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2012,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윤호숙(노동자교육센터 운영위원)
올해는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 박근혜, 문재인이 엎치락 뒷치락하며 정치흥행을 요란스레 이어가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번드르르한 말잔치 속에 ‘노동자’ ‘빈민’ ‘민중’이라는 주체는 빠져있는 정치와 경제, 민주주의의 풍경들…….
민주주의의 기본은 노동자민중의 밥
문득 예전의 기억 한토막이 떠오른다. 심장이 쉴 새 없이 쿵쾅거리던 그 날, 그 두 시간.
내 인생의 첫 대중연설을 앞 둔 두 시간. 그러고 보니 그것이 첫 정치연설이기도 했다. 주제가 바로 ‘민주주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내 나이 방년 21세, 첫 대중연설을 앞둔 솜털 보숭보숭한 애송이는 설렘이 아니라 속칭 ‘멘붕’ 상태에 빠져 있었다. 애송이이기도 했지만, 처음이기도 했지만, 실은 그 날 예정되어있던 연설자에게 문제가 생겨 그야말로 두 세 시간 남겨두고 투입된 대타(!)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 날따라 나 말고는 아무도 대신 할 사람이 없어서! 정말이지 으아아아악~ 그러나 도망을 갈 수도 없었다. 하필이면 그날의 집회는 민주화투쟁에 동참하기 위한 ‘동맹휴업’ 결정의 사실상 키를 쥐고 있던, 가장 신중하고 가장 보수적인 집단, 복학생선배들이 각 운동그룹을 초청한 중차대한 연설회였던 것이다. “난, 못해! 못해! 못한다고~” 절로 비명이 나왔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줄행랑을 치고 싶은 유혹과 싸우며, 부동의 자세로 하얀 백지를 앞에 놓고 앉았던, 그 날 그 두 시간이 아마도 내 생애 최초로, 가장 집중적으로, 가장 절실한 마음으로 ‘민주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한 시간이지 않았나 싶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애송이가 무엇을 말할 수 있었을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나의 진솔한 생각을 말하는 것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나는 왜 부모의 기대도 버리고, 꿈도 접고, 민주화투쟁에 나섰던가?’ 그 때 하얀 백지위로 떠오른 것은 내가 만났던 80년대 중반 고단했던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 누이와 동생들의 모습이었다. 뼈 빠지게 일해도 전세방은커녕 지하셋방을 전전해야 하고, 타이밍 약을 삼켜가며 밥 먹듯이 철야를 버텨야 하고, 졸린 눈을 비비며 허옇게 뜬 얼굴로 야학에 나와 코피를 쏟고, 동생의 학비를 대느라 몸을 팔아야 하고, 꿈이 뭐냐 물었더니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찌감치 돈 벌러 가겠노라며 온가족이 배불리 밥 한 끼 제대로 먹는 거, 그게 제 꿈이라고, 검은 눈을 반짝이던 전남 강진에서 만났던 초등6학년 졸업반 아이…….그 날 내가 했던 연설의 요지는 ‘나는 왜 민주화투쟁에 나섰는가? 민주주의가 바로 우리들의 밥이고 집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 누이와 동생들의 밥과 옷과 집을 위해 함께 민주화투쟁에 나서자.’가 되었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뀔 정도의 세월이 흘러, 고문실에 끌려가고 사형당하고 감옥에 갇힐 정도의 중죄였던 ‘민주화’ 요구는 이제는 너도나도, 심지어는 바로 그 민주화를 짓밟았던 핵심세력이 앞장서서 떠들어대는 주장이 되었다. 정치민주화니 경제민주화니…….이제 세상은 참 많이 민주화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내가 이후 즐겨 불렀던 노랫말처럼 ‘밥’과 ‘자유’와 ‘평등’과 ‘평화’는 우리의 것, 민중의 것이 되었는가? 민주화 투쟁이 곧 정치투쟁이었으니, 정치가 뭔지도 모르고 뛰어들었던 그 어린 나이에도 내가 깨달은 것은 바로 정치의 기본은 밥, 노동자민중의 밥에 있다는 것이었다. 허리가 부러져라 일하며 자본과 국가의 밥이 되어온 노동자민중이 제 스스로 지은 밥의 주인이 되기 위한 것, 그게 바로 민주주의요, 민주화투쟁의 핵심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과연 애송이의 단순한 생각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민주주의란 인민의 지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처음 나타났는데, 어원을 찾아보면 고대 그리스어의 데모스(Demos, 민중, 시민, 다수)와 크라티아(Kratia, 권력 또는 지배)의 합성어, 데모크라티아라고 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란, 역사적 기원과 어원에 의하면, 바로 ‘인민의 지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상상해보라. 지배계급에게 ‘민주주의(인민의 지배)’란 얼마나 무시무시한 생각이었을까? 역사는 이러한 의문을 사실로 입증해준다. 