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지마 정신줄’ 강좌(노동기본권 강좌) 후기

  • 글쓴이: 민경(결여의 틈)
  • 2015-03-10

휴학을 하고 촬영 알바를 시작했다. 보통은 알바를 마치고 바로 집으로 갔지만 금요일에는 노동자교육센터에 갔다. 얼마 전부터 유경순 선생님과 다른 몇 몇 분들과 함께 시작하게 된 페미니즘 세미나 팀에서 같이 참가하기로 한 ‘노동 기본권’ 강좌를 듣기 위해서였다. 당시 나는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노동’에 관한 추상적 지식들과 (장기간 알바로는 처음이었던) 알바 현장에서 내가 실제로 해야 했던 일들 사이에서 한창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짧게 말해 ‘멘탈붕괴’(이하 멘붕)중이었던 거다. 주 6일 중 유난히 힘든 날엔 일을 마치고 도망치듯 학원(강의 촬영 알바였다)을 빠져나와 지하철 안에 몸을 싣고, 한숨 지으며,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그날의 고단함을 뱉어내기 바빴다. ‘내일은 좀 괜찮아지겠지’란 기대 따위는 없었지만,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문득 들 때, 왠지 내가 받지 않아도 될 대우를 받거나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했다는 느낌이 들 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강의 촬영 중에 ‘이건 아닌 것 같아요!’하며 촬영을 중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못해먹겠네!’라며 현장을 박차고 나올 수도 없었으니까. 하고 있던 알바의 급여가 다른 알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 ‘이건 아닌 것 같아’라는 그 느낌적 느낌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이 실은 좀 더 큰 이유였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인 건지, 부당하다면 어떤 측면에서 어떤 근거로 부당한 건지, 속 시원히 알 길은 없었고, 확신이 서지 않으면 말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결국 도돌이표를 찍었다. 그렇게 두 세 달을 보내고 있었고, 그 와중에 ‘놓지마 정신줄’이라는 노동 기본권 강좌를 듣게 되었다.

 

노동 기본권의 정의가 “노동자의 인권을 실정법으로 구체화한 권리”라는 것에 걸맞게, 강좌들의 주제는 1주차 노동자, 2주차 인권, 3주차 노동법, 4주차 노동권으로 이뤄져 있었다. 5주차 ‘이야기 톡톡’은 그것들을 종합하여 함께 정리하고 좀 더 편하게 이야기 나눠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강좌들은 대부분 ‘강의 + 모둠별 활동과 발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당일 강의의 주제와 관련되어 평소 생각했던 것들이나 경험했던 것들을 나누어준 카드에 써 본 뒤, 모둠별로 그것들을 모아 함께 이야기하고 정리하고 앞에 나가 발표하며 전체적인 논의로 끌어나가는 형식이었다.

 

