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 리베라 호텔 노동조합 위장폐업 619일 투쟁이야기

  • 교육센터 이야기마당
  • 글쓴이:
  • 2006-12-01

< 김진순의 현장이야기 >

현장이야기를 한다고 공간은 거창하게 만들어 놓고 이제야 글을 올립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제가 글 쓰는 것을 싫어하기도 하고 못쓰기도 하고…….
그런데 왜 이름까지 걸고 현장이야기를 하느냐 ? 라고 질문을 하실 겁니다.
노동운동이 어렵고 힘든 상황입니다. 여기저기서 어렵고 힘들게 투쟁하는 현장이 많이 있지만 잘 알려지지도 않고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 묻혀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활동, 투쟁에 필요한 여러 노조의 투쟁, 활동 사례를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현장이야기"에서는 전국 현장의 이런저런 사례를 싣고자 합니다. 이름을 건 이유는 나를 강제하고자 함입니다. (바쁘다고, 글쓰기 싫다는 핑계로 안 할까 봐…… 그래도 잘 안 되는군요. 반성)
우리 운동, 활동에 도움이 되는 현장이야기를 현장 탐방을 통해 인터뷰 한 내용을 부정기적으로 정리해서 "현장이야기"공간을 채워나가려 합니다. 현장 활동에 부족하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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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야기]

유성 리베라 호텔 노동조합 위장폐업 619일 투쟁이야기

인터뷰 :박홍규 위원장 (유성리베라호텔노조 위원장)
내용정리 : 김진순

김진순 : 호텔 측의 위장폐업에 맞서 619일 동안 투쟁을 해서 회사를 정상 운영하게 되기까지 많은 고생을 하셨을 텐데 그 긴 세월을 어떻게 투쟁하였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참 위장폐업 반대 투쟁 전에도 투쟁을 오래 한 걸로 알고 있는데 도대체 얼마 동안 투쟁을 하신건지요.

박홍규 : 127일 구조조정 반대 투쟁을 하고 그 뒤에 사측에서 폐업을 한다고 해서 위장 폐업 반대 투쟁을 619일 동안 한 겁니다. 그러니까 총 746일 파업을 했다고 봐야지요.

김 : 127일 투쟁과 619일 위장폐업 반대투쟁이 어떻게 연결되고 전개되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박: 127일 투쟁이 정리되고 회사측이 다시 6개월 만에 도발한 겁니다.
김 : 127일 투쟁으로 힘들고 지쳤을 텐데 어떻게 투쟁이 가능 하셨는지요.
박 : 127일 이 투쟁의 힘이 619일을 겪어내게 했다고 생각해요. 127일 투쟁은 구조조정의 문제였고, 노조약화, 노동조합 불인정이 내용이었는데요. 기본적으로 박순석(리베라호텔 회장), 신한자본이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부분과 함께 직원들을 굉장히 무시하고, 종속을 강요하는 자본이에요. 천민자본이죠. 이런 짓을 2000년 12월말 신한자본의 인수과정부터 시작해서 2001년도 8일간 파업투쟁을 겪으면서 조합원들이 다 본거에요. 박순석의 무식함, 신한자본의 횡포, 직원무시 이런 것들을 봐 오면서 어쨌든 조합원들 개개인이 의식화되어 있거나, 활동가들은 없었지만, 노조를 믿는 힘들이 기본적으로 있었어요. 한국노총 시절에도 96,97 노개투 때 2일을 파업할 정도로 싹 나갔거든요.
호텔이 88년도에 오픈했는데, 오픈하고 한 번도 안 쉬었죠. 우리는 휴무일이 없거든요. 근데 2001년도 8일 파업을 했는데 너무 좋았다는 거죠. "야 우리도 파업할 수 있다", 노개투때는 약 40명 정도 남겨놓고 갔는데, 전부 나오니까. "야 대단하다", 그리고 바로 승리를 했어요. 우리 노조의 강점은 97년경부터 비정규직 후배들이 들어오면 계속해서 정규직 시켜왔다는 거예요. 그 정규직된 조합원들이 지금 투쟁과정에서도 주축으로 활동했어요.

