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30주년기획연재1)전두환 정권의 폭압과 직선제 개헌운동

  • 글쓴이: 박준성 (노동자교육센터 운영위원)
  • 2017-03-22

= 1987년 6월항쟁 7.8.9 노동자대투쟁 30주년 기획연재 1=

 

전두환 정권의 폭압과 직선제 개헌운동

 

 2017년 올해로 1987년 6월민주항쟁과 7.8.9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난 지 30년이 되었다. 세대가 바뀌는 세월이 흘렀다. 1980년 518민중항쟁은 37년이 되었다. 지금 나이에서 37년, 30년을 빼면 그때 몇 살이었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떠오를 것이다.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역사일 수도 있다.

 1987년 6월민주항쟁과 7.8.9노동자대투쟁은 1894년 농민전쟁, 1919년 3.1운동, 1946년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 1960년 4월혁명, 1980년 518민중항쟁과 함께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이런 사건들은 모두 투쟁의 역사를 강조한다고 일어난 사건도 아니었으며, 항쟁의 역사를 빼버리고 싶다고 없어지는 사실도 아니다. 1894년 농민전쟁은 사람을 양반과 상놈 위아래로 나누었던 신분제를 철폐시켰고, 3.1운동은 1910년대 일본의 무단통치 방식을 바꾸고 민족해방운동의 지평을 넓혔고,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은 노동자 농민이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했고, 4월혁명은 선거로는 바꾸지 못했던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으며. 5.18민중항쟁은 민주주의를 위해 누가 끝까지 싸웠는지를 가르쳐 주었고, 6월항쟁은 간접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을 뽑는 헌법을 바꾸고 오래 동안 계속된 군사독재체제를 끝내는 분수령이 되었으며 7.8.9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었다. 이런 싸움들이 없었다면 우리 근현대사는 양반지배 계급이나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 독재자들이 누르면 누르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노예처럼 사는데 만족하고, 세상에 문제가 있어도 팔짱끼고 방관만한 역사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가 한 사건이 있고 나서 다음 사건까지 30년이 지나기 전에 일어났다. 그 가운데서도 518민중항쟁이 일어난 1980년과 1987년 사이는 7년에 지나지 않는다. 518의 파장이 1987년 투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실제로 6월항쟁의 핵심대상은 1979년 12.12 군부내의 권력을 장악하는 1단계 쿠테타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 2단계 쿠테타를 단행하고 광주를 군화발로 짓밟고 총칼로 학생 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 정권이었다. 6월항쟁은 1980년 518민중항쟁의 피가 흐르는 본류에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눈물 섞인 지류가 1987년 1월의 ‘박종철 고문치사’와 4월 13일 ‘호헌조치‘를 계기로 ’학살정권‘ ’폭력정권‘ 저수지를 터뜨린 거대한 항쟁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과 폭력

 1980년 518민중운동을 진압한 신군부는 1980년 8월 21일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하였다.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에서 전두환은 2525명 가운데 1명을 뺀 2524명의 지지로 제11대 대통령이 되었다. 10월 23일 마련된 5공화국헌법에 따라 1981년 2월 25일 전두환은 임기 7년의 제12대 대통령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제5공화국 전두환정권이 시작된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정치풍토 쇄신 특별조치법’,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 ‘제3자개입 금지법’을 만들었으며, 반공법을 개악하여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사회치안법’을 유지하여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1980년대 내내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은 ‘광주’였다. 27일 새벽을 가르며 들려오던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하며 외치던 젊은 여성의 애끓는 호소처럼 광주는 쉽게 잊혀질 수 없는 기억이었다. 5월 광주에서 끝까지 싸웠던 사람들, 숨져간 사람들의 투쟁은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빚이었지만, 전두환의 방조자 공범자였다는 부끄러움과 부채의식을 씻고 1980년대 민중운동, 노동자운동에 나설 수 있게 만든 힘의 근원, 빛이기도 했다.

