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영화로 보는 세계운동사]F.I.S.T. (1978) 미국 노동조합의 초상: 노동조합과 조직폭력

  • 글쓴이: 원영수 (교육센터 운영위원, 국제포럼 운영위원)
  • 2019-01-14

  0. 들어가며

  광활한 미국 대륙을 누비면서 미국 경제의 물류를 담당하는 것은 대형 트럭들이다. 상대적으로 철도 물류가 취약하기 때문이다. 대륙을 누비는 거대한 트럭은 미국 자본주의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트럭 기사(팀스터)는 거칠고 강한 남성성(마초주의)의 상징이기도 하다.

 외부에는 덜 알려져 있지만, 이 마초 팀스터들은 강력한 노동조합으로 조직돼 있다. 1960년대 전성기에 230만 조합원을 자랑했던 국제팀스터노동조합(IBT)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외형 뒤에는 조직폭력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비즈니스 조합주의로 악명높은 미국 노조는 경제적 파워를 지키기 위해 조직폭력(마피아)와 결탁했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는 노동조합과 마피아를 소재로 삼았고, 이는 미국의 황색 저널리즘과 헐리우드 영화의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형성된 노동조합의 이미지는 영욕으로 점철된 미국의 노동조합운동에 원죄의 낙인으로 찍혀 있다.

 

  1. 영화: 배경과 간략한 스토리

 F.I.S.T.(1978년작, 노먼 주이슨 감독)는 실베스터 스탤론이 <로키> 이후로 처음 주연을 맡은 영화이다. 영화의 제목이 F.I.S.T.는 허구의 노동조합인 트럭노조연합(Federation of Inter-State Truckers)의 약칭이다. 이 영화는 팀스터 노조와 지미 호파 위원장을 모델로 삼았다.

 

  간략한 스토리

  배경은 1937년 클리블랜드 부두. 현장감독 겐트는 신입 노동자 링컨 돔브로프스키에게 교육을 시킨다. 초과근무를 하더라도 수당은 없고, 하역 중 물건을 손상시키면 임금에서 공제한다. 돔브롭스키가 토마토 상자를 떨어뜨리는 사고를 치자, 롬브롭스키의 임금은 삭감되고 떨어뜨린 물건을 줍는 것을 도와준 동료는 해고당한다. 이런 부당노동행위에 격분한 주인공 조니 코박이 항의투쟁을 주도한다. 노동자들의 사장인 앤드류스의 사무실로 처들어간다. 조니는 협상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조니와 친구 에이브 벨킨은 해고당한다.

  코박과 벨킨의 지도력에 깊은 인상을 받은 마이크 모나핸이 접근한다. 그는 그들에게 트럭조합의 자리를 제시한다. 조합원을 모집하는 대로 급여를 받기로 한다. 조니는 실력을 인정받게 되고 자동차를 갖게 된다. 이 와중에 아나 자린카와 만나 연애를 시작한다. 조니가 신규 조합원을 많이 모집하게 되면서 사업주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코박은 새로 모집한 노동자들을 비노조 기업에 몰아주면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제안을 거부하자, 사업주들은 작당해 코박에게 폭력을 가한다. 신규 조합원 모집에 실력을 발휘한 코박은 지역에서 지도적 위치에 오르면서 F.I.S.T. 지도자 맥스 그레이엄과 경쟁하게 된다.

  지역에서 기반을 닦은 모나핸, 코박, 벨킨은 힘을 합쳐 콘솔리데이티드 트러킹 사를 대상으로 조직사업을 시작한다. 경영진이 협상을 거부하자 F.I.S.T. 노동자들은 파업에 들어간다. 그들은 회사 정문 앞에 캠프를 세우고 투쟁을 시작하지만, 사측 구사대와 고용 폭력배들에게 밀려난다. 이 과정에서 격분한 모나핸이 트럭을 몰고 공장정문으로 돌진하다가 총격에 맞아 사망한다. 코박은 모내한의 장례식을 힘으로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지역 조폭인 빈스 도일의 도움을 받아들인다. F.I.S.T. 조합원들과 마피아들은 힘을 합쳐 트럭을 공격하고 회사정문을 돌파한다. 마침내 트럭회사 사장은 단체협약을 맺는다.

  이 투쟁의 성과에 힘입어 코박과 벨킨은 미국 중서부를 돌면서 조합원을 모집한다. 경제력을 어느 정도 갖추고 아나와 결혼한다. 이 시기에 새로운 마피아 베이브 밀라노가 나타나 노조사업에 끼여들기를 원한다. 코박은 도일과 함께 밀라노를 만나는데, 비록 연루되기를 꺼렸지만 협력하기로 결정한다.

