동자라는 신분으로 직장을 찾기 어려워 오토바이 배달을 하던 중 연행 된 것입니다. 참,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가슴이 뭉클하네요.
이주노동자 꼬빌이 아닌, 사람 꼬빌은 '누군가가 하겠지'가 아닌 '나부터 시작해야 된다'라는 생각을 가진 동지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진지하면서도 장난꾸러기였던 웃음이 많은 동지였습니다. 투쟁의 현장에서는 항상 투사로 제일 앞장서 있던 동지.
명동성당 이주농성단에 함께 했던 동지들 뿐 아니라 모든 연대동지들을 배부르게 해줬던 동지였습니다. 아마 많은 연대동지들이 이 동지가 만든 음식을 자주 드셔보았을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만약 이 동지가 없었다면 명동성당 이주농성단에 있는 동지들이 끼니를 어떻게 챙겼을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도 그 추운 날 꼬빌 동지가 얼음물을 녹여가면서 밥을 했던 기억, 농성장 발전기가 꺼질까봐 지키면서 기름을 붓고 밤을 새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열악한 생활에서 총무 일과 농성단의 사소한 부분까지 세세하게 신경 쓰며 외로운 투쟁을 이끄는데 아주 큰 역할을 했던 동지입니다. 이 동지가 연행이 되었습니다.
당시 농성단의 간부동지들처럼 얼굴이 알려지거나, 언론에 나오지 않았지만 이주농성장에 그리고 서울경인이주노조의 안 보이는 곳에서 정말 간부동지들 못지않은 아주 큰 역할들을 해 왔습니다. 제 말의 핵심은 어느 투쟁사업장이던, 어느 조직이던 그 곳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동지들이 있기에 지금의 서울경인이주노동자조합이 건설될 수 있었다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가 이 글을 올리면서도 마음이 울컥합니다. 왜냐하면 389일 동안의 그 날들을 기억하고 있는, 한국정부에 분노하고 있는 저 역시 이주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동물처럼 사냥꾼한테 사냥을 당하면서 살아야 되는 처지가 저를 울컥하게 만듭니다.
동물도 사냥꾼한테 함부로 사냥 당할 수 없는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가 동물 아니 그 이하의 취급을 받게 하는 법이기에 단속과정에서 건물 아래로 뛰어내리고, 달려오는 지하철을 향해 철로로 뛰어내리고, 보호소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목을 메고, 이주노동자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했던 한국정부. 노동이 필요해서 불러들였고 지금은 경제가 어렵다, 이주노동자가 너무 많다면서 불법으로 몰아세우고 강제추방과 토끼몰이식 마녀사냥에 동물이하의 취급을 하는 한국정부. 언제나 가진 자들과 자본, 시장의 논리에 착취당하고 억울하게 죽어가는 것은 이주노동자 뿐만 아니라 한국의 노동자와 빈민, 서민을 비롯한 이 땅의 민중인 것 같습니다. 과연, 이 죽음들을 향후 누가 책임질 것인지 한국 정부는 분명하게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노동자나 이주노동자나 똑같은 것 같은데 그것은, 누군가가 열사가 된 후 누군가가 연행이 된 후 그때서야 만이 동지의 소중함을 느끼고 또 글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연행된 동지에게 지금 이 순간 너무나 죄송스럽고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이런 동지들을 잃기 전에 우리 하나하나가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고 한 번 더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내 옆의 동지와 함께 웃고 울며, 힘차고 가열차게 살아가는 모습이 중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감히 듭니다.
방글라데시 꼬빌 동지. 명동농성장 이주노동자농성단 주방장이었던 동지. 이 동지가 지금은 목동 출입국관리소에 있습니다. 언제 자신의 나라로 추방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추방 후에 한국에서 몇 년간 만들었던 추억, 좋은 사람들과 만들어진 ‘정’, 투쟁현장에서 만났던 수많은 동지들. 뜨거운 마음을 나누었던 동지들과 친구들. 그리고 이 모두를 버리고 어쩔 수 없이 잊고 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주노동자의 처지.
ㅠ^ㅠ 할 말은 많은데 애타는 마음에, 안타까운 마음에 글을 잇기가 조금 힘이 드네요. 죄송합니다.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을 희망하면서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모든 노동자가 단결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