 1982년 2월 20일 광주 시민군 대변인으로 끝까지 싸우다 목숨을 잃은 윤상원 열사와 들불햐학 활동을 같이하다 1978년 말 연탄가스 사고로 죽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있었다. 얼마 지난 4월에 백기완의 시를 다듬어 황석영이 노랫말을 만들고 김종률이 작곡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로 끝난다. 광주는 산자들에게 광주의 진실을 밝히고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라는 민주화 운동의 끊이지 않는 샘물, 마르지 않는 저수지였다. 첫 구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는 상투화된 노랫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살겠다고 앞장 선 젊은이들은 그 때는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자처했던 대학생들이었다. ‘광주’와 ‘전두환’은 젊은 학생들의 삶을 뒤흔들고 때로는 목숨까지 던지게 만들었다. 1981년 5월 27일 오후 3시 무렵 서울대 도서관 6층에서 경제학과 김태훈 학생이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외치며 몸을 던졌다. 아직 목숨이 붙어있을 지도 모르는 늘어진 몸체 위에 전경들이 사과탄을 던져 최루탄 가스 분말이 하얗게 뒤덮였다. 학생들은 쫓겨났고 김태훈의 육신은 빼앗겼다.

 1980년대 학생들의 시위는 한 두 사람이 건물 옥상 난간이나 나무꼭대기에 밧줄을 매달고 ‘광주학살 진상규명’ ‘군사독재 타도’를 외치고 밑에서 몇몇이 따라 구호를 외치며 유인물을 나눠주다 학내에 진주한 경찰에 잡혀 끌려가곤 했다. 그러한 상황을 시인 채광석은 <밧줄을 타면서>에서 “새 하늘 새 땅을 보기 위하여 외치며 노래하며 민족의 아들 딸 밧줄을 탄다 목숨을 탄다“고 시로 썼다.

 시위를 벌이다 끌려간 학생들은 강제로 군대로 끌려갔고, 국군 보안사령부는 1982년 9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녹화사업 전담과를 만들어 학생들의 붉은 사상을 파랗게 만들겠다고 ‘녹화사업’을 벌였다. 사상의 교화 뿐 아니라 출신학교로 보내 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 1,192명이 녹화사업을 당했고, 그 가운데 6명의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1983년 말 전두환 정권에 맞서다 제적된 학생이 1300여 명에 이르렀다.

 1983년, 일방적인 폭압만으로 권력 유지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중고등학생의 교복과 두발 자유화, 야간통행금지 폐지, 제적학생의 복학과 민주인사의 복권 같은 ‘유화조치’를 폈다. ‘유화국면’은 민주화 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전두환 정권의 폭력이 수그러든 것은 아니었다.

 1984년 9월 4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김근태 초대 의장이 구류 10일을 살고 나오다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9월 20일까지 발가벗겨진 채 고문용 칠성판에 묶여 10차례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하면서 폭력혁명주의자, 공산주의자라는 자백을 강요당했다. ‘짐승의 시간’이었다. 일곱 번째 고문을 당하면서 ‘소설’처럼 쓰여진 혐의사실을 시인하였다. 제발 고통 없이 죽여줄 것을 애원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상황에서도 고문자들의 손목시계를 보면서 시간을 기억하고 진술조서에 쓰여진 수사관 이름과 서명을 머리속에 새겨두었다. 고문실에서 풀려난 뒤 서소문 검찰청에서 아내를 만나 고문내용과 전하고 고문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며칠 뒤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 원한다’는 유인물을 통해 외부세계에 잔혹한 고문의 실체가 알려지게 되고, 변호인들은 고문기술자 이근안과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 8명을 고발하였다.