  1957년에 이르면 F.I.S.T.는 거의 200만 조합원을 거느린 최대 노조로 성장한다. 코박은 노조본부를 방문해 맥스 그레이엄을 만나지만, 호화로운 그레이엄의 사무실에 불쾌감을 느낀다. 코박은 서해안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벨킨을 방문해 그레이엄은 조합기금을 부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들은 조합재정을 조사해 그레이엄이 위원장의 지위를 이용해 조합기금을 자신과 부인이 소유한 유령회사로 빼돌리고 있음을 알아낸다. 또 노동조합에 반대하는 트럭 사업주의 부인에게 폭력까지 행사했다는 사실도 알아낸다.

  그레이엄은 위원장 연임이 유력했기 때문에 벨킨은 당국에 그레이엄을 고발하자하고 제안하지만, 코박은 부정 스캔들이 조합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다. 코박은 밝혀진 사실을 근거로 그레이엄을 압박해, 코박의 위원장 당선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그러나 새로운 위원장으로 취임한 코박은 상원의원 메디슨의 표적이 된다. 메디슨은 코박이 도일과 밀라노 등 마피아와 연계되어 있다고 의심한다. 벨킨은 코박에게 밀라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조합을 정화하라고 요구하지만, 코박은 이 요구를 무시한다. 나중에 도일은 벨킨이 그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것이라고 코박에게 말하지만, 코박은 벨킨을 해쳐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메디슨의 상원청문에 소환된 코박은 벨킨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에 빠진다. 벨킨 살해의 배후에 코박이 있다는 메디슨의 추궁에 격분한 코박은 청문회를 박차고 나온다. 상원 밖에서 코박은 항의시위로 트럭을 몰고 집결한 조합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코박은 아나와 아이들이 사라진 사실을 알아내고, 권총을 들고 나서다가 밀라노의 부하들에게 총격을 받고 죽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도로 위의 트럭 범퍼에 “조니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스티커가 붙어있다.

 

  2. 팩트 (1): 팀스터노조

  영화에 등장한 F.I.S.T. 노조의 실제 모델은 국제팀스터노조(International Brotherhood of Teamsters: IBT)이다. 2014년 기준으로 약 140만명의 조합원을 거느리고 있는 팀스터 노조는 캐나다까지 조합원을 포괄하기 때문에, 미국이 아니라 국제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19세기 조직된 전통적 노조들은 대부분 캐나다와 멕시코, 기타 미국령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국제노조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게다가 노동조합(labor union)이 아니라 형제회(Brotherhood)라는 극도로 마초적 이름을 공식적으로 자랑스럽게(?) 유지하고 있다.

  팀스터 노조는 1930년 결성됐고, 1933년 조합원은 75,000명에 불과했다. 1930년 지미 호파와 젊은 활동가 세대가 합류하면서, 지부조직들이 안정화됐다. 그 이후 20여년에 걸쳐 광역지역 조직과 전국 중앙조직이 완성됐다. 1936년 조합원은 170,000명으로 늘어났고, 1939년에는 420,000명이 됐고, 2차대전과 전후 호경기 덕분에 1951년 조합원은 100만명에 도달했다.

  팀스터 노조는 트럭 운전사와 창고 노동자를 조직했고, 초기 조직화의 무대는 미국 중서부였다. 호파와 그의 세대는 기습파업, 동조파업 등 노동조합의 조직력을 극대화한 기민한 전술로 트럭업체들을 차례로 굴복시키면서 노동조합을 성장시켰다. 193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런 조직화 과정을 통해 팀스터 노조는 미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팀스터 조합원 추이

  1933년 75,000명

  1935년 146,000명

  1949년 1,000,000명

  1957년 1,500,000명

  1976년 2,000,000명  

  1987년 1,000,000명

  2003년 1,700,000명

  2008년 1,400,000명

  2014년 1,200,000명

  지미 호파의 몰락 이후, 현장을 중심으로 노조개혁파가 등장했다. 1980년대 이후 민주노조를 위한 팀스터회(Teamsters for Democratic Union)가 현장활동가 조직으로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 결과 1991년 개혁파 후보인 론 케리(Ron Carey)가 위원장에 선출됐고, 그의 지도 아래서 1997년 대표적 화물운송업체인 UPS에서 대규모 파업이 승리했다.

