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묘하기도 하다, 인생이...
지방대를 나와 직장에 취직을 하게 되면서 대전에 올라온 해가 ‘92년 6월’이었다.
노조가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 선전홍보부장을 맡게 되고 95년 어느 주말에 민주노총(아마도 준비위 시절이었을 것이다. 오래되어서 연도와 명칭이 맞지 않을 수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에서 교육선전 담당자 교육을 속리산 어디에서 했었다. 신혼이었는데 중고 르망을 끌고 혼자 갔었다. 안가도 되고 안 갔으면 삶의 여러 가지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편한 정규직노조의, 상근도 아닌 선홍부장이 거기에 그것도 신혼인데 주말에 차까지 끌고서 왜 갔을까? 좋게 표현하면 열정이었던 것 같고 50이 된 나이에 생각해보면 두텁고 질긴 업때문이 아닐까 한다.
진순누님(나이가 오십이 되니까 자연스럽게 이렇게 불러진다. 세월이 흐르니 초자 간부가 같은 50대 되었다.)과의 인연이 그날 시작되었고, 현장 초급간부의 이런 저런 투정(?)을 노련한(?) 상급단체간부는 애교로 참 많이 봐 주었던 것 같다. 그렇게 고만 고만하게 질긴 인연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결혼(94년 12월)전부터 상집간부로 일을 했으니 노동조합을 기웃 거린지도 햇수로 하면 20년이 훌쩍 넘는 셈이다. 지부의 상집간부, 사무국장, 부지부장, 소산별노조 상근국장(이게 얼마인지 기억이 없다), 상급단체(연맹) 지역본부장 3-4년, 연맹 처장 7개월, 그리고 지부 노조 출근 3-4년, 그리고 2011년, 5년 기한을 정하고 노조와의 인연을 정리했었다. 그런데 다시 희생자로 지정이 되어 과기노조와 연전노조가 합해진 공공연구노조로 2015년 2월 2일 출근하게 된다.
노조활동을 하면서 일어난 지나간 일들에 대한 얘기는 별로 하고 싶은 맘도 없고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분노도 원망도 없다. 다른 이를, 노조를 탓할 이유도 없이 다 나의 탓일 것이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던 희생자로 다시 지정이 되고, 나의 선택으로 노동조합활동을 하게 되었다.
나의 20년간의 노조 기웃거림에 나의 옆지기인 부인은 늘 배제되어 왔었고 무시되어 왔다. 잘난 노조활동 한답시고 늘 무시하고 늘 활동이 가정사보다 우선이었다. 2015년 2월, 노조활동을 다시 하는 데는 옆지기의 의견이 거의 100% 작용했다.
2005년도 인지 6년도 인지 모르겠지만 거의 9-10년 전의 어느 시기부터 주말에 산을 찾았고, 약초를 배우기 시작했다. 산은 늘 품어주었다. 명산산행으로, 약초산행으로 주말은 늘 산에 있었다. 갈 때가 그곳 뿐 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산행과 약초, 자연을 아는 공부도 제법 햇수를 거듭했고, 산야초 카페에 지역지부장까지 했었다. 그런 가운데 몸펴기생활운동(시작 당시 몸살림운동)과의 인연도 우연찮게 이루어진다.
지금 한내 사무처장을 맡고 계시는 이승원동지가 우연히 대전의 술자리에서 만나 나의 몸을 한번 교정(지금은 교정이란 표현을 사용치 않고 도움주기라 한다)해 주었다. 그렇게 몸펴기 생활운동이 인연이 되어 2007년도부터 지금까지 이 몸펴기 운동을 해오고 있고, 몸펴기생활운동협회 이사, 사범심사위원을 거쳐 현재 감사이고 대전운동원을 4년간 운영해 오고 있다. 아마도 산과 이 운동과의 인연이 없었더라면 현재의 나는 존재치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2011년부터 노동조합과 인연을 단절했던 3-4년은 진안에서의 농사와 몸펴기운동 그리고 천안에서 평택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했던 공장생활이 이어지고 겹쳤던 기간이었다. 1년 반정도 공장생활을 하면서 사무직노동자로서 느끼지 못했던 다른 근무 환경, 임금, 노동강도 그리고 자본의 속성 등을 체험하는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은 또한 천안시 성거읍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던 아들 녀석과 1년 반을 부대끼며 산 기간이었다. 밥해주고 빨래하고 식모 아닌 식모살이를 1년 반 했는데 그 동안 못 다한 애비노릇 한 것 같이 뒤돌아보면 참 뿌듯하다. 이 식모살이 할 때 이전에 민주노총 대전본부 근로자복지관에서 한식조리과정을 듣고 딴 조리사 자격증이 나름 한 몫 했다. 공장 생활 할 때는 전기를 너무 몰라 공부를 해서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땄고 공장생활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60세 이후에 농촌에서 독거노인들의 집전기 수리는 봉사로 할 수 있지 싶다.
그렇게 자연과 몸펴기운동, 농사, 공장생활, 아들과의 생활을 통해서 마음 한구석에 분노와 풀리지 않은 화를 가지고 있던, 성질 더러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악수마저도 사양할 정도로 속 좁고 모가 난 초짜 간부는 둥글고 둥글어져 50살이 되었고, 2015년 2월 다시 노동조합과 인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돌고 돈다고 했던가! 참묘하다. 인생이.
2015년 2월은 내게는 10년의 삶을 뒤돌아보고 다시 10년의 삶을 시작하는 출발점이자 전환점이다. 생계, 노동조합활동, 농사, 몸펴기를 병행하면서 정규직 중심의 노동조합운동에서 기여할 분야를 찾아야 할 숙제가 놓여 있기는 하다. 노동안전분야 그중에서도 노동재해 예방과 재활분야에서 전문영역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재정적으로 안정을 기하고 정년이후에 공동체에서 어떻게 생활할 것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도 준비하고 공부해야 할 듯 싶다. 이미 고령사회에 접어든 극도로 심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년(60세)이후에 노동자들은 무방비로 내던져진다.
앞으로 노동조합과의 인연이 있는 기간 동안 잘못하면 내가 먼저 고꾸라질 것이고, 삶이 어떻게 될지 장담은 못하겠다. 변수가 많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나의 업일 터. 스스로 먼저 고꾸라지지 않으려고 10년간 몸과 마음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나와의 약속은 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종종 있다. 나올 때 빈손이었다. 그 동안 살아온 과정을 보면 손해 본 것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듯하다. 그래도 사는 게 너무 힘든 세상이고, 자식으로, 남편으로, 애비로서 해야 할 쉽지만은 않은 역할이 아직 내 앞에 놓여 있고 그리고 노동자로서도 해야 할 몫이 아직 있는 모양이다. 묵묵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담박하게 하면 될 듯하다. 글이 너무 긴 것 같다. 두서없는 세상살이 얘기 지나가면서 읽어주시기 바라며, 읽어주신 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