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드(2014년, 매튜 와처스 감독)는 유쾌하고 가벼운 코미디 영화이다. 동성애와 파업이란 흔치않은 주제를 엮어 탁월한 인간 드라마를 연출했다. 그러나 대단히 영국적인 영화여서, 정치사회적 배경을 잘 모르면 영화의 재미와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기 힘들다. 단순한 웃음과 재미 속에 담겨있는 정치적 함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간략한 스토리
1984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 집권 당시 석탄노조가 장기 파업에 들어서며 정부와 대립한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마크(벤 슈네처)는 친구들과 함께 광부들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인다. 하지만 게이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광부노조에서 후원을 거절하자, 그들은 웨일즈의 작은 탄광마을에 직접 연락해 광부들과 그들의 가족을 만나기로 한다. 광부들은 낯선 게이 레즈비언들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치지만 옥신각신하며 점차 마음을 확인하기 시작하는데…
“프라이드”는 실제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 졌다. 마거릿 대처가 집권 중이었던 1984년 여름, 영국석탄노조가 파업에 들어가고, 런던에 기반을 둔 게이레즈비언 인권운동가들이 석탄노동자 가족들을 지지하고자 모금운동을 벌인다. 노동자들이 그들의 도움을 거부하자 인권운동가들은 웨일즈의 자그마한 탄광 마을에 자리를 잡고 노동자들과 가족들을 직접 만나며 기부운동을 시작한다. 파업이 장기화 되면서, 두 그룹은 함께 서있을 때 가장 힘있는 연대를 이룬다는 것을 발견한다"
* * *
영화 예고편의 소개는 사실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영화 자체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는 영화 전체를 짓누르는 배경이다. 1984-95년 광산파업은 대처의 임기 11년 동안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옆 사진은 2013년 6월 대처가 사망하자 일부 영국인들이 “개X이 죽었다!”는 배너를 들고 축배를 든 장면이다. 세칭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 전 총리의 사망에 이렇게 반인륜적(?) 반응을 보이는가? 여성혐오?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영국식 계급적 증오의 표출이다. 또 대서양을 건너서, 칠레인과 아르헨티나인들도 독재자의 벗이었던 대처의 죽음을 전범의 죽음으로 축하했다.
한 마디로 대처는 그냥 신문에서 알려진 대처가 아니고, 1984년 광산파업은 그냥 파업이 아니었다. 대처는 15만 광산 노동자들의 삶을 박살낸 노동자의 적이었고, 광산파업은 대처와 보수당 정권이 광산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가한 처절한 계급적 복수였다. 광산파업은 1985년 처연하게 패배했고, 석탄 광산은 영국에 지도에서 사라졌다.
미세스 대처 - 우유 도둑X
2004년 고 노무현은 탄핵소추 당한 기간에 마가렛 대처의 전기를 읽었다고 한다. 그의 무지한 역사 인식은 둘째로 하더라도, 그가 임기 말에 추진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마가렛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의 유용한 무기였다는 점만 지적해 두자.
마가렛 대처(1925-2013)의 별명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철의 여인”(Iron Lady)이다. 그리고 그녀의 과감성은 좌우를 넘어 하나의 아이콘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녀에겐 또 다른 별명이 있다. 1970년대 보수당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1970-1975)을 지낸 시절에 얻었던 “우유 도둑X”(Thatcher Milk Snatcher)이다. 당시 중학생들이 무상급식으로 마시던 우유를 빼앗아가면서 얻은 훈장이다. 이미 성장판이 닫혔기 때문에 더 이상 우유가 필요없다고 부르짖었다.
1975년 보수당 대표에 선출되고, 1979년 총선에 승리해 영국 역사상 첫 여성총리에 선출됐다. 그 이후야 그냥 역사다.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 소련의 붕괴와 냉전종식을 이룩한 위대한 정치인으로 기록되고, 레이거노믹스와 함께 대처노믹스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고전이다. 현재 영국의 신자유주의적 폐해와 사회적 양극화는 전적으로 대처 덕분이다. (그리고 “치마 두른 대처”라는 별명을 얻은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 사기극도 그에 못지않은 기여를 했다.)
총리가 된 대처는 공식적으로 노동조합을 “영국병”으로 진단했고, 내심으로 “내부의 적”(Enemy within)으로 간주했다. 1970년대의 광산파업을 기억한 대처는 대결을 준비했고, 결국 승리를 거뒀다. 대처의 승리는 영국 노동자들에게 뼈아픈, 가슴시린 패배였다. 패자들은 결코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고, 그녀의 죽음에 축배를 들었다.