2003년도에 127일 파업은 그때 당시 커피숍, 남녀대중탕, 주방까지 포함해서 30-40명의 인원이 일하는 곳을 업장 폐쇄를 하겠다는 것이었어요. 결정적으로 신한자본이 회사가 실수한 것이, 중노위 조정안을 노조는 받았는데 회사는 거부했고. 노조를 어떻게 한번 해보려고 했던 거 에요.
우린 끈끈한 인간적 관계, 노동조합으로 모이는 힘, 이런 것들이 폭발해 버리면서 "박자!" 8월 3일 1시 부로. "업장폐쇄 취하하지 않으면 우리는 파업 하겠다"라고 해서 시작한 겁니다. 127일이 상당히 길었지만, 이탈자가 2명뿐이었죠.

2003년 11월 27일 찬반투표 하고, 합의서 썼지만 현장 복귀하기 전에 "우리한테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해 1주일인가를 우리 시간을 가졌어요. 전체조합원이 1박2일 속리산 유스호스텔 들어가서 "박순석 사측이 또 도발할거다", "현장투쟁을 어떻게 할 거냐"에 대해서 정리를 하고 온 거예요."
이렇게 정리를 하고 왔는데, 들어오자마자 사측이 합의서를 준수하지 않고, 계속 노조를 탄압하는 거죠. 초기에는 움츠리고 방어만 했어요. 노동청에 법적 대응으로 진정만 하는 와중인데. 사측은 아예 파업하라고 노조 전임자 전원 해고시키고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노동조합 간부들을 한 업장으로 싹 몰아놓고, 감시카메라를 조합사무실 앞 엘리베이터에 설치하고 전임체크를 계속하고 CCTV를 대거 달아놓고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어요. 우리는 127일, 따지면 4개월을 무노동 무임금의 후유증으로 인해서 (옛날 같으면 바로 파업을 했겠지만) 파업을 안 했어요.

김 : 투쟁 시 조직 편재는 어떻게 하셨나요?
박 : 내부적으로 2003년 투쟁 조가 있었어요. 1-9조까지. 4조는 빼고, 4조는 재수 없는 의미라서, 9조까지와 사수 대. 이렇게 이 조가 투쟁할 당시의 조였는데, 복귀 이후에도 가동이 되었어요. 지금까지도 가동되는 투쟁 조예요. 장점은 호텔이니까 굉장히 많은 업종이 있어요. 요리사, 웨이터, 웨이트리스, 소위 보이, 배기, 버스기사, 자가용 기사 등 이런 사람들을 골고루 분포시켜 조를 만들었죠. 많게는 20, 적으면 15에서 12명으로 조가 되어 마지막까지 온 거예요. 파업 이후에도 조원들끼리 단합대회도 하고, 조합비가 거의 바닥났지만 조직비용으로 계속 쓴 겁니다. 저는 조들끼리 단합대회 할 때마다 가고, 그래서 조직관리가 계속되고, 스스로 유지되어 온 거죠. 이러니까 안 깨지죠.

김 : 폐업 발표는 언제 했나요?
박 : 박순석 회장이 최종적으로 , 21억 7천만 원 적자를 이유로 폐업을 결정한 거죠.(파업기간을 포함하니 적자니까) 조합원을 모아놓고 경영상 적자를 이유로 7월말일부로 폐업한다고 발표를 해버렸어요. 그래서 회사 총지배인 놈이 가고 나서 제가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위장폐업이다. 우리는 바로 투쟁체제로 전환할 거고 우리는 투쟁할 꺼다. 너무 혼란스러워 하지 말자"라고 하면서 간부들을 결집시켰죠. 그리고 김예준 동지한테 교육받기 시작했어요.
사측이 6월 20일 발표하고, 폐업 전까지 조합원들을 분열시키기 위해서 업장을 14층중 어느 한 곳을 닫으면 갈 곳이 없으니까 밖으로 나오고, 또 닫고. 그러니까 7월 10일까지 약 20일 동안 "한곳씩 노조를 포기하면 다시 문을 열겠다. 그리고 회장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문을 연다."라는 이야기가 계속되었어요. 후일담을 들었는데 박순석과 회사 실무자들끼리 "3-6개월이면 노조가 깨질 것이다." 라고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사측은 노동조합을 없애고, 노사협의위원회로 전환하자는 것이었어요.
우리는 7월 30일에 업장을 하나하나 문 닫으면서 나오는 조합원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투쟁을 출발시킨 거죠. 투쟁의 대오가 8월 10일, 약20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 투쟁동력이 된 거죠. 그리고 사측이 노동조합 파괴를 위해서 위장 폐업한다고 생각한 놈들이 그 직전 4, 5월에 아르바이트생을 대거 고용했어요. 6월 20일 발표하기 전에, 그러니까 4월 5월 약30명 정도 시간급 아르바이트를 대거 고용했어요. 이 친구들까지 졸지에 다 나가게 된 거죠. 그래서 그 친구들까지 끌어안았어요. 그게 174명이었어요. 174명이 7월 말일에 싹 나온 거예요. 근데 이 아르바이트하는 친구들은 직장에 별 애착이 없더군요, 불과 몇 일만에 20여명이 쑥 빠져나갔고, 그래서 148명 조합원 정예들 만 남았고. 그래서 이 동지들이 이제부터 투쟁을 돌입하게 된 겁니다.

