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어떠한 보상도 받지 않은 채 5월 24일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 소식을 공식 발표하자마자 트럼프 미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6월 12일로 예정된 북미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했다. 하지만 4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다시 6.12북미정상회담의 재추진을 공식화해서 불안정한 한반도 정세가 다시 활로를 찾게 되어 숨통이 트였다. 찻잔속의 태풍이라고 하기에는 그 위력이 매우 컸다.
김정은의 통 큰 결단과 문재인 정부의 안일한 자세
북미정상회담을 결정할 때부터 설마했고 조마조마 했지만, 그러한 기우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미국 양측이 더 이상 후퇴할 수 없을 정도의 불가역적인 수준을 만들어야 했다. 따라서 노동자민중을 중심으로 남한의 시민사회는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을 비판하고 대화 재개를 강력히 촉구해야 한다.
이번 한반도 정세의 대격변은 김정은 위원장의 통 큰 결단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며, 낙관적인 전망을 가능케 했다. 김정은의 경우 명료하고 원칙적이었다. ICBM을 완성시킨 것은 아니지만 핵무기 보유국가가 되었고, 그 바탕 위에서 체제 보장을 조건으로 완전한 비핵화를 하겠다는 선언이 미국으로 하여금 협상테이블로 나오게 한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한 것은 더 이상의 핵 실험은 없다는 핵 동결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시설폐쇄’(셧다운)가 아니라 진정한 ‘폐기’를 단행한 만큼 비핵화에 한 발짝 다가선 유의미한 행동이다. 또한 어떠한 보상을 약속 받거나 요구하지 않은 채로 취한 선제적 조치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결코 핵을 포기 하지 않을 것이다’는 국제 사회의 불신을 타파하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핵무기를 보유한 후 비핵화를 조건으로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을 무산시켜 기존의 ‘핵-경제 병진노선’ 대신 ‘비핵화-경제협력 병진노선’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런 점은 김정일의 선군정치노선을 버리고 당 중심 노선을 채택한 것, 핵무력 완성을 선언함과 더불어 이젠 인민들의 경제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경제강국 건설에 매진하겠음을 공언해 온 점, 미국과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셰계자본주의체제로의 편입을 통해 경제발전에 나서고 있는 베트남 모델 등을 이미 오래 전부터 연구함과 더불어 개혁-개방에 대비한 법-제도의 재정비 등을 적극 추진해 온 점 등에서 확인된다. 김정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달리 동안 시장경제적 개혁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 왔다. 그리고 상당한 경제적 성과를 거두어 자신감을 가지게 된 점도 중요하다.
여기에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도 힘을 보태주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이 남북관계를 최악의 대결상태로 몰아넣었다는 국민적 불안감의 증대, 촛불저항을 통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남한의 대북정책이 변화한 것, 문재인 대통령의 신중하면서도 한반도 평화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공감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안일한 정세 인식은 이번 사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판문점선언 "남북 상호 간 군사적 긴장과 전쟁위험을 해소하기 위하여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지한다."라는 2항을 정면으로 위배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문재인 정부가 전략무기를 동원한 한미합동훈련은 물론 태영호의 '거짓 비핵화쇼' 국회초청연설 등을 제어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눈치를 보고 미국의 재가를 받아 나라의 중대사가 결정되는 남한 정부에 대해서 얼마나 신뢰를 가질 수 있을까? 게다가 남한에서는 판문점선언으로 평화 공영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남측이 도와주어 비슷한 수준을 만들어 놓고 흡수통일을 해야 부작용이 최소화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보수언론은 모두 비슷한 논조로 호도하고 있다. 남한과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북한 사회가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한다. 이렇게 판문점선언에 대해 아전인수식 몰지각적 이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우월의식에 가득 차 있다.
소위 ‘한반도 운전자론’을 내세우면서 한국과 미국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는 생각도 착각이다. 북한은 어느 나라에 의존하는 외교를 펼치지 않는다. 다만 상호 간 신뢰와 역할 관계가 형성됐을 때 특별한 관계로 존재할 수는 있을 것이다. 판문점선언 이후 남한의 언론사와 보수정당의 태도를 보면서 문재인 정부의 능력과 의지에 대하여 적잖이 실망했을 것이다.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취재하기 위한 남측기자단에 대한 방북 불허는 정부와 언론사, 여야 정당 모두에게 무거운 숙제를 안겨 주었다. 이는 남한에게 조급증을 버리고 자주적이고 대등한 자세로 정상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오만불손한 태도
심각한 문제는 트럼프 행정부이다. 그의 등장은 처음부터 한반도 정세 분석과 전망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의 거칠고 공격적인 언행이 정세적 대응인지 기획된 것인지 헷갈렸다. 백악관의 정책결정도 내부 논의를 거쳐 결정된 것인지 트럼프 개인의 독단적인 결정인지 가끔 구분되지 않았다. 정치가로서의 역할과 사업가로서의 역할이 불분명하기도 했다. 국정 운영의 원칙과 철학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트럼프가 북한과의 대화에 적극 나선 것은 북한의 핵 능력이 본토까지 도달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자 더 이상 ‘전략적 인내’ 정책을 고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이냐, 전쟁이냐를 선택해야 할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이에 트럼프는 제재를 강화해 북으로 하여금 대화로 나오게 하는 것을 우선시하면서도 제제-압박을 통해서도 문제해결이 어려우면 최후수단으로 전쟁을 선택하겠다는 위협을 가했다. 하지만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함에 따라 대화에 적극 나서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는 미국 내 정치상황과 맞물려 있다. 러시아 스캔들은 점점 조여오고 있으며, 전직 포르노 배우와의 섹스 스캔들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트럼프가 미국적 가치를 우선시 하지만 승부사적 기질, 기업가적 인식 그리고 자기과시형 인물이라는 점도 신속한 해결에 나서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짧게는 11월 중간선거, 길게는 본인의 재선을 앞둔 상황에서 북미정상회담의 성공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트럼프의 오만방자하고 불손한 태도는 상황을 악화시켰다. 지난 5월 9일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2차 방북 후 만족한 합의였고, 북에서도 트럼프의 새로운 제안에 대해 김정은이 사의를 표했다는 언론 발표를 보면 정상회담 취소가 단순히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발언 때문이라는 것은 표면적 이유에 불과하다.