광산노조
광산노조(NUM: National Unions of Mineworkers)는 1972년과 1974년 파업에서 보수당 정부에 승리를 거뒀다. 이 시기는 1968혁명의 여파로 영국의 노동조합이 가장 전투적인 시기였다. 당시 에드워드 히스 보수당 총리는 “누가 영국을 통치하는가?”(Who rules Britain)라는 슬로건으로 조기 총선을 실시했다가, 패배하고 물러났다.
당시 광산노조의 위원장은 아서 스카길(Arthur Scargill: 1982-2002)이었다. 그는 1957년 19살의 나이에 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해 1970년대 파업의 핵심적 조직가로서 활약했고, 1982년 위원장이 되었다. 대처는 스카길을 “내부의 적”(the enemy within)이라고 지목했다.
1984년 3월 광산노조가 파업에 들어갈 당시 조합원은 17만명이었다. 그러나 파업 패배 후 광산구조조정으로 조합원은 급감했다. 2015년 아직 명목상 살아남은 광산노조의 조합원 100명이다.
1984-85년 광산파업(1984.03.06 ~ 1985.03.03)
1979년 집권한 대처정권에게 영국병은 노조병이며, 노조병의 핵심은 전투적 좌파노조였다. 대처는 5년 동안 광산노조 분쇄를 준비했다. 명목상 경쟁력없는 탄광폐쇄를 명분으로 내세운 구조조정 공세였다. 1945년 국유화된 석유산업은 국가석탄위원회(NCB: National Coal Board)의 통제 아래 있었고, “영국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노사분규”인 광산파업은 외형상 국가석탄위원회(NCB) 대 광산노조(NUM)의 대결이었다.
대처와 보수당 정부는 광산 노동자들에 대한 전면전에 들어갔다. 정치권은 불법파업이라고 아우성쳤다. 파업 찬반투표 없이 파업에 돌입했다는 이유였다. 1984년 9월 법원은 광산파업이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언론은 아서 스카길을 악마화했다. 대부분의 언론이 스카길 죽이기에 나섰다. 1979년 “불만의 겨울” 공공부문 파업 이후 위축된 노동운동은 암묵적으로 대처의 공세를 묵인했다. 파업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고립됐다.
그러나 광산노조는 완강하게 저항했다. 1984년 파업은 1년에 걸친 장기 파업이었고, 최대 142,000명의 조합원이 파업에 참가했다. 노동손실 일수는 2,600만일 이상으로, 1926년 총파업 이후 최대 규모였다.
※1984–85년 지역별 파업참가율
지역 |
노동력 |
파업참가율 1984.11.19 |
파업참가율 1985.02.14 |
파업참가율 1985.03.01 |
코크 공장 |
4,500 |
95.6 |
73 |
65 |
켄트 |
3,000 |
95.9 |
95 |
93 |
랭카셔 |
6,500 |
61.5 |
49 |
38 |
레스터셔 |
1,900 |
10.5 |
10 |
10 |
미들랜드 |
19,000 |
32.3 |
15 |
23 |
북 더비셔 |
10,500 |
66.7 |
44 |
40 |
북동부 |
23,000 |
95.5 |
70 |
60 |
북 웨일스 |
1,000 |
35 |
10 |
10 |
노팅햄셔 |
30,000 |
20 |
14 |
22 |
스코틀랜드 |
13,100 |
93.9 |
75 |
69 |
남 더비셔 |
3,000 |
11 |
11 |
11 |
남 웨일스 |
21,500 |
99.6 |
98 |
93 |
처리공장 |
9,000 |
55.6 |
– |
50 |
요크셔 |
56,000 |
97.3 |
90 |
83 |
전국 |
196,000 |
73.7 |
64 |
60 |
전국 180여 곳에 흩어진 사업장에서 피켓 라인이 쳐졌고, 한국식으로 선봉대가 동시다발 피케팅(flying picket) 전술로 전국 곳곳에서 경찰의 폭력진압에 맞섰다.
완강하게 버티던 광산노조는 1년을 3일 채우지 못한 1985년 3월 3일 위원장 직권으로 현장복귀를 선언했다. 광부들은 고개를 세우고 현장으로 돌아갔지만, 사실상 처절한 패배였다. 승패를 결정한 석탄 보유고의 수위가 위태로웠던 것은 나중에 알았다.
결국 석탄산업 민영화 공세가 물밀 듯 들이닥쳤고, 탄광폐쇄는 급속히 강행됐다. 1983년 174개였던 영국 탄광은 2009년 6개만 남았다.