우리가 투쟁 중에 가장 열심히 한 것은 연대 투쟁이었어요.
지역의 연대대오가 우리한테 많이 왔지만, 우리도 다른 투쟁 사업장에 연대를 엄청나게 많이 다녔어요. 대전 시민한테 지역경제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선전전을 하고 다녔어요. 8월 23일날 부위원장 2명과 저하고 회장비서실장을 시켜서 회장 면담하게 해 달라, 우리 지쳤다고 해서 면담 약속을 받았죠. 그래서 이건 녹음을 해라, 그러면 꼬리가 잡힌다. 녹음기도 하나가 꺼질까봐 2개를 가지고 갔죠. 부위원장 둘하고, 저하고 3명이 가서 박순석이 얘기 하는걸 다 녹취했어요. 계획적으로. 그 녹취를 가지고 국정감사로 끌어냈어요. 하여튼 이 리베라호텔 노조가 127일 파업하고, 곧이어 위장폐업 투쟁을 하니 상당히 많이 알려졌었어요. 그 전에 지노위에서 승소했고, 국정감사에서 박순석을 구속시킬 것이냐, 모독죄로 할 거냐…… 결국엔 표결로 무산시켜 버리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서 힘이 좀 빠졌어요. 그때가 2004년 11월 9일이에요.