당시 미국은 비핵화의 조건으로 북한이 요구하는 적대시 정책 철회와 안보위협 제거 등에 대해 답을 줬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아마 일괄타결을 주장하던 미국이 단계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단계적 해법을 인정했거나 제재 해제의 시기를 기존 입장보다 유연하게 가져가는 제안을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폼페이오 장관이 북한에 억류됐다가 석방된 미국인 3명과 함께 귀국하고 당일 트럼프가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했다고 발표한 점 등을 보면 큰 문제없이 순항을 예고했다.
그런데 5월 16일 한미공군의 연례적 연합공동훈련인 ‘맥스 선더’를 문제 삼는 북한의 발언과 볼턴 안보보좌관을 선두로 한 강경파들의 대북 발언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북한으로서는 제재와 압박으로 인해 굴욕적인 협상에 나오는 양 호도했고, 경제건설에 필요한 지원, 리비아식 해결 등을 운운하는 볼턴의 사고 및 미국적 사고에 신뢰를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국가 간의 관계는 명분이 중요하고 등가성의 원칙에 입각해야 한다. 비핵화에 대한 등가교환의 문제이지 강자의 선심성 외교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북한은 미국이 가장 기피하는 인물인 김계관 제1부상을 앞세워 비난하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북한은 지속적으로 비핵화에 대한 등가 교환을 정당하게 요구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최근 노동신문의 '자립자강의 경제건설'이라는 구호가 이를 함축하고 있다. 비핵화에 대한 어떠한 경제적 보상을 비굴하게 구걸하지 않겠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미국은 여전히 자신들의 인식과 경험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3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12시간 동안 김정은 위원장의 많은 부분을 목격했다. 이를 통해 그 동안의 편견을 버리고 일정 부분 진면목을 확인하면서 신뢰가 형성된 것이다. 김정은은 정상회담을 정상적으로 소화했고, 매우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미국의 전문가들은 북한에 대한 회의감이 전통적으로 불식되지 않았고, 트럼프의 돌발적이고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불신을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몰상식한 외교적 결례를 범하면서 북한을 떠 보거나 의심하는 발언은 비정상적이다. 김정은에게는 남북정상회담을 한 번 더 하게 만드는 번거로움을 끼쳤고, 남한에게는 하룻밤사이에 말을 뒤집는 수모를 안겨주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중첩되면서 결국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제 2라운드 시작이다
하지만 북한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김계관이 위임받은 25일 담화문을 보면 “《트럼프방식》이라고 하는 것이 쌍방의 우려를 다 같이 해소하고 우리의 요구조건에도 부합되며 문제해결의 실질적 작용을 하는 현명한 방안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하였다.”면서 '트럼프방식' 비핵화의 절충점을 찾으면서 협상에 대한 기대감을 커지게 했다.
특히 "한반도와 인류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하려는 우리의 목표와 의지에는 변함이 없으며 우리는 항상 대범하고 열린 마음으로 미국측에 시간과 기회를 줄 용의가 있다"고 하면서 대화 재개의 의지를 밝히고 긴장을 완화시켰다. 과거와는 사뭇 다른 방식이었다. 미 제국주의에 일격을 가하는 순간이었다.
북한은 어느 나라든 자신들이 선택하여 유리한대로 자기 방식으로 경제발전을 추진한다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 누구도 북의 시장이나 경제권을 좌우하겠다는 사고를 버려야 한다. 우월성을 내세워 측은지심이나 선심성이 아닌 비핵화의 등가교환에 맞는 협력적 관계가 제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미국과 남한 모두 동일하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했다고 해서 핵무기를 만들 능력이 사리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핵으로 인해 유지됐던 한반도 평화의 미래를 불안하게 해서는 안 된다. 미 제국주의에 의해 북한 주민이 고난의 행군을 계속해서 한반도 및 동북아 정세를 위태롭게 한다면 남한, 미국, 북한 모두 역사적 범죄국이 되는 것이다.
5월 26일 4차 남북정상회담에서의 김정은의 입장은 확고했다. 다시 한번 비핵화의 의지를 천명했다. 이에 따라 트럼프 역시 6.12북미정상회담의 재추진을 공식화했다. 이제 2라운드 시작이다.
앞으로의 과제는 북미정상회담 의제 조율에서 비핵화와 체제 안전 보장에 대한 접점 찾기가 주요 쟁점이 될 것이다. 비핵화는 사찰과 검증조치가 당연히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방식을 놓고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조치는 사찰 검증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판단된다. 아직까지 CVID에 북한이 동의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5.26남북정상회담에서도 이와 관련한 구체적이고 명시적 입장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북한이 체제안전 보장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적은 없다. 미국이 체제안전을 보장해 줄지 여부도 믿지 못하고 있다. 일단 북미간 불가침 조약을 맺어 북한의 안전 보장 체계를 견고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북미적대행위 금지와 상호불가침 약속, 평화협정 체결 등이 될 것이다.
결국 비핵화 로드맵을 둘러싼 북미 간 이견을 어떻게 줄이느냐가 관건이다. 북한이 지금까지 체제보장의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삼아왔던 핵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에 앞서 미 제국주의가 어떤 '당근책'을 내놓느냐에 따라 회담의 결과물도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