1강 ‘고민 톡톡’에서는 청년노동자로서 살면서 겪었던 현실에서의 어려움과 고민들을 이야기하며 ‘내가 생각하는 노동자는?’이라는 주제에 대한 각자의 견해들을 모둠별로 모아 정리해봤다. ‘유일한 가치 생산자’라는 기본적, 긍정적 의미들도 나왔지만, 사회적 인식 아래에 형성된 워딩 자체에서 풍기는 부정적 의미들도 나왔고, 현실적 고민들과 쟁점들이 나오기도 했다. 첫 강부터 꽤 알차고 활발한 논의들이 오가서 즐거웠다. 다만 앞에서의 모둠별 토론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고 많이 집중했던 탓인지 뒤에 시작한 본격적인 강의에서 집중도가 다소 떨어진 것이 아쉬웠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알기 쉽고 깔끔하게 정리해주면서 참고자료로 알찬 강의 자료를 주셨고 그게 또 큰 도움이 되어 프로그램의 전체적 균형이 크게 깨진 것 같진 않았다. 더 깊은 논의나 질의응답시간을 가지기엔 시간이 조금 부족한 느낌을 받아서 아쉬울 따름이다. 앞에서 나온 고민들과 뒤에서 진행된 강의 내용을 연결지어 말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았을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2강 ‘인권톡톡’에서는 인권실태와 인권/노동권이라는 주제 하에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본 강의를 듣기 전 그날의 강의가 가장 지루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마나한 소리 하지 않을까’하는, 대충 다 예상되는 그저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초중고 시절 들었던 인권 수업이나 평소 스쳐지나가며 접했던 인권 강의들로 인해 형성된 편견 탓이 컸을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가장 기억에 남는 강의가 이 날의 강의다. 지식의 축적뿐 아니라 생각의 범주를 확장시켜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조금 더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인권의 개념을 알 수 있어 좋았다. ‘인권’의 역사나 목록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된 것도 좋았지만, 지난한 인권 투쟁의 역사 속에서 ‘행간 읽기’를 할 수 있었다는 것에, 그리고 그것을 다시 현재적인 관점으로 끌어와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특히 더 좋았다. 유일하게 좋지 않았던 것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넓으면서도 촘촘한 이 인권이라는 개념이 현실에서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확산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따지고 보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화가 났다는 것 정도. 앞 주에서 노동에 관한 현실적 어려움들과 고민을 이야기 했고, 본 강에서 과거 인권 개념에서 배제된 여성의 권리와 현재까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여러 가지 권리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강좌 후반부에 진행되었던 모둠별 상황극에서는 두 모둠 다 노동 현장에서 일어나는 각종 차별, 특히 여성 노동자에 대한 차별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두 강좌가 꽤 잘 연결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3강 ‘노동법 톡톡’에서는 근로기준법과 그 사례들에 대한 강의가 진행되었다. 그날 강사이셨던 유상필 노무사께서 얼마 전 보았던 영화 ‘카트’에 출연하신 것을 자랑스레 밝히셨다. 한차례 웃고 나니 왠지 강의가 더 재밌어졌다. 노동법의 사회법적 측면을 강조하며, 개별적 근로관계에서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법적 근거들부터 집단적 노사관계에서의 핵심인 노동조합법까지 개괄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기본적이지만 오히려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은 용어들의 개념도 익힐 수 있어 좋았는데, 이러한 설명들 외에 각종 실제 사례들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 특히 더 좋았다. 질의응답시간에 내 경험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일하고 있는 형태가 도급계약이라는 것과, 따라서 사실상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업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심지어 일하는 동안 고용계약만큼 시간적 강제가 많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다. 하지만 고용형태나 그에 따른 업무형태도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계약서를 봐야한다는 말에, 왠지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억울함이 밀려왔다. 계약서에 명시된 ‘갑’과 ‘을’은 결코 평등한 관계에서의 갑-을이 아님을, 여기서 또 한 차례 느낄 수 있었다. 