김 : 그 긴 기간의 투쟁에 조합원들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나요.
박 : 이젠 생계투쟁이다. 겨울 동절기로 접어들면서 실업급여가 종료되었어요. 그러면서 내부 간부들의 토론에서 폐업투쟁이 단기싸움이 아니고 장기투쟁이라는 결론이 나왔고, 실업급여가 얼마 안 되는 동지들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우리가 규정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주 1회 그 투쟁에 결합한다. 그리고 이 투쟁에 결합하지 않을 때 3만원이다 .이렇게 규정을 했어요. 그리고 생계 벌이 중에 7만원을 내고, 철야는 무조건 나온다. 만약 안 나오면 1만원을 낸다. 뭐 이렇게 수일간 토론을 해서 규정을 정했어요. 실업급여 끝나고 1,2달은 생계투쟁을 안 나가더니 05년 1월이 되니까 1,2 명씩 나가더군요.
생계투쟁을 많이 나간 때가 6개월이 지나서부터죠. 실업급여가 종료되는 시점이라, 돈 나올 구멍이 없으니까. 동의서를 자필로 쓰고 생계투쟁에 나간 거죠. 이러다가 싹 나가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그전부터 대리운전을 간혹 가면서 하기 시작했거든요. 대리운전 할 20여명을 모았어요. 대부분 투쟁하는 동지들을 대리로 모이도록 했어요. 이 친구들은 대리가 많게는 4만 원쯤 가져갈 수 있고, 집에는 못 들어가도… 이렇게 하니까 3, 4월까지 동력이 60-70명 유지되었어요. 나머지 반수는 생계투쟁으로 거의 전환이 되더군요. 지역에서 구정 때 판매해서 들어오는 돈, 생계 7만원 뭐 이렇게 들어왔고요. 출근투쟁 동력이 대리운전자들과 남편이 버는 여성동력들이 되더군요. 집안에서 한쪽이 벌어 생계가 갖춰지는 동지들이 온 거죠. 출근 투쟁하는 동지들이 차비라도 받을 수 있게 토론을 붙였어요. 그래서 교통비를 출투 동지들한테 지급했죠. 그래도 끝날 기미는 없고, 중노위는 늘어지고. 그래서 투쟁일수를 줄이자, 그래서 주5일을 했어요. 그래도 안 되겠다 싶어 투쟁일수를 줄이자 라고 해서, 4월경에 토론을 해서 3일로 줄이고, 나머지는 생계를 하기로 했어요.
철야는 마지막까지 갔고요, 조별철야는 문 한 번도 안 닫았죠. 아쉬워서 타결 후에도 조별철야는 지속했어요.
집이 되어버려서…… 주3일 투쟁하고, 이렇게 투쟁동력이 떨어지면서 그러면 어떻게 하나라는 동력고민을 하는데 철야는 어머 어마하게 오니까. 이 앞의 순대집이 저희 때문에 장사가 됐죠. 연대동지들이 끊임없이 오고, 구정 때 연대동지들이 엄청나게 양말, 김 등을 팔아줘서 1억4천인가 돈은 좀 됐어요. 그래서 순수익이 4-5천이 됐고, 투쟁이 어찌될지 몰라서 돈을 계속 가지고 있었죠.
김 : 투쟁과정에서 모든 사안은 조합원 토론을 통해서 결정하신 거 같은데요.
박: 우리 투쟁을 돌아보면 간부나 지도부가 결정해서 내리꽂은 게 아니라 조합원 토론을 계속 했어요, 밥은 어떻게 하고, 이 투쟁은 어떻게 결합하고, 생계투쟁 결정, 생계투쟁 규정 등 ……. 조별 토론이 끝나면 대자보로 붙이고……. 시간도 많고 또 모든 것을 조합원이 직접 토론을 통해서 결정하게 했어요.
김: 계속 투쟁과정을 얘기해 주시지요.
박 : 1인 시위는 다 배치했어요. 청와대, 국회, 노사정위원회, 그리고 신한 박순석 집 앞에, 6군데 정도를 대거 보냈어요. 올라가면 2박 3일, 3박 4일 보내고, 그런 투쟁은 끊임없이 중간 중간 배치됐고, 투쟁을 안 하면 조합원들이 불안 해 하더군요. 지금도 "야 너네 무슨 투쟁했냐?"그렇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뭐 뾰족한 투쟁은 없었어요. 중앙노동위 그때 전경하고 싸운 거 그 정도.
하지만 연대가서 많은 투쟁 방법을 배웠어요. 쇠파이프 등. 우리는 억울한 게 있어서, 거의 집회 가서 크게 싸우는 거는 거의 우리 동력이 많았거든요. 특히 하이닉스 노조와 연대, 왕래가 좋아서 버스 타고 오가고. 돈 남은 것도 다 갔다 주고. 그때 같이 한 곳이 하니닉스, KCC, 코오롱 3곳. 금강화섬도 끈끈했죠.
100일 문화제, 300일, 500일 문화제를 크게 3번을 했어요. 문화제를 할 때마다 투쟁기금이 모아지고, 연대단위 다니고, 1인 시위하고 끊임없이 조직을 챙기고 투쟁들을 했어요.

2005년 여름이 되면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는데, 중노위 결과가 3-4월이면 가시화 될 거라고 했는데, 계속 늘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끈질기게 투쟁한다는 건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민주노총 중앙도 중노위 위원장과 실무진을 만나면서 압박을…….민주노총 한국노총이 모두 공익위원을 사퇴한 시점이라, 때도 적절했다. 중노위 판결이 언제였더라? 8월 23일 그러니까 그 전까지 힘이 쫙 빠진 상태였어요. 그 결정 2주전인가…….날아 온 거예요. 승소하면서 상황이 딱 올라갔다. 지노위 보다는 더 강하게 되었어요. 지역적인, 도덕적인 문제까지 가미돼서, 힘을 딱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잘 안되더군요.…….
그게 힘이 많이 빠졌다. 허탈하고, 허무했다. 국정감사가 (2004년)11월 3일인가, 11월초인데……힘이 쫙 빠졌고, 겨울이 됐다.

