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단의 부활과 ‘일베들’, 그리고 사회적 연대
임광순(고대 한국사학과 박사과정)
지난 9월 28일, 극우보수단체 ‘서북청년단 재건 준비위원회’가 서울광장에 나타났다. 이들은 “세월호 노란깃발 이제 지겹다”면서 세월호 분향소의 노란리본을 철거하려 하였다. 며칠 뒤 배성관 서북청년단 재건위 대표는 김구 암살이 의거라면서 자신들은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겠다고 하였다. 이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여러 언론보도를 통하여 ‘서북청년단’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배성관 대표가 박사모를 비롯한 여러 우익단체에 몸담았고, 서북청년단이 1945~1950년 해방 국면에서 백색테러를 자행한 극우단체였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사건으로부터 한 달이 지나고 서북청년단 재건 위는 다시 잠잠한 듯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의 활동은 9‧28 반짝 테러에 불과한 것일까? 기존에 있었던 극우보수단체들은 왜 굳이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을 끌고 왔을까? 이들은 나의 주변사람들과 전혀 상관없는 특이한 인간들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1940년대 서북청년단의 활동,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 웹사이트 이용자, 그리고 한국사회의 사회적 연대를 엮어 생각해봐야 한다.
김구 암살과 제주4‧3사건 학살의 주범으로 알려진 서북청년단은 언제 어떻게 활동했을까? 해방 직후 다양한 정치세력들은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향 속에서 각종 활동을 전개하였고, 산하기구로서 청년단체의 조직은 일반적이었다. 국가공권력이 미비한 상황에서 청년단체는 정치조직의 현실적인 힘으로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북청년회는 월남한 이북5도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1946년 8월, 이북 청년들의 반공우익단체였던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청년부, 북선청년회, 양호단, 평안청년회는 빠르게 통합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11월 서울 종로 YMCA대강당에서 대의원 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서북청년회를 공식적으로 결성하였다. 이후에도 월남한 청년들과 서울의 주먹 패를 규합하여 세력을 확장시켰고, 1947년 봄에는 충청, 전라, 경상도에만 57개 시‧군 지부를 결성하여 전국조직으로 발돋움하였다.
서북청년회가 이처럼 빠르게 조직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경제상황과 미군정, 남한 관료들의 지원 덕분이었다. 당시 남한의 경제는 물자부족과 생산력 감소, 높은 실업으로 매우 불안정하였다. 혼자 월남한 이북출신 청년들은 특히나 더 경제적으로 곤궁하였고, 몸과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공동체가 전무하였다. 여기에 미군정의 하지1)는 우익청년군의 조직에 큰 관심을 가졌고, 치안을 담당하였던 조병옥 경무부장과 장택상 수도 청장은 이들에게 돈과 물자를 지원하였다.
월남한 청년들의 서북청년회 가입은 극단적 선택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의 테러, 학살과 같은 활동과 별개로 말이다.
서북청년단을 낳았던 경제적 곤궁과 사회적 불안정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모습과 유사하다. 일베유저의 대부분은 불안정 노동을 하고 있는 젊은 남성들이라고 한다. 개인으로 존재하는 ‘일베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특정 지역, 여성,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노동조합, 진보정치세력 등에게 강렬한 혐오를 분출하면서 ‘일베’로 거듭 난다. 최근 몇 년간 일베의 패악 질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일부에서는 이들에게 낙인을 찍고 아주 특수한 경우로 한정지어 설명한다. 심지어 자신의 주변에 일베 유저가 없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베는 이미 월 10억 페이지뷰를 이미 돌파했고, 국내 웹사이트 순위에서 무려 42위를 차지한다. 일베는 더 이상 한국사회에서 ‘개인적 일탈’이 아니다.
다른 한편, 복지가 한국사회에서 화두가 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한국의 사회적 안전판, 사회적 연대가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복지제도마저 없으면 사회가 구성되기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무한경쟁에 둘러싸인 우리 삶을 되돌아보면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아이들에게 친구는 협력의 대상이라기보다 경쟁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활동보다 개인의 상여금이나 은행금리에 더 예민해 보인다. 내 집 마련의 꿈은 부동산 대출과 이자지 불 때문에 월급통장에서 힘겹게 충당된다. 출산은 사랑의 문제를 떠나 보육‧교육비 문제로 쉽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적 연대는 시급하면서도 빛바랜 말이 되어버렸다. 사회적 연대가 사라진 장소에서 경제적 곤궁은 오롯이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되고, 개인은 이를 극복한다며 무한경쟁의 쳇바퀴에 다시 올라타는 악순환이 지속된다.
한국사회의 평범한 개인들은 ‘일베들’과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부자와 빈자, 서울과 지방, 강남과 강북, 대졸과 고졸, 기타 등등 다양한 차별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사회에서 개인들은 약자에게 혐오와 증오를 배설하면서 자기위로와 희열을 느낀다. 또한 ‘일베들’은 경제적‧사회적 소외 속에서 왜곡된 연대의식을 형성하기도 한다. ‘일베들’이 일베로, 다시 서북청년단 재건위로 하나의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은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일베들’은 특수하고 머리에 뿔 달린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내 옆에서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동료, 친구, 자녀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베들’이 일베와 서북청년단으로 조직되는 것을 막으려면 그들에게 낙인을 찍기보다, 사회적 연대를 함께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경험해야 한다. 학교에서는 입시교육을, 직장에서는 경쟁적 노무관리를, 지역에서는 지역연고주의를, 가족 내에서는 성차별을 거부해야 한다. 나의 친구, 직장동료, 가족들, 이웃들과 사회적 연대를 재구축하는 여러 과정들이 모두 그 길에 서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연대도 그들이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연대의 가치에 동의할 때 더 확장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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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북청년단을 후원한 주한미군의 수장, 존 하지 미군 중장(편집자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