뻔한 이야기지만, 모르면 그냥 해야 하는 거니까 말이다. 4강 ‘노동권 톡톡’에서는 노동기본권과 노동조합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3주차 노동법 강의 때 개별적 근로계약에서 알아야할 기본적 개념들과 각종 법적 지식들을 배웠다면 본 4주차 강의에서는 법적으로 구축된 조항들 외에 노동법의 의의와 그것이 나오기까지의 역사적 맥락, 그리고 노동 기본권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노동3권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자연스레 집단적 노사관계에서 지켜져야 하는 노동조합의 권리와 역할들에 대한 조금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함께 들을 수 있었는데, 성문화되어 지켜지는 노동권이 있는가하면 헌법상으로 제약되는 권리들도 있음을, 그리고 그 부당함의 근거와 관련된 실태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끝 무렵 나왔던 ‘자유권적 기본권’에서 ‘생존권적 기본권’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결론은, 앞선 2주차의 인권강의에서 들었던 인권의 역사적 맥락과, ‘누구의 시야에서 볼 것인가’에 따른 인권 범주 확산의 흐름에 관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 탓에 조금 더 생생하게 와 닿았다. 5강 ‘이야기 톡톡’에서는 짧은 쪽지 시험과 알바노조 관계자 분의 강의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쪽지 시험에서는 깔끔하게 탈락했지만, 강의는 열심히 들었다(현재 내가 알바생이기도 하기에). 평소 지나가는 말로는 많이 들었지만 자세히 알아보진 않았던 곳이라, 꽤 흥미로운 강의였다. 뉴스 등에서 간간히 그 소식들을 보고 있으면, 너무 ‘이슈 파이팅’ 이나 단발적 성과 위주의 단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실은 조금 들어 괜히 더 크게 관심 가지지 않으려 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 관계자분이 오셔서 하는 이야기들을 듣다보니, 현재 알바의 실태가 단지 체감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각종 객관적 수치에서도 여러모로 (훨씬 더)열악한 상황에 놓여있으며, 그에 따라 긴급한 사안들과 알바생이라는 비가시적(실제로는 굉장히 가시적이긴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은)존재와 단체의 존재부터 우선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당분간 이슈파이팅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는 말에 공감이 갔다. 강의가 마치고 나 또한 알바노조에 가입했으니, 말 다한 것 아닐까. 5강 끝 무렵, 사례에서 소개한 맥도날드 투쟁 계획을 함께 응원했고, 이로써 5주에 걸친 모든 수강을 마쳤다. 유일한 ‘성실 수강생’(^^)으로서 ‘개근상’을 탔고, 센터에서 준비해준 주류와 음식들 속에서 마지막을 자축했다. 상으로 받은 책, 열심히 읽겠습니다. 위에 다 써 둔 이야기라 한 번 더 말하기도 멋쩍지만, 본 강좌는 어쨌든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많이 와 닿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 적절한 시기에 적절하게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강좌를 듣는 동안 나는 두 가지 소식을 불러온 하나의 사건을 일으켰다. 어느 날엔가, 계약서에 쓰여 있지도 않은 칠판닦기 일을 무단으로 하지 않고 촬영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학원을 나왔다. 그것이 불러온 좋은 소식은, 짜릿한 쾌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엄습해왔지만 그래도 쾌감이 좀 더 컸다는 것이고, 심지어 어떤 해방감마저 맛봤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학원의 정규직원으로부터 카톡이 날아와, 왜 칠판 안지우고 갔냐며 핀잔을 들었고, 그는 나에게서 죄송하다, 다음부턴 꼭 지우겠다는 다짐을 받은 뒤에야 알겠다며 대화를 마쳤다. 쾌감으로 시작했으나 굴욕으로 막 내린 그날엔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이것이 나쁜 소식이다. 한 번 더 시도할 법도 했지만 그러진 못했다. 한 달을 넘게 노동기본권 강의를 들었고 공부했지만, 현실에서는 나 혼자 뭔가 커다란 것을 해보지도 심지어 작은 것조차 이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약 7개월에 걸친 알바를 모두 마쳤고 지금 나는 복학을 했다. 바뀐 것은 크게 없다. 알바 노조에 매월 최저 시급에 회비를 내기 시작했고, 그때의 수강생들과 세미나를 계속하고 있고, 한 줌 남아있던 세상에 대한 환상이나 안이한 생각들조차 깨져버렸다는 정도. 그 정도가 바뀐 것이라면 바뀐 것이고 얻은 것이라면 얻은 것일 거다. 하지만 23년 중 단 5주간에 걸친 수업이 이전에 축적된 생각과 지식들에 조금의 균열을 주었다면, 더불어 사선의 시각을 터줬고 꽤 묵직한 자극을 주었다면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썩 괜찮은 의미가 있었던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그래도 고마운 것은, 적어도 그 5주 동안 알바 마친 뒤엔 적절한 힐링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 (다음엔 투쟁도 가능하길. 꼭 그러길. 확실히 혼자는 더 많이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