1984-85년 영국 광산파업의 패배는 1980년 이탈리아 피아트 파업의 패배, 1981년 미국 항공관제사 파업의 패배, 1987년 일본 국철노조의 패배 등과 더불어,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노동운동 주력부대의 역사적 패배 중의 하나로 기록된다. 아직도 각국의 노동운동은 이 역사적 패배로부터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광산 노동자들의 패배는 대처와 보수당의 정치적 승리이자, 신자유주의 공세의 정점이기도 하다. 이 패배에서 시작된 노동운동의 몰락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급진적 동성애운동
동성애운동은 페미니즘/여성운동과 더불어 1968혁명/운동이 낳았던 새로운 사회운동의 하나이다. 1960년대의 자식이다. 그 출발은 급진적이었다. 1969년 6월 28일 뉴욕시의 스톤월인(Stonewall Inn)이란 게이바에서 무차별적 경찰단속에 맞선 동성애자들의 투쟁에서 비롯됐다.
수년간 경찰의 멸시와 폭력에 맞서 동성애자들은 밤새 스톤월 일대를 전쟁터로 바꿔놓았다. 스톤월 폭동 이후, 호모포비아(homophobia: 동성애자 혐오)는 더 이상 뉴욕 경찰의 무기가 될 수 없었다.
68의 급진화 속에서 동성애자 해방운동이 폭발했다. 첫 동성애운동 조직인 게이해방전선(GLF: Gay Liberation Front: 1969-72)이 등장했다. 동성애자는 더 이상 어둠의 자식이 아니라, 사회적 해방투쟁의 당당한 주체로 나섰다.
프라이드
영화의 제목인 프라이드(pride)는 자부심이란 뜻이다. 그러나 그 기원의 급진성은 현재 상당히 퇴색해 있다.
스톤월 폭동 다음인 1970년 미국의 동성애 활동가들은 기념행사를 준비했다. 당초 6월 마지막주 토요일에 시작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7월 27일 시카고, 7월 28일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동성애자들의 시가행진이 벌어졌다. 이것이 프라이드의 기원이다.
1980년대는 반동의 시대였다. 1960년대 후반의 급진적 운동이 후퇴했다. 동성애자들(LGBTQ)의 행진의 명칭은 처음에 게이 해방(Gay Liberation)이었다. 그러다가 게이 자유(Gay Freedom), 결국에 게이 프라이드(Gay Pride)로 귀착됐다. 해방운동이 권리운동, 결국 자부심으로 후퇴하는 과정이 명칭에 남아있다.
다시 영화로
영화는 크게 광산파업과 연대하는 게이, 레스비언의 활동, 웨일스 광산촌 노동자 가족들과의 만남, 문화적 충돌과 상호 이해, 내부의 강등과 대외적 증폭 등의 과정을 거친다. 광산파업이 패배했듯이, 동성애 내부의 갈등과 광산 지역사회 자체 내부의 갈등과 분열로 인해 동성애자와 광산 커뮤니티의 만남도 아쉬운 실패로 끝난다.
물론 영화는 1986년 메이데이 집회에서 게이-레스비언이 전체 노동조합 행진의 선두에 서면서 쓰라린 패배의 기억이 관료주의적 노동조합 운동으로부터의 인정이라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면서 진한 감동을 전한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은 여전히 팍팍하다. 노동운동은 전세계적으로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고, 동성애운동은 해방운동에서 사회운동으로 후퇴했다. 프라이드는 상품화되고, 상업화되어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바닥에서 풀뿌리 간의 소통과 연대이며, 차이와 차별을 넘어 인간적 상호작용 속에서 해방의 순간을 스크린 위에 재현한다. 웨일스 시골 구석의 광산노동자 커뮤니티와 런던의 이국적 게이-레스비언 공동체의 우연적 조우는 공동의 적으로부터 억압받는 커뮤니티들이 아래로부터 수평적으로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과 현실성을 담담히 드러낸다.
기본적으로 <프라이드>는 파업 30주년에 맞춰 제작된 작품으로 무겁고 비극적인 주제를 코믹 터치로 균형감있게 표현한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역사적 비극의 무게는 여전하고,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세대들은 아직도 1984년 광산파업이란 말 자체만으로도 울컥해진다. 그럼에도 절망과 패배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군상의 드라마 속에서, 투쟁을 통해 주체로 나서는 여성 투사들의 변화는 광산파업의 공식적 역사가 충분히 다루지 못하는 면을 절묘하게 표현했다. 가볍고 유쾌하게 즐길 수 있지만, 장면 장면 사이로 숨어있는 의미는 자못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