  그러나 팀스터 노조의 강고한 관료체제의 개혁은 실패했고, 1998년 선거에서 지미 호파의 아들 제임스 호파(James Hoffa: 1941년생)가 선거에서 승리해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제임스 호파는 2001, 2006, 2011년 선거에서 승리해 4연임에 성공했지만, 2016년 선거에서는 반집행부 연합후보 프레드 주커만에게 52% 대 48%의 박빙의 승부로 간신히 승리했다. 그러나 지역 부위원장 선거에서는 개혁파들이 대거 당선됐다.

  한편 1980년대 중후반 산업구조의 변화로 조합원이 급속히 감소했고, 이에 대해 팀스터 노조는 조직화 대상을 확대해, 전통적 화물운송 외의 영역에서 조직화 공세를 시작했다. 그 결과 2000년대 초반 조합원을 170만 명대로 회복했지만, 그 이후 조합원이 다시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3. 팩트 (2): 지미 호파

  지미 호파의 본명은 제임스 리들 호파, 1913년 생이다. 1958년부터 1971년까지 국제팀스터노조의 위원장을 지냈고, 62세인 1975년 7월말 의문 속에 실종됐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호파는 젊은 나이에 노동조합 활동가가 됐고, 20대 중반에 이미 지역의 중요인물이 됐다. 1952년 호파는 IBT 전국 부위원장이 되면서 조직 내에서 전국적 인물로 부상했고, 1958년에 마침내 위원장에 선출됐다. 1964년 팀스터 노조는 최초의 전국 기본화물협정을 쟁취해 팀스터 임금의 전국적 기준을 마련하는 성과를 거뒀다.

  지미 호파의 지도 아래 팀스터 노조는 230만명의 조합원을 가진 미국 최대의 노동조합으로 성장했다. 호파는 팀스터 노조에 관여한 초기부터 조직폭력과 연계됐고, 이는 궁극적으로 1975년 실종의 주된 원인이다. 호파는 1964년 배심원 매수, 횡령과 사기미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1967년 1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1971년 중반 리처드 닉슨 정권과의 사면협정을 대가로 석방됐다. 그러나 사면의 조건으로 1980년까지 노동조합 관여는 금지당했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의 지도권을 되찾으려는 시도하던 중 의문의 실종을 당하고, 1982년 법률적으로 사망이 선고됐다.

 

  성장과 권력장악

  1930년대와 1940년대 지미 호파는 팀스터 노조의 간부로서 노조를 지키면서 조직을 중서부 일대로 확대하는 데 실력을 발휘했다. 비록 실제로 트럭을 운전한 적은 없지만, 유능한 노조 활동가로서 인정받아 1946년 제299지부의 지부장이 됐고, 이어 디트로이트 지부들도 장악하고 미시건주 팀스터노조의 지도자로 선출됐다.

  1952년 IBT 로스앤젤레스 총회에서 1907년부터 위원장을 지낸 대니얼 토빈의 후계자인 데이브 벡의 지명을 받아 전국 부위원장에 선출됐다. 호파는 중부지역 지부들의 지지를 규합해 토빈파에 대한 내부의 저항을 눌렀고, 그 대가로 호파는 새 위원장 벡에 의해 부위원장으로 지명됐다. 일약 39세의 IBT의 넘버2가 된 것이다.

  이후 IBT는 노조 총본부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수도 워싱턴으로 이전해 막강한 관료집단을 구축했다. 1952년 부위원장에 공식적으로 선출된 호파는 전국구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디트로이트나 워싱턴에서 보냈다. 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활동의 영역을 확대했다

  1957년 마이애미 비치 총회에서 호파는 위원장에 선출됐다. 전임자 벡은 상원청문회에 소환됐지만, 묵비권을 행사했고 결국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구속됐다. 한편 뉴저지 아틀랜틱 시티에서 열린 AFL-CIO 총회에서 팀스터 노조는 추방당했다. 조지 미니 위원장은 미국노총에서 부패로 타락한 팀스터 노조를 추방할 것을 촉구했고, 호파 위원장을 축출하면 재가입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IBT는 해마다 상급단체인 미국노총에 가맹비 75만 달러를 지불하고 있었다.

 

  전국 화물협정

  1961년 위원장 재선에 성공한 지미 호파는 본격적인 조직확대 사업에 나섰고, 1964년에는 북미 도로상의 모든 트럭 기사들을 포괄하는 단일한 전국화물기본협정(National Master Freight Agreement)을 성사시켰다. 이는 노동조합 역사상 최대의 업적이었다. 이에 고무된 호파는 항공부문과 다른 교통부문 노동자들의 조직하려고 시도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조직적으로 성공한 이 시기는 동시에 호파에게 검찰수사, 재판, 항소 등 정부의 사법공세에 시달린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1957년부터 지속적으로 각종 범죄수사의 대상이 됐고, 1960년 케네디 정부 아래서 조직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로버트 케네디 검찰총장은 법무부 내에서 호파구속팀을 운영하기도 했다.

