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상업화와 민주주의

  • 글쓴이: 노동자교육센터
  • 2016-12-05

  박근혜 게이트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공범들을 처벌하자는 목소리 역시 높아지고 있다. 이른바 체제 부역자들이다. 시중에서는 새누리당, 검찰, 보수언론, 청와대, 재벌 등을 대표적으로 꼽고 있지만, 이 명단에 굳이 하나만 더 추가하자면 바로 대학이다.

  오늘날 대학이 무참히 붕괴된 것은 정치권력과 교육부의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정책과 행정에 대해 자발적인 굴욕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정부조직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인 기관이 교피아(교육부+마피아)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이들은 친일친미 사대주의 엘리트 집단으로 해방이후부터 현재까지 확대재생산하면서 교육부를 장악하고 교육정책을 독점해왔다.

 

  이데올로기와 계급구조 재생산

  특히 신자유주의가 전면화 되면서 한국의 대학이 희망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동물의 왕국처럼 승자만이 살아남는 경쟁의 공간에서 학생들의 선택의 폭은 매우 좁을 수밖에 없다. 이명박의 “대학도 수익사업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라며 “외국은 대학이 호텔, 슈퍼마켓도 하지 않나?”라는 발언이 오히려 관심을 끄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스펙조차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대학과 자본의 전략을 이제는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 대학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재를 두 번 죽이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정의와 진리를 내팽개치고 세속의 욕망으로 가득한 신자유주의형 인간을 양산하는 곳이다.

  대학의 운영자들은 자본의 축적양식과 경영기법을 도입하여 돈벌이에 급급하고 있다. 그들은 상호간 돈 되는 사업을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학교에 자본을 유치하기도 하고 직영사업을 늘이면서 매출도 늘리고 내부 원가도 줄이고 있다. 학장이나 총장은 후원금을 끌어오고 수익사업에 앞장을 서서 성과를 내야 인정을 받고 연임도 가능하다.

  대학 기업화/상업화는 1980년대 미국에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의 전파와 함께 급속도로 확산된 현상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오랜 기간 대학의 기업화/상업화가 진행되면서 학문공동체가 와해되고 대학의 가치가 훼손돼 왔다. 대학 교수들이 강의보다도 기업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사적 연구에 몰두하면서 교육의 질이 저하되었고, 기초학문보다는 기업에서 산업 관련 분야만 집중 육성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미국의 기업화/상업화 이데올로기를 한국의 대학은 재생산하고 있다. 대학 교수들의 대다수가 미국 박사고, 유럽 등 그 밖의 국가나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경우는 소수에 속한다. 이렇게 미국문화에 지극히 예속적인 한국 대학들이 미국 대학들의 기업화/상업화 경향을 마치 선진기법인 양 받아들여 그 전철을 착실히 밟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대학의 기업화/상업화는 한국사회의 계급구조를 재생산하는 거점이 되어 버렸다. 자본과 국가는 노동력재생산의 비용을 자신들이 지불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교육연한을 늘려 대중들의 욕망을 조절하거나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학력에 따른 임금격차를 정당화하는 서열체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노동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임에도 각각의 노동에 위계를 설정하고, 정신노동이 육체노동보다 우위의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피지배계급에 설파하는 데 있어 대학서열체제만큼 효과적인 기제는 없는 것이다.

  그 결과 대학서열체제는 노동자계급을 분화시키고 계층화한다. 서열체제를 통해 관리자의 지위에 오른 계층들은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그 지위를 대물림하기 위해 학력에 따른 임금과 사회적 지위의 차이 그리고 이를 재생산하는 대학서열체제를 옹호하거나 묵인한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용을 유지하거나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는 노동계급의 일부분은 자신의 자녀만큼은 관리자의 지위 혹은 자신의 지위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수입의 상당부분을 자녀교육비에 쏟아 부으면서 그 체제에 적극적인 반대를 하지 않는다. 또한 이 서열체제의 하위에 있는 다수의 경우, 일부는 계층상승의 기회를 꿈꾸며 무한 경쟁의 들러리로, 또 다른 일부는 진입에 요구되는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어 절망하고 포기하며 ‘잘못된 세상’이 아닌 ‘못난 자신’을 저주하고 원망하면서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고 체념한다.

 

  대학의 붕괴와 진보의 위선

  또한 대학의 상업화/기업화는 대학 자치와 대학 민주주의를 붕괴시켰다. 현재 우리 대학은 꼰대만 있고 선생이나 스승은 없는 경쟁과 배제의 공간이며, 비정상이 보면 정상이고 정상이 보면 비정상적인 공간이다.