그전에 대리운전에 동력을 모았고, 여름 내내 포장마차를 했다. 05년 여름에 포장마차를 한 거죠. 그것도 2조 조장이 말뚝 박고, 끝까지 했죠. 국정감사 이후 힘이 빠지고, 그 속에서 투쟁방향을 잡은 것이 극단으로 가는 것이었다. 신한 본사 점거와 그 당시 사수대장과 내가 한강대교를 탄다는 것이었다. 시간과 날짜를 정하고, 사무장은 벨트가방 신발 로프까지 준비했는데…….
갑자기 사건이 서울 경찰청 비정규직 노동조합 동지들이 먼저 올라가 버렸어요.
연달아 우리가 하면 약발이 떨어지니까…….시간을 미루고 있었고. 신한본사를 점거하기로 한 전술도, 실행을 위해 가보기도 하고 했는데. 12월인가 하여튼 교섭을 하기 시작했고, 국정감사 이후에 이목희 의원이 나도 부르고, 총괄사장이라는 자도 불러서 교섭을 붙인 겁니다. 우리가 조사 요구한 것 때문에 박순석이 또 검찰조사를 받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교섭이 시작됐고, 총괄사장이라는 자는 여러 번 불려와서 검찰조사를 받았어요.
그전까지 교섭이 한 번도 없었는데 12월부터 시작하여 본격적으로는 1월부터 교섭이 이루어졌다. 실질적인 교섭이 된 거다. 1월15일까지 교섭을 통해 합의하도록 행정법원의 판결이 미뤄지고. 우리도 지면 거의 끝나 가는 판이었는데, 어쨌든 소수가 남아서……. 그때 그래도 출근하면 조합원 30-40명은 충분히 나왔었어요.

김 : 출근투쟁은 하고, 나머지 동지들은 생계투쟁을 하고 있던 것이고…….그럼 떨어져 나간 사람은 얼마나 되나요?
박 : 떨어져 나간 사람은……한 20-30명 정도 되겠다. 근데 떨어져 나갔다는 것도 그때 당시에는 떨어져 나갔다고 볼 수 없었어요. 마지막에 회사측과 합의를 하고 복귀를 하는 시점에서, 복귀의사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이때 정확히 "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저는 복귀를 못합니다."라고 해서 이때 정확히 파악이 된 거예요. 그때까지는 생계투쟁이었어요.
그래서 막후에 회사도 부담이 중노위 판정이 났고, 행정법원에서 법의 잣대를 들이밀면 얘들도 승소한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때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한 거였거든요. 고등법원, 대법원까지 가겠지만, 이거 하나를 날릴 정도로 상당히 큰 금액이 되는 거였어요. 그때 당시 50-60억의 인건비고, 우리가 36억 원 가압류를 잡아놓은 상태니까. 회사가 상당한 부담을 갖은 거죠. 노조도 여기서 합의해서 중단되지 않으면 누구한테 돈을 줄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았었어요. "남아서 투쟁하는 사람은 뭐냐" 라는 논란과 논의가 있었거든요. 갈등이라기보다는. 대법까지 간다는 전제가 생기기 때문에 그럼 2-3년 동안 누가 남아서 투쟁할 것이냐는 질문이 나오는 거였어요. 끝까지 투쟁하자는 20-30명은 있었지만, 저와 사무장을 포함해서 간부와 조장위주로 남아있었는데…….그때부터 전체 회의를 했습니다. 사람이 조금이라서 전체회의를 했고, 한 건 결정할 때도 50명이 와도 전체회의를 해서 같이 고민하고, 금전적인 것도 내놓고 다같이 결정하고, 이번에 줄 돈이 얼마고 이런 것도 다 벌려놓고 했어요. 이렇게 해도 끝까지 투쟁하자는 견해가 있었고, 투쟁이 대법까지 가면 끝나는 거 아니냐. 불투명한 거 아니냐. 이렇게 여러 의견이 나왔었어요.

박순식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회사는 돈 문제에서 신변문제로 초점을 바꾼 거예요. 이참에 돈 안주고, 오픈 하겠다는 식으로 나오게 된 거죠. 우리는 안 된다. 돈으로 그만 끝내 이렇게 고집을 하다가, 교섭 끝내고 돌아와서 털어놓고 얘기하다보면, 마지막까지 남은 30-40명의 동지들, 투쟁의 주동력인 동지들은 대부분이 우리 터전을 되찾아야 한다는 견해였어요. 우리 목표가 그것이기 때문에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게 확인되었어요. 그러면서 교섭이 약해지기 시작하더군요. 처음엔 천만 원 이하는 절대 안 된다는 고집이었고, 그러면 회사는 돈 주고는 안 한다. 이렇게 계속 배치가 되면서 마지막에 결과는 3백으로 타결을 보면서, 합의서를 작성을 하였습니다.