18세기 중엽까지도 지배계급은 ‘민주주의는 모든 문명적 가치를 파괴하는 야만인들의 위험한 이념’으로 몰아세웠고, 이것을 당연한 상식처럼 유포해 사람들의 인식을 지배했다. 자본주의 초기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유권자가 민주주의를 향유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자산가들로 구성된 유권자이며, 정부는 그들의 선택에 따르면 된다.’며 인민-사유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사회에 이해관계가 없는 무책임한 것으로 간주하고 선거권 행사로부터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자본이 지배하는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인민들의 반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든 여성과 남성노동자, 농민의 선거권을 제한했다. 이 때문에 누구나 투표할 수 있는 보통선거권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핵심이 되었고, 모든 성인의 선거권은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앗아간 이후, 지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각 나라 인민들의 투쟁으로 쟁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민중이 목숨 걸고 쟁취한 1인1표의 보통선거권은 그대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게 다가 아니었던 것이다. 보통선거권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 이론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정치학은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이익집단 사이의 경쟁이 작동하는 방식’과 ‘헌법과 선거제도 사이의 비교’로 대체했다. 이들은 끊임없이 인민의 정치참여 능력을 폄하하고 불신을 조장하여, 인민의 정치활동을 선거기간에 표를 던지는 수동적 참여로 사실상 제한하도록 법 제도를 만들었다. ‘사장도 1표, 대통령도 1표, 노동자도 1표, 누구나 1표의 평등이 실현되었다. 투표하라. 당신들의 정치능력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당신들이 선출한 엘리트들에게 정치- 당신들의 운명을 맡겨라.’ 결국 ‘자유민주주의’는 보통선거권을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제도가 아니라 위임과 대리의 정치, 설득과 조작의 정치도구와 절차로 만들어버린 것이 아닌가?
자, 한번 생각해보자. 누구나 평등하게 한 표의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으니 이제 ‘민주화’ 된 것일까? 소위 1%의 자본이 지배하는 지금 이 사회에서 과연 무엇이 민주화되었다는 말일까? 통치권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 국민들이 정하면 그게 정치민주화인가? 어떤 이가 주장하듯이 경영권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 노동자들이 정하게 되면 그게 경제 민주화일까? ‘민주주의’는 누군가 좀 더 잘난 이에게 내 운명을 맡기는 절차 따위에 불과하단 말인가?
응답하라 2012
2012 한국 정치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은 저마다 앞다투어 이야기 한다.
‘제가 행복하게 만들어 드리겠다, 제가 나서서 싸우겠다, 제가 지켜드리겠다…….’ 누가 누구를 지키고, 누가 나의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단 말인가? 왕이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받들고 복종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나 자신이, 노동자 자신이, 민중 자신이 스스로를 지키고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싸우지 않는 한 민주주의도, 평등세상도, 노동해방의 그 날도 저 산 너머 무지개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스스로의 눈물을 닦기 위해, 스스로의 자존과 행복을 위해, 내 주먹, 내 발로 일어선다면, 그것이 바로 노동해방, 평등세상의 시작이다. 적어도 그렇게 일어선 이들, 딱 그만큼의 밥, 자유, 평등, 평화가 지금 여기에 존재할 뿐이다.
2012년 한국사회의 노동자들이여, 우리는 오늘 한국사회에서 펼쳐지는 정치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뱀발 ; 아참, 애송이의 연설결과가 궁금하다고? 아,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그 뒤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래도 그걸 잊을 수는 없지. 연설 이후로 한번 만나자는 남자들이 줄을 이었거든. 물론 집회며 시위 쫓아다니느라 만나지는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