  1964년 호파는 대배심 매수시도 혐의로 유죄가 확정돼 8년형을 선고받았다. 루이지애너주 팀스터 동료의 FBI 밀고가 결정적이었다. 또 같은 해 호파는 팀스터 연금의 부정사용 혐의(마피아 지도자들에게 연금 불법대출)로 시카고에서 재판을 받고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로 인해 합계 13년형을 선고받은 호파는 항소를 통해 판결을 뒤집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1967년 3월 펜실베니아의 연방교도소에 수감됐다.

  수감 직전 호파는 디트로이트 지부장 프랭크 피츠시먼스(Frank Fitzsimmons)를 위원장 대행으로 임명했다. 호파의 오랜 동료였던 피츠시먼스는 막상 호파가 수감되자 호파와 거리를 뒀다. 그는 노조의 행정구조를 분산시켰고, 호파가 위원장으로 행사했던 통제력을 완화시켰다. 당연히 호파는 격노했다.

 

  석방과 실종

  1971년 12월 23일 호파는 13년형 가운데 5년이 채 안되는 시간을 보낸 후 닉슨의 감형으로 석방됐다. 석방 후 호파는 팀스터 노조에서 일시불 연금으로 170만 달러를 받았다. 팀스터 노조에서 유례없는 일이었다.

  1972년 IBT는 재선에 도전한 공화당의 닉슨을 지지했다. 전통적으로 팀스터는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지만, 1960년 대선부터 닉슨을 지지했다. 호파와 닉슨의 유착 의혹이 퍼졌고, 호파가 100만 달러를 닉슨에게 지불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중에 1960년에도 은밀하게 선거자금을 제공한 증거가 발견됐다.

  그러나 호파의 석방에는 1980년 3월까지 노동조합 활동금지의 조건에 붙어있었다. 호파는 이 금지조항을 뒤집으려고 소송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또 권력을 되찾으려는 호파의 움직임은 곳곳에서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나 호파는 아직도 영향력이 남아있던 디트로이트 제299지부에서 복귀를 시도했고, 1975년 10월 영원히 실종되면서 그의 비극적 삶은 끝났다.

 

4. 미국의 노동조합(운동): 간략한 역사와 현재

  미국 노동조합운동은 국내 활동가들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부분적 연대와 협력이 진행되고 있지만, 한미 양국의 역사적 연계에 비하면 노동자들과 노동조합들의 연대는 대단히 부족하다. 주된 이유는 미국 노동조합운동의 역사와 그로 인한 한국 노동조합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노동자계급은 특유의 투쟁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고, 노동운동 역시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노동운동을 규정하는 것은 이른바 실리적 조합주의(business unionism)이며, 노동조합을 비즈니스로 보는 이 실용주의는 두 가지 어두운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조직폭력과의 연계이고, 다른 하나는 반공주의의 선봉에 섰던 역사 속에 있었던 정보기관(CIA)과의 연계였다. 팀스터와 지미 호파는 전자의 대표적 사례이고, 전세계에서 반공주의 우파노조와 군부독재 하의 어용노조를 지원한 흑역사가 후자의 대표적 사례이다.

  이런 흑역사 때문에 미국의 노동조합운동은 다른 나라 노동운동에게 최악의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미국의 노동조합은 그런 외형에 비해 나름의 풍부한 투쟁의 역사를 갖고 있고, 비록 비즈니스 조합주의라고 해도 기층의 현장 조합원들은 나름의 계급성, 노동자성을 갖추고 있고 노동조합에 대한 조직적 충성도 역시 상당히 높다.

  그리고 비즈니스 조합주의의 상징인 사무엘 곰퍼스(Samuel Gompers)와 미국노동연맹(AFL)이 수백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노동조합 비즈니스를 주물렀다고 해도, 그들의 지배가 100%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왼쪽으로부터, 아래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했다. 1880년대에는 노동기사단(Kinghts of Labor)이 인종과 직종을 넘어선 조직화를 통해 AFL의 지배에 도전했고, 1910년대에는 생디칼리즘 경향의 세계의 산업노동자(IWW: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일명 워블리스) 연맹의 거센 도전을 받았다.

  1930년대 대공황의 시기에는 AFL의 직능별 조합주의를 비판하면서, 자동차, 화학 등 대공장 비숙련직 조직화에 나선 산업조직회의(CIO: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의 도전을 받았다. 1930년대는 미국 노동운동의 현대적 틀이 완성된 시기였고, 뉴딜 체제 아래서 AFL과 CIO가 동시에 성장하면서, 좌우의 대립구도를 형성했다.