사무장하고 저하고 교섭위원이었는데…… 당했다. 교섭을 2년 간 안 해보니까 감각이 떨 어 지데요. 오픈한다, 원상회복한다. 승계한다. 이 정도로 생각하고 언제까지 들어간다. 이런 거…… 법정용어를 세세하게 검토를 안 하고 합의서를 썼는데…… 복귀는 좋다. 지금 생계하고 있는 조합원들한테는 공사 뭐 한달 전에 회사가 요청하면 들어오게 하겠다. 그러나 생계를 안 하는 사람들은 회사로 바로 복귀하겠다. 기본급을 줘라 이랬는데…… 이 새끼들 뭐 법적으로 공사 개월을 5개월 이전으로 하며 이래야 하는데, 그걸 교섭을 그렇게 오래했던 저도 "노력"이라고 넣은 거예요…… 그 결과가 4월 20일 복귀하면서 개장할 때까지 괴로운 것이었어요.

김 : 투쟁할 때 조합원들과 함께 하면서 모두의 마음을 찡하게 했던 건 뭐였는지요?
사무장 : (쭉 함께 들고 있다가) 감방 간다는 그 날 아침에 위원장님이 전화 통화하는 걸 들었을 때예요.
박 : 우리 집 사람이…… 제가 생계를 나갈 수가 없잖아요. 대리운전을 해보려고, 2번인가 해봤는데 몇몇 조합원들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울기 직전 목소리로. “위원장이 그러면 힘든 거니까…… 이건 안 된다 우리가 다 6만원씩 교통비를 못 가져가도, 위원장이 대리운전 못하게……” 그것 때문에 정말 못 하겠더군요. 조합원들이 그 얘기를 하는데…… 못하겠더라고. 우리 집사람이 벌어야 하는데…… 2003년 파업해야 할 것 같다고 하니 집사람이 바로 취업을 한 거예요. 아이 둘을 맡기고. 지금 9살 7살이니까 그때는 어렸죠. 이 두 아이를 파업 때는 시간이 많으니까, 우리 집사람이 출근을 하면 철야를 마치고, 가서 애들 밥 먹이고 씻겨서 보내야 하는데…… 감방 간다고 생각하니까 이걸 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김예준 동지는 "6개월은 최소 생각해야 돼!" 라고 말하고 6개월 갈 생각도 했는데…… 그게 국정감사 목전이었는데 증인으로 발표되고, 구속될 상황에 처했는데…… 내가 감방에 가야 박순석이 간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추스르는데…… 마누라한테 전화를 아침에 마지막 전화를 해야 하는데…… 20분을 엉엉 울었어요. 난 사무장이 온 지도 몰랐는데 빵에 간다고 일찍 왔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얘기하는 것 같다.

박 : 저는 가장 기억에 남는 게 투쟁이다. 하이닉스에 버스 한차로 연대를 갔는데, 주유소 습격사건? 우리는 한을 풀 때가 없어서 여성동지들은 버스에 태워서 기다리라고 하고. 모두 14-15명인데 8-9명은 다 쇠파이프를 잡고 있더라고요. 전부 남자들이 쇠파이프 잡고 있으니까.…… 선봉에서 싸우는 …… 정말 재밌기도 하고. 이게 해방구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풀리던지. 진짜 좋더군요. 3-4시간 정도 …….

김 : 투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생계투쟁을 갔다가 돌아오고, 버티고 남아 있을 텐데 확신이 있었나요?
박 : 어딘가와 인터뷰를 하는데, 그 얘기를 물어봐서. 있지도 않은 거짓말도 못하는데…… 매일 마이크를 잡으면서 확신을 주는 게 제일 힘들었다. 허황된 희망을 간혹 심어줘야 할 때 힘들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확신이 있었어요. 끝까지 간다는 거였어요. 우리나라 돈 있는 놈들, 정치가들 상류라고 하는 놈들의 내부를 보니까. 거기서도 박순석 평가가 거의 0점이고, 진짜 나쁜 놈으로 소문이 나 있었으니까요.

▶ 길게 746일 짧게 619일의 투쟁, 2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용을 다 담을 수가 없어서 줄여 '현장이야기'에 올립니다.
리베라호텔 노동조합 619일 위장폐업반대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낸 동지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그들의 끈질긴 투쟁은 모든 노동자들의 투쟁에 희망의 불꽃을 비춰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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