  대학의 한 주체인 학생들이 대상화된 지도 옛날이야기다. 학생들 스스로 대학의 주체로 우뚝 서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학교 당국이나 교수들이 학생들을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천박한 인식은 근본적이다. 자본의 노예가 된 대학에서 학생들의 졸업장은 새로운 노비문서에 불과하다. 학벌주의는 점점 우리의 숨통을 더 세게 조여 오면서 이 사회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학벌주의가 신분상승의 지름길이란 생각이 사라지지 않으면 결코 사회 발전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대학 자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재미있는 현상은 대학의 상업화를 비판하는 진보적 교수들의 다수가 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는 것이다. 본인들은 갖은 혜택을 다 누리면서 이제 와서 그 통로를 가로 막으려고 땀을 뻘뻘 흘리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광풍이 대학을 휘몰아칠 때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뒷짐을 지거나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되게 대응을 해왔다. 정규직 교수들은 행정업무가 많아져 힘들다고 푸념을 늘어놓지만 그것은 본인들 스스로 책무를 방기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에 불과하다. 대학교수만큼 안정적인 ‘철밥통’은 없다. 그들도 자신들 스스로가 짤리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최소 수준에서의 대응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교피아들에 의해 수립된 정책을 대학들이 순응하거나 동조했다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면 매우 끔찍하고 절망적이다. 무엇보다 진보대학으로 불리던 성공회대와 한신대조차도 이들의 날카로운 비수를 피하지 못하고 심장부에 박혀버렸다.

  성공회대는 많은 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현재의 총장이 연임에 성공하여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경제학과 소속의 전임교원이 타 대학으로 옮겨갔음에도 불구하고 후임 교원의 충원 계획은 만무하고 한 명의 전임교원이 이번 학기에 6개의 교과목을 소화하고 있다고 한다. 제 정신이 아니다.

  한신대는 지난 수년 동안 구조조정 방안을 놓고 찬반으로 나눠 심각한 내홍에 시달렸다. 그러다 지난 봄 학생, 교직원, 교수 전원을 대상으로 공청회도 개최하고 총장 선거를 치렀지만 3순위 후보자가 총장에 임명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역대 급이다. 역시 제 정신이 아니다. 아마 메이저캠퍼스였으면 사회적 이슈가 되어 난리가 났을 것인데, 마이너캠퍼스라 사회적 이슈로 확대되지는 못했다.

  이들 대학은 공교롭게도 민주 진보대학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장과 성공회라는 미션 스쿨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 대학의 구조조정을 찬성하는 자들의 논리는 단순 무식하면서 모순적이다. 학교의 생존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교육부의 대학구조조정 정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단다. 왜? 교육부의 재정지원이 없으면 학교 운영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 얘기가 처음에는 보수적 학자들의 논리인줄 알았다. 알고 보니 필자가 너무 잘 아는 동료들이었다. 수십 년 동안 연구와 지도 그리고 사회운동을 충실히 해온 사람들이었다. 역시 정치권력과 화폐권력의 위력은 대단하다.

  해법은 간단하다. 민주, 평화, 인권, 민주주의를 진보적 가치로 여기는 대학들이 겨우 정부의 대학평가와 재정지원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면 차라리 ‘진보’의 꼬리표를 떼고 보수주의자로 전향하면 된다. 대학을 운영할 능력이 없는 재단은 대학에서 손을 떼면 된다. 시장에 내 놓으면 구입할 자본은 널려 있다. 고소득 교원들의 임금을 현실화해서 학교 재정에 기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데, 실천적 의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학 구조조정은 교육부가 강제하지 않아도 각자 알아서 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현실을 핑계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여주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진보로 위장된 위장취업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비민주적 비상식적인 이들은 강의실에서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을 강조하는 논리의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다. 이들에 의한 학계 내부의 차별은 상상이상이다. 이들은 비정규교수와 연구소에 몸담고 연구자들에게는 아낌없이 ‘박사’라고 호명하면서 자신과 상대방의 직업과 신분을 차별적으로 과감히 노출시킨다. 반면 대학의 정규직 연구자들에게는 상큼한 미소와 함께 ‘교수’라고 호명하면서 동질감을 확인한다. 그게 뭐 대수냐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연구자도 있지만 문제의 심각성은 그 이후부터다. 노동조합 산하 연구소(원)의 이사장과 소장은 대부분은 정규교수가 독차지 하고 있으며, 민교협이나 교수노조 그리고 학단협의 대표도 정규교수가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관계 맺는 방식도 학연과 소속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내부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아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으며 들어가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그것과 무관하게 비정규교수들은 종종 ‘시다바리’의 역할에 머무는 비굴한 삶을 연출한다.

 

  대학을 전복시키는 힘이 민주주의

  그러니 대학 또 다른 주체인 교수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수나 진보나 지식인들은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인 권위주의, 위계질서, 엘리트주의, 폐쇄성 등 주요 모순이 응축된 집단이 바로 대학이다. 진보적 지식인 역시 두려움과 눈치 보기에 급급해 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정의와 진리 역시 립서비스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힘은 바로 학벌주의이다. 학벌주의를 폐지하자는 당사자들이 학벌주의로 똘똘 뭉친 또 하나의 역설이 성립된 것이다.

  결국 대학의 민주주의는 투쟁하지 않으면 권리를 찾을 수 없다는 보편타당한 상식을 회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대학이 자치를 실현하고 공동체를 회복하려면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대학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직업의 귀천이 없다는 인식, 누구나 차별하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는 상호호혜적인 관계, 상호 협력과 발달을 통한 의식 제고, 모두가 평등한 관계 속에서 전체 구성원들의 의사를 총화하는 구조, 각자 잘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보장되는 공간, 어린아이들처럼 깔깔거리며 신나고 즐겁게 생활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대학에는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대학을 진보적 삶을 위한 탈물질주의, 코뮨주의, 생태주의 등 새로운 시대를 위한 협동적 덕목을 가진 주체를 양성하는 곳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그러한 주체들이 대학을 전복시키는 바로 그곳이 민주주의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