  2차대전과 냉전시기를 거치면서, 공산당계 좌파를 축출한 CIO는 AFL과 차이가 없었고, 1958년 미국의 노동조합은 기묘한 이름의 통합노총 AFL-CIO를 건설했다. 사무엘 곰퍼스에 이어 조지 미니(George Meany)는 노동계의 대통령으로서 절대적 권력을 누리며, 전세계를 누리며 노동자 반공주의를 이끌었다. AFL-CIO는 국제노총인 국제자유노련(ICFTU)을 사민주의 계열의 유럽 노총들이 주도하자, 국제노련에서 탈퇴해 독자노선을 걷기도 했다.

  냉전 종식 이후 1997년 존 스위니 개혁파 지도부 아래서 내부를 혁신하고,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조직률을 뒤집으려는 시도가 이뤄졌다. 그러나 그 시도는 내부의 저항과 외부적 환경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오히려 내부 분열로 AFL-CIO를 비판하면서 적극적 조직화 모델을 강조한 전미서비스 노조(SIEU)가 팀스터 노조, 전미자동차노조(UAW) 등과 함께 탈퇴해 2000년 승리를 위한 변화(Change to Win) 연맹을 결성했다.

  1983년 조합원이 3,230만명이었던 미국의 노동조합은 2016년 현재 1,460만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한 때 35%를 육박했던 민간부문 조직율 역시 10% 이하로 추락했다. 갈 길을 잃은 노총은 여전히 분열돼 있다. 그러나 최근 시카고 교사파업을 필두로 50년간 정체된 실질임금 인상을 위한 투쟁이 중서부 여러 주로 확산되고 있는 등 현장의 투쟁동력은 살아있다.

 

  5. 영화평 - 조폭영화와 노동조합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상업영화이다. 노동조합의 이야기를 조폭영화로 풀어낸다. 또 영화 자체보다는 <로키>(1975)로 일약 유명스타로 부상한 실베스터 스탤론이 주연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유명한 영화다. 한 마디로 메이저 영화사의 B급영화인 셈이다.

  영화 자체는 작품성이 높거나 또는 역사물로서 완성도가 높은 것도 아니다. 따라서 냉정히 말해 영화 자체에서 기대할 것은 별로 없다. <로키>(1976년)로 상종가를 치는 액션 스타 실베스터 스탤론을 내세운 노조/조폭 액션물에 지나지 않는다. 또 무려 40여년에 걸친 노동조합의 역사를 담아내기에 역부족이었던 실베스터 스탤론의 마초 연기는 페미스트적 관점이나 영화예술적 관점에서는 최악의 수준으로 보인다.

  또 제목 자체가 주먹(fist)의 동음이의어여서 픽션(허구)의 냄새가 너무 풍기고, 노동조합이 철저하게 지도부 중심으로 전개돼, 비록 조합 내부의 견해차이와 갈등이 부분적으로 다뤄지긴 하지만, 조합원은 지도부가 주무르는 대로 움직이는 피동적 대상으로 묘사돼 전형적인 마초 액션영화의 틀에서 단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난다.

  물론 지미 호파의 실종이라는 엽기적이고 센세이셔널한 사건은 지속적으로 또 주기적으로 미국의 황색 저널리즘의 끝없는 사냥감이기 때문에, 노동조합보다는 지미 호파의 개인 스토리를 통해서 노동조합을 잘 알지 못하는 미국 독자와 영화팬들의 상상력을 지속적으로 자극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은 비즈니스’라는 자니 코박(지미 호파)의 신념에서 비즈니스로서의 노동조합, 조직폭력(마피아)의 폭력과 유착된 노동조합의 부정적 이미지가 사회적으로 고정됐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눈으로 보면, <F.I.S.T.>는 미국 노동조합(운동)의 어두운 단면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점에서는 탁월한 영화이다. 초기 노동조합의 형성과정은 당시 노동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고(다소의 과장과 단순화가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노동조합 조직 상층부의 실상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위원장 전용기와 초호화 사무실, 부정부패, 조폭과의 유착 등).

  따라서 영화 장면 속에서 지역과 현장, 지도부와 조직, 조합 총회와 조합사무실의 일상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표현돼 있어, 여러 가지 측면에서 토론해 볼만한 화두는 풍부하다. 정체성의 위기 속에서 헤매는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반면교재로서 나름대로 풍부한 토론꺼리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이 영화는 그 장면과 행간 속에서 과연 노동조합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