 1986년 6월에는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이 발생하였다. 1985년 봄 부천에 있는 제조업체에 ‘위장폐업’한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권인숙은 1986년 6월 4일 주민등록증 위조혐으로 경기 부천경찰서에 연행되었다. 6일과 7일 조사과정에서 조사계 형사 문귀동은 5.3인천 사태 관련자의 행방을 추구하면서 뒷 수갑을 채우고 자신의 성기를 고문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이 사실은 성고문 만행을 알리려는 권인숙의 결단에 따라 조영래, 홍성우, 이상수 변호사를 통하여 세상에 알려졌고, 7월 3일 문귀동을 고소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의 검찰은 권인숙을 급진좌경에 물들어 혁명을 위해 ‘성적수치심까지 이용’하는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하였다. 부천경찰 성고문공동대책위의 말대로 “성을 도구화한 자들은 운동권이 아니라 군사독재와 그 하수인이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은 경찰, 검찰, 공안당국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패륜적인 국가권력의 실체가 어떤지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전두환 정권은 두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민주화 운동, 학생운동을 ‘반공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좌경 용공으로 몰아 탄압하였다. 그러한 최대의 사기극이 1986년 벌어진 ‘금강산댐’ ‘평화의댐’사건 이었다. 1986년 10월 28일 대학생들은 건국대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발족식을 가졌다. 경찰은 농성계획이 없던 학생들을 포위하여 토끼몰이식으로 학교 건물로 몰아넣었다. 준비도 없이 만들어준 농성이 진행되었다. 10월 30일 전두환 정권이 이미 4월에도 언론을 통하여 짤막하게 보도된 적이 있는 금강산댐을 갑자기 뻥튀기하여 '북한은 200억톤 규모의 금강산 발전소를 착공, 한꺼번에 방류하면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허리 부분이 완전히 황폐화하는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재해를 가져 오게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10월 31일 경찰은 건대에서 농성하던 학생들을 ‘친북 공산혁명 분자’들이라고 몰아붙이며 8천여명의 경찰과 헬리콥터 2대를 동원하여 1525명을 연행하고 1287명을 구속했다. 인천 ‘5.3투쟁’에 이어 학생 운동의 조직이 대거 파괴되었다. 이후 전두환 정권은 금강산 댐을 '핵무기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공 작전 수단'(11.6), '88 서울 올림픽 저지 의도'(11.10-11,21,27,)로 몰아가면서 순식간에 전국민을 불안과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보수 언론은 ‘수공(물침략)’과 ‘물폭탄’ 위협을 극대화하는데 앞장섰다. 한강 하류 여의도가 물바다가 되어 63빌딩 허리와 국회의사당 머리에 물이 차오르는 모습을 그림까지 그려가며 보여주었다. 11월 26일에는 '북한측의 수공에 의한 또 하나의 적화야욕을 무력화시키는 대응 댐으로 '평화의 댐'을 화천 북방에 건설하겠다',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있다면 정부로서는 최대한 수용할 것이며, 온 국민의 성원을 기대한다'는 합동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국민들은 안기부가 성금 모금 성과를 높이려고 연말 연시 불우 이웃 돕기 운동도 보류하도록 한 상황에서 '자발적' '비자발적' 평화의 댐 성금 모금 운동 분위기에 휩쓸려 들었다. 다음해 1987년 2월 28일 평화의 댐 기공식을 가졌다. 1988년 5월 1단계 댐이 완공되었다. 평화의 댐 1단계 공사가 끝난 뒤, 8월 초 금강산 댐이 과장되었고, 평화의 댐 건설이 국민을 기만하고 엄청난 정세 오판에 의해 무리하게 추진된 것이라는 의혹이 전면에 떠올랐다.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정점에 치달았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 사복 형사들에게 잡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수배생활을 하고 있는 동아리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수사관들은 물을 가득채운 욕조에 박종철의 머리를 넣었다가 올리는 물고문을 10여시간 이상 계속했다. 어느 순간 숨이 끊겼다.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박종운 군의 소재를 묻던 충 책상을 ‘탁 치자 억 하고’ 소리 지르며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박종철의 시신은 1월 16일 재빠르게 화장하여 임진강에 한 줌 재로 뿌려졌다. 아버지는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하면서 울부짖었다. 이사건은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와 함께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1월 19일 경찰은 고문사실을 시인하고 고문경찰 조한경과 강진규를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되었다. 1월 20일 서울대 추모제에서 박종철의 학과 선배인 장지희는 눈물로 쓴 추모시를 낭송하였다.

 “철아/ 결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우리의 동지여/ 마침내 그날/ 우리 모두 해방춤을 추게 될 그날/ 척박한 이 땅 마른 줄기에서 피어나는/ 눈물뿐인 이 나라의 꽃이 되어라”.

 박종철 고문치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운동은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의 주도로 1987년 2월 7일 ‘고 박종철 범국민추도회’와 49재인 3월 3일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을 거쳐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민중항쟁 희생자를 위한 추모미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미사를 마친 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인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은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고문경찰은 둘이 아니라 다섯 명이며 상부의 치밀한 각본에 따라 사실이 은폐 조작되었다고 폭로하였다. 국민들의 분노와 언론의 집요한 추적보도에 밀려 검찰은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세 고문 경찰과 은폐조작에 처음부터 관여한 박처원 치안감등 3명을 더 구속하였다. 더 나아가 5월 26일 문책개각을 단행하여 전두환 정권의 실세인 장세동 안기부장과 노신영 국무총리를 경질하였다. 정당하지 못한 권력 앞에 침묵하던 분노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4.13호헌조치 반대 운동은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대통령 간접선거와 직선제 개헌운동

 1969년 삼선개헌으로 한 번 더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선거 연설에서 국민여러분들게 대통령으로 뽑아 달라는 정치연설은 이것으로 마지막이라면서 선거유세를 벌였다. 그 이후 국민들을 대상으로 정치연설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켰으나 대통령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속임수였다. 1972년 유신헌법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간접 선거로 대통령을 뽑게 되었고 연임도 가능하여 1인 장기 독재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5공화국 헌법도 간접선거제도 였다. 1972년부터 1987년까지 15년 동안 국민들은 대통령을 직접 뽑지 못하고 ‘체육관 선거’를 바라만 보아야 했다. 1985년부터 전두환 정권의 폭력에 맞선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요구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 1985년 2.12총선에서 에상과 달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공약으로 내건 신한민주당(신민당)이 관제야당인 민한당과 국민당을 제치고 제1야당이 되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세력.학생들이 내세운 요구는 보수야당과 동일하지는 않았다. 1985년 5월 3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화운동 세력은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을 앞세워 민주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민통련은 “군부독재 타도하고 민주정부 수립하자”고 외쳤고, 서노련의 구호는 “속지 말자 신민당, 몰아내자 양키놈”이었다. “철천지 원수 미제와 그 앞잡이 깡패적 반동정권의 심장부에 해방의 칼을 꽂자” “학살 원흉 처단하고 신민당 배격하자”는 구호도 외쳤다.

 1987년 전두환 정권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추모 집회를 성공적으로 봉쇄하면서 오히려 자신감을 얻었다. 4월 13일 전두환은 여야합의로 개헌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하고 군사정권을 연장하겠다는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한국경영자총협회, 이북5도민회중앙연합회, 실향민호국운동중앙협의회, 한국반공연맹, 대한노인회 같은 보수 관변 단체들이 호헌지지에 나섰다. 특히 한국노총은 1972년 10월유신 지지에 이어 4.13호헌조치를 지지함으로서 어용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곳곳에서 공권력을 이용하여 동원된 관제데모가 연이어 벌어졌다. 거대한 장벽이 민주화 흐름을 차단하고 광주학살의 주역들의 집권이 계속될 것 같았다. 박정희 18년 독재정권 만큼 신군부가 권력을 잡는다 해도 앞으로 10년이란 시간을 더 견뎌내야만 할 판이었다. 절망을 희망으로 전환시키고 패배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은 행동이었다.

 대한변협을 비롯하여 종교계, 학계, 문화계 등 각계각층이 호헌반대 성명을 발표하였고, 민주화운동의 구심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비롯한 각 부분단체들이 413호헌선언철폐를 외치면서 직선제 개헌 투쟁이 나섰다. 종교계 지도자들이 단식투쟁에 돌입하고 기도회를 열었다. 5월 27일 오전 8시 전두환 정권의 감시대상자 150여명이 경찰의 감시와 미행을 따돌리고 명동성당 맞은편에 자리 잡은 향린교회에 모여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곧 바로 결성대회까지 결행하였다. 긴 조직 이름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로 바꾸었다. 각 부문별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 종교계, 야당이 연합하여 해방 후 가장 큰 조직을 만들었다. ‘호헌철폐’ ‘직선제개헌 쟁취’를 중심에 두고 광주사태 진상규명, 고문살인 범인 색출처단, 민주인사에 대한 연금.구속.공민권 박탈 중지를 요구하였으며 국민들에게 시청료납부 거부운동에 동참하기를 호소하였다. 국본은 6월 10일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서울 지역 각 대학 학생회가 5월 8일 조직한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도 5월 29일 ‘호헌철폐와 민주개헌쟁취를 위한 서울지역학생협의회(서학협)을 결성하여 6.10대회에 조직적으로 참가하기로 결정하였다.

 6월 9일 오후 6시경 연세대학교 교문 앞에서 6.10대회 출정식 시위를 벌이던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친구 이종창이 머리에 피흘리는 고개 숙인 이한열을 부축해 일으키는 사진이 다시 한번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을 일